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원초적 구멍”(수정)
동화인류학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12장~부록 김유리 2025-3-25
원초적 구멍:
토지 보유 권리에 대한 무문자 사회의 헌장
원초적 출현 지점: 땅이 사람을 낳는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트로브리안드인은 태생적으로 그 혹은 그녀가 일정한 지점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마을 공동체와, 그리고 영토와 연결된다고 믿는다.”(204)
트로브리안드의 종족 기원 신화는 태초에 한 여자가 특정 지점에 있는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는 짧은 이야기다. 그 여자의 혈통은 누구나 구멍이 있는 장소에서 거주하고 경작할 권리를 갖는다. 출현 지점 혹은 구멍은 “브왈라”라고 불린다. 브왈라는 ‘집’이라는 의미다.(204) 출현 지점과 관련해서 어떠한 숭배 행위나 예식도 없다.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될 뿐 존경의 징후는 없다.(428)
일상 속에 함께 있는 신화적 장소란, “오늘날의 생활 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원시적 실재”(396)이다. 말리노프스키는 신화란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발생하는 동시대의 신화”라며 “항상 발생 중인 신화”(396)에 대한 이론을 전개했다. 저자는 신화의 기능에 대해 “전통을 강화하고 전통이 더 높은, 더 나은, 좀 더 초자연적인 실재인 최초의 사건들에서 유래한다고 밝힘으로써 전통에 더 큰 가치와 특권을 부여하는 것”(397)이라고 말했다.
“항상 발생 중”이라는 저자의 신화론 대로라면, 원초적인 출현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진 유적에서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며 “감화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생산될 것이다. 지역 주술사와 주민들이 경작지 주술의 전통과 업적에 대해 종종 떠벌리거나 논쟁하는 “멜라네시아식 허풍떨기”(397-98) 현장에서 “항상 발생 중인 신화”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시조는 남자 형제와 함께, 주술과 약초를 가지고 원초적 구멍에서 나왔다. 출현 지점은 종족에 따라 불모의 땅, 금지된 작은 숲, 산호 바위 능선, 습지, 물웅덩이, 우거진 덤불숲 등의 특정 장소다. 이 장소들은 경작을 하지 않아 볼품없고 쓸모없어 보이는 야생 그대로의 장소들이다. 이런 곳에서 혈통, 주술, 치유와 영성이 기원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들은 힘이 분출하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섣불리 건드리면 해를 힘을 수 있는 성소로 여겨진다(달님). 이러한 성소가 있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이 땅과 어머니 자식의 관계를 맺었고 땅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는 감각(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8장 참조)을 유지해온 사회임을 보여준다.
토지 보유권: 그 땅에 살며 일하며 주술을 수행하며
트로브리안드인의 원초적 출현 신화는 씨족 집단과 영토를 결합한다. “하나의 출현 구멍에 하나의 하위 씨족, 하나의 영토 그리고 하나의 우두머리라는 원칙이 트로브리안드의 모든 사회 조직을 관통하고 있다.”(217)
한 사람의 트로브리안드인에게 땅은 실제로 그와 결합되어 있다. 토지는 “어머니 대지”이자 “여성 시조의 모습으로 그에게 혈통을 가져다주었고, 그를 먹여 살리며” 묻힐 권리를 준다. 원초적 출현 신화는 “진정한 은신처를, 결코 누구도 그를 강제로 떠나게 만들 수 없는 장소를 제공해준다.”(218)
짧은 신화적 이야기가 “생생하고 능동적이며 효과적인 힘으로서, 인간의 작업을 조정하고, 인간의 집단을 통합하며, 사람들에게 매우 뚜렷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218)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 이해하면 그들의 도덕적 확신, 법적 관례, 경제적 조직화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또한, 원초적 출현이라는 단일한 믿음이 결혼이나 신분 문제와 관련될 때 토지 보유와 관련하여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나의 신조가 다른 신조들과의 상호 간섭 및 보완을 통해 특이한 거주의 양식을 형성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자세한 사항 생략)
기본권으로서의 토지 보유권
정리하면, 토지 보유권에 대한 장(12장)은 트로브리안드 농경 사회의 “토지 재산”(부동산)에 대한 논의다. 이곳에서는 일정 범위의 영토가 한 무리의 사람에게 속한다고 할 때, 그 땅을 거주용지, 경작용지, 성스러운 작은 숲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거주민은 토지에 대해 기본권을 갖는다.
“어떤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항상 그곳에서 땅을 경작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262)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 충분한 토지를 제공받는다. 수확물과 먹을 식량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모욕적인 일이라는 공통의 정서가 있다. 한 사회가 토지 보유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땅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성질을 보여준다. 트로브리안드에서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땅에 속한 조상들과 함께 경작(가드닝)하고, 먹을 것을 얻고, 집짓고 살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죽어서 묻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토지 소유자는 가족을 이루고, 마을 공동체에서 작업하며, 공동의 믿음과 의례로 조직된다.(258) 토지 재산의 측면에서 산호섬 사회는 수준이 높고 성공적인 양식을 이룩했다.
트로브리안드에서 사적 소유권이라는 말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사적이냐 공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적이면서 공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혼자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일할 때조차 고립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개인 안에서 “보통 두 집단이 만”나고 있다.(264) 남편이자 처남으로서, 가장이자 족장으로서, 주술사이자 탁월한 농부로서, 아내이자 부재 지주로서, 트로브리안드 사람은 언제나 “이중의 자격으로”(264) 일한다.
이와 같이, 원초적 출현 신화는 트로브리안드 사람들의 땅과의 관계를 보장해준다. 땅에 대한 사용과 거주의 권리를 기본법으로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원초적 출현 지점은 무문자 사회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후기 : 달님의 이야기
인간은 땅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원초적 관계를 끊어 놓은 것이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다. 백인 사회와 접촉한 무문자 사회에서 땅과의 관계 파괴는 토착민의 존엄과 행복 추구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땅의 소유권을 두고 백인들은 토착민들을 원초적 관계로부터 떼어내어 화폐적 관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공유지로부터의 차단이 사람들의 마음에 파괴적 결과를 미치는 것을 말한다. 땅과의 분리는 인간을 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동산을 그렇게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시야를 넓게 가져가 보자.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에 연연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붙을 데’, ‘기댈 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화폐적 관계에 휘둘리는 가운데 인간사의 어떤 일도 견디게 해주는 것은 땅과의 연결이다. ‘숲은 평화롭다.’ 땅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식물, 동물, 계절, 바람을 보며 가는 것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