종교 인류학
[수요종교인류 글바다(6of7)] 에피소드들
수요종교인류학 글바다(‘내 안의 신을 찾아서’ 순례기 쓰기) 2025-3-28 김유리
주제문: 내 안의 신을 찾는 길은 헤매는 길이다.
취지: 에피소드를 즐겁게 모은다.
#1 차단 장치
저쪽도 지그시 이쪽을 바라본다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닭장에 날마다 모이 주러 들어 갈 때와 다르게 닭 잡으러 들어가는 날은 닭들이 알아챈다고 말이다. ‘스피리트의 레벨’(영적 차원)에서 만물은 연결된 상태로 있다. 에너지 바다에 떠 있다가 관계를 맺는다. 죽고 사는 관계로 마주 할 때 고조되는 긴장이 전달된다.
나만 만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쪽도 지그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영적 차원의 스피리트로서 마주 볼 때 타자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통찰에 이른다. 이번엔 네가 죽고 내가 살고, 다음엔 네가 살고 내가 죽고의 관계다.
차단벽을 치다
상품 사회는 스피리트를 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달님). 상품 사회에서는 스피리트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일이 간편하다. 상품 사회는 스피리트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게 막아 준다. 더 많이 살수록 더 잘 막아 준다. 더 잘 막아 줄수록 더 많이 산다.
상품 사회는 고기가 아직 고기이기 전의 단계를 대신 처리해준다. 죽음의 단계 말이다. 요리 레시피는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식구가 게장을 좋아한다 하여 오일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 있는 게를 사왔을 때 일이 생각난다. 게장 레시피에 먼저 게를 솔로 문질러 닦으라고 쓰여 있다. 쓰인 대로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다음으로 용기에 게를 뒤집어 차곡차곡 쌓은 후 장물을 부으라고 한다. 레시피에는 게들이 숨을 거둘 때까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날 거란 말은 없었다. 스피리트는 소리의 형태로 왔다. 소리는 타자가 다르지 않음을 통찰하지 못한 상품 사회의 한 구성원(그 날의 나)을 뒷걸음치게 한다. “다시는 게장 안담을 거야(‘안 먹을 거야’가 아니고). 앞으로는 사 먹을 거야.” 상품 사회에서는 스피리트를 마주 하는 일 없이 타자의 고기를 누리게 해준다. (돈의 영성, 고기의 은혜)
비슷한 사례들
(1) 한승태의 개농장 체험기에 도축 장면이 묘사된다. 한승태 작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읽다가, 덜덜 떨었다고 쓴 부분을 읽는다.
(2) 딜런 에번스의 『유토피아 실험』의 실험 농장에서 저자는 돼지를 잡아먹는다. 심리학과 인공지능을 연구해온 도시 출신 학자가, 정말? 아니나 다를까 이웃 농부를 초청해서 잡고 해체하고 가공한다. 그도 덜덜 떤다.
(3) 자급자족 농장 체험기 『내 뒷마당의 제국』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저자는 고기용으로 호기롭게 거대 토끼를 사육하지만, 난투 끝에 대치해서 토끼와 농부가 서로 노려보는 장면이 그려진다.
(4) 일본 핵발전소 사고를 그린 코미디 영화 [동경 핵 발전소]에서 한 가족이 걸어서 도시를 떠난다. 굶주린 가족 앞에 돼지 한 마리가 나타난다. 고기에 눈이 뒤집혀 돼지를 죽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어떻게 처리해야 고기가 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결국 근처 농부의 도움을 받는다).
스피리트의 세계를 차단
스피리트를 가려주는 상품 사회의 차단막은 에너지 전원이 들어오는 동안만 유지된다. 플러그가 뽑히면 스피리트가 돌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와 중력을 받는 것처럼, 만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압력을 다시 받을 것이다.
차단막 안에서
하지만 차단벽 안에서도 우리는 스피리트의 존재를 직감한다. 일상에 스피리트를 경험하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축제의 형식으로 주기적으로 내방하는 신을 맞이하기도 한다. 연희의 양식으로 보존하기도 한다(가면극, 현대의 환타지).
