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강남의 생각>에서는 만물이 하나임을 통찰하는 오강남 선생님의 ‘아하’ 체험을 매월 게재합니다. 비교종교학자이신 선생님께서는 종교란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연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하’ 체험이 가능하도록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요. 오강남 선생님은 캐나자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로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저서로는 『예수는 없다』,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세계 종교 둘러보기』, 『종교란 무엇인가』,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등이 있습니다.
속담으로 보는 세상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속담으로 보는 세상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필연성과 개연성 사이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 오강남 선생님
김 양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김 양은 자기의 결백을 주장한다. 옆에서 이 양이 한 마디 한다. “아니 때 굴뚝에 연기 날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안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안 난다고 하는 보장은 없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인과율이라는 것이 만고불변의 철칙이 아니라, 하나의 통계학적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이다.
금 덩어리를 금고 속에다 넣어놓고 사람들이 손을 안 댄다면 몇 백 년 후건 그 금 덩어리가 그 금고 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은 통계학적으로 보아 그럴 확률이 크다는 것뿐이지 그 금 덩어리가 금고 밖에 나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절대적 단언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겠지만 그렇다고 절대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하는 법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좀 억지 변명 같기도 하다. 그럼 백보를 양보해서 아니 땐 굴뚝엔 연기가 안 나오는 것이 상례라고 하자. 그러나 여기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따위의 양자역학이나 인과법칙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첫째, 아니 땐 굴뚝에서 나왔다는 그 연기라는 것이 정말로 연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연기도 나지 않은 것을 연기가 난 것으로 잘못 본다거나 구름 같이 생긴 도깨비 꼬리가 굴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나,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의 흰 수염이 굴뚝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것이 으레 연기려니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 앞집 굴뚝과 뒷집 굴뚝이 내가 선 위치에서 볼 때 일직선상에 포개져 있어서 뒷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마치 앞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이나 오해로 인해 연기도 안 나오는 김 양 집 굴뚝에다 대고 “이 집에서 지금 틀림없이 불을 때고 있노라”하고 단정하는 웃지 못 할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제 백보를 더 양보해서, 그러니까 2백보, 정말로 김 양 집 굴뚝에서 진짜 연기가 나왔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이란 김 양을 무조건 단죄하는 것뿐일까? 김 양이 직접 땐 불인가? 직접 땐 불이라면 자진해서 땐 것일까 혹은 강요에 의한 것일까? 자진해서 땠다면 왜 땠을까? 불을 때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무엇이었을까? 불을 때고 연기를 피워놓고도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일까? 하는 식으로 김 양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아쉬운 것 아닐까?
남의 집 굴뚝 연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섣불리 판정 내리는 일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확인된 연기라도 그 뒤에 얽힌 사정에 깊은 이해와 동정으로 다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해와 동정이라고 하는 우리 각자의 과제 앞에 얼마나 성실할 수 있는가. . 이군요.
이해라는 말의 무게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