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바다인류] 6,7장 발제
6장. 해상 실크로드의 발전
인도양의 원거리 교역
다양한 중심이 존재하는 다중심적(polycentric) 공간, ‘만국보편의’ 개방적 공간, ‘평화의 바다’
지역 단위에서 만들어진 교류의 네트워크들이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는 방식으로 확장
지중해 세계와 인도양 서부 세계 간 교역, 중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역, 두 거대한 네트워크가 연결
불교와 힌두교 확산에 따라 교류도 확대
상인, 선원, 여행자, 종교인
몬순 계절풍이 원거리 항해를 추동하는 모터 역할
교역품 아라비아의 유향과 몰약, 인도의 후추와 향신료, 보석, 중국의 비단, 아프리카 노예무역, 인도의 보석과 직물,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금, 주석, 고급 목재,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 – 사치품이 원거리 교역을 가능하게 한 주요 동력원
인도양 서부 해역
인도아대륙과 스리랑카섬 – 중동 유럽인들에게 그 자체로도 중요할 뿐더러 더 먼 동쪽 세계로 향하는 중간 지역으로 중요.
스리랑카 – 인도양 서부 세계와 중국ㆍ인도양 동부 세계가 만나는 핵심 지점.
인도아대륙의 마우리아왕조 시기, 3대 황제 아소카 대제 – 제국과 불교가 결합, 인도의 교역 활동이 더욱 활기.
불교와 자이나교는 항해와 교역에 호의적, 두 종교는 이로 인해 더욱 확산되었다.
기원전 247년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져 이곳이 상좌부불교의 전파 중심지로 성장.
스리랑카는 두 거대한 해양 세계가 조우하는 지점
고대 인도 상인들은 분명 해상 무역에 종사.
페르시아, 홍해, 로마, 그리스 등과의 교역과 외교 업무가 해상을 통해 수행되었다.
오래전부터 많은 외국인이 종교ㆍ문화적, 경제적인 이유로 인도라는 신비의 나라를 찾았다.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확대 – 키루스 2세의 영토 확장(인더스 유역까지), 다리우스 1세의 네코 운하 완성(지중해와 홍해의 연결로)과 인도 항해(카리안다의 스킬락스를 파견) 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이집트 정복 후 귀환에서 일부 해로로 귀환(몬순에 관한 기록)
지중해 사람들이 몬순을 알고 난 후 인도양 진출이 훨씬 용이해졌다. 연안 항해 대신 공해를 가로 질러가는 항해가 가능해졌다. 여기에서도 스리랑카가 중요. 서기 1세기 중 타프로반, 즉 스리랑카섬을 알게 된 것. 인도 동북부의 벵골만을 접하게 되고, 중국 방면의 항해 가능성까지 열린다.
스리랑카의 고다바야 고항 근처에서 발견된 침몰선 – 기원전 2세기~1세기경 선박으로 추정. 인도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례. 흑색과 적색 도자기, 맷돌, 철괴와 동괴, 유리 등의 화물. 페르시아 및 중국 도자기들, 로마제국 동전들
홍해 교역
지중해와 인도양 상인들이 중간지점, 아덴과 소코트라에서 만나 거래 -> 로마제국 시대 항해의 발전으로 직접 찾아가는 항해 가능, 인도 선박들 홍해 내부 미오스 호르모스나 베레니케로 직행.
홍해 – 지중해와 인도양이 해상 교역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지만, 항해 여건이 나빠서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인도양 세계와의 교역이 열려야 이 장애물을 넘겠지만 홍해와 인도양의 항해를 위해 아라비아반도를 돌아가는 항해 또한 기술적으로 쉽지 않았다.
로마제국 시기에 인도를 비롯 아시아 세계로부터 귀중한 산물이 유입, 홍해 교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홍해 및 아라비아 지역에 대한 탐험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로마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상업 세력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홍해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아덴 – 홍해, 아라비아해, 페르시아만의 여러 해역을 연결하는 국제 교역 중심지로 성장.