스피리트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일도 있다. 차단벽 너머를 인간은 가보려고 한다.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 것은, 하여튼 간에 가는 자들이 꼭 있어서 일 것이다.
#2 헤매게 될 때
왜 ‘글바다’인가?
수요일엔 종교인류 1년 세미나가 있다. 병행하여 ‘글바다’가 열렸다. 세미나 기간에 에세이를 네 번 제출하도록 되어 있는데, 글바다는 그 에세이 쓰기를 함께 하는 소모임이다. 그런데 왜 모임 이름이 글바다인걸까?
수정샘은 어디로?
왜 글바다인지 반장님께 물어 보고 싶다. 반장님은 어디론가 가고 없다. 나는 노를 저을 줄도 모르는데, 나는 항로도 모르는데, 선장님이 부재중이다. 나의 과제는 글바다 항해기가 아니라 표류기가 될까? 글 바다에 둥둥 떠 있다.
내 안에 신이 있다는데
글 주제는 “내 안의 신을 찾아서”이다. 형식은 순례기다. 신이란 무엇인가? 순례란 무엇인가? 물음표가 속출한다.
“내 안에 있는 신”인 것인가? 지금까지 신이 있다고도 생각해봤고 없다고도 생각해봤다. 없다고 생각하는 게 현대적인 것 같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나?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신’에 대해 쓰라고 하니, 일단은 있나 보다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신을 ‘찾아서’?
글 주제를 끝까지 읽는다. 단지 있다 없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신이라고? 달님(선생님)은 “그냥은 못 만난다”고 하신다. 호모 사피엔스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통해야 신을 만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도 “노력”하고 “훈련”해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냥은 못 간다. 그보다 먼저, 가고 싶은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을 찾아야 할 때는 언제인가? 왜 인간은 순례를 떠나고, 명상을 하고, 환각 버섯을 먹는 걸까? 그러고 보면 뭘 찾아다니는 이야기들이 잔뜩 있다. 세상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고, 찾느라 헤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딘가에 가서 헤매다 오는 이야기는 근원적으로 모두 같은 형태의 이야기인 것 같다. 적어도 우리의 글감은 “내 안”이라고 헤맬 장소를 한정해주고 있다.
안이라는 장소
그러나, ‘안’은 막연하다. 안과 밖의 ‘경계면’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일 수 있지만, ‘안’은 일단 면이 아니라 공간이다. 하지만 막연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아득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마음의 밑바닥”이라고 말하고 있다. 밑바닥이라는 장소로 하강한다는 점에서 잠수를, 지하라는 점에서 어둠을, 끝 모를 하강이라는 점에서 은하(우주) 여행을 떠올리게 된다. 그 밑바닥에서 어떤 통찰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통찰이 발생하는 것을 신을 만난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여기가 안인지 밖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상하 좌우를 분간하지 못할 장소로 하강중인데 여기가 안인지 밖인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이를테면, 대양 한 가운데서 방향과 내 위치를 알 수 있나? 더군다나 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분명히 단서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순례기가 인간 역사와 함께 지속되어 왔을 리가 없다.
문이 보이면? 열어, 못 열어
안으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찾는다. 그것이 단서다. 문은 분명히 일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늘 있는, 늘 보는, 별 것 아닌 것 중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잘못 놓인 물건, 잘못 쓴 낱말 하나와 같이 평범한 패턴에서 혼자 돌출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덜그럭 거리는 소리, 어디서 나는지 모를 불쾌한 냄새, 이상한 표정, 심상하게 놓여있지만 심상치 않은 물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다른 경로로 들어가게 된다.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을 만큼 믿음과 사랑과 용기가 있다면! 내 안에 있는 신을 찾아가는 길은, 매끄러운 줄 알고 지내는 일상에 돌출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시작할 것 같다. 때로는 뜻 모를 말, 틀리게 쓴 낱말, 부재하는 사람이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