소코트라섬 – 고립된 섬의 독자적 진화로 기이한 동식물과 식량 확보의 어려움. 중개 교역을 수행하기 좋은 위치. 로마 시대에 아랍계 하드라마우트왕국의 지배하에서 중개 교역을 하였다. 근해는 항해가 무척 까다롭지만, 홍해와 인도양 양측 상인들이 모이는 위치적 장점.
해안 절벽의 호크(Hoq) 동굴 – 다양한 지역 출신들이 남긴 문자 기록
페리플루스의 세계
『페리플루스』 – 서기 30년경 로마의 속주 이집트에 거주하는 그리스 상인 출신의 무명 저자가 쓴 일종의 무역 안내서로, 이집트에서 활동하는 상인이 홍해를 통해 인도양 세계로 나가 교역하는 정황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 동해안, 아라비아, 인도 최남단의 코모린곶까지 직접 항해 교역.
인도 동쪽 지역은 간접 정보를 전달.
상업 정보들 외에도 인류학적 박물학적 관심 사항들을 다수 기록.
지중해 지역 수출품의 이동 : 알렉산드리아 -> 콥토스 -> 미오스 호르모스(6~7일 소요) or 베레니케(11일, 항해 거리 –230해리)
수입품은 수입세 25퍼센트를 지불 반대 방향으로 들어간다 : 아둘리스(Adulis) -> 바브엘만데브(Bab-el-Mandeb, ‘눈물의 문’) 해협(홍해에서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병목 지점) -> 아덴만, 소코트라섬 -> 오만 해안 -> 페르시아만 입구 -> 마크란 해안 -> 인도 도달, 엠포리아 노미나라고 부르는 거류지들(외국 상인이 세금 납부 정식으로 교역할 수 있는 시장/서해안의 바르바리콘, 바리가자, 동해안의 무리지스, 넬킨다) 형성.
바리가자 – 매우 크고 세련되고 중요한 경제 중심지. 여러 종류의 사치품, 현지 지배자를 위한 물품, 로마 화폐와 금은, 외국 상인들의 식량 수입 / 향신료와 약품, 현지 직물과 중국 비단 수출
무리지스(Muziris) – 소코트라에서 남인도로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항로(몬순을 이용한 직항로) 개발로 중요 항구로 성장. 그리스인과 아랍인, 유대인이 찾았다. 후추의 생산지.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 스리랑카 등 주요 지역들 간의 중간 연결 지점으로 위치상 국제 교역 중개에 이롭다.
중국의 견직물 – 인도는 중개만 할 뿐. 이동로(중국 -> 박트리아 ->(육로) 바리가자 : 실크로드 중 일부가 아래로 가지를 쳐서 인도로 오는 길 : 타클라마칸사막까지 이어진 교역로가 북로와 남로로 나뉘었다가 카쉬가르에서 다시 합류, 파미르고원을 넘어 박트리아로, 여기서 일부는 계속 서진 육로를 통해 지중해까지 직접, 일부는 남쪽에 위치한 인도 항구로 가서 강을 따라 바르바리콘과 동쪽 길을 따라 바리가자로 나뉜다. / 중국 ->갠지스강 -> 리뮈리케)
인도 교역을 위해서는 대략의 상품을 적재할 수 있는 크고 탄탄한 선박이 필요. 필시 거상일 것인데, 한 명의 상인이 운영하기엔 위험이 크므로 여러 상인의 화물이 혼재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근대 세계의 국제 무역을 연상. 지중해–홍해–인도양을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에 자본과 상품이 오가며, 대상인과 자본가, 투자자가 거대한 규모의 사업을 운영.
상품과 화폐 교역
이집트의 그리스 상인들은 해외의 사치품을 구입, 일부를 이집트에 남기고 나머지를 지중해 지역에 전달하는 일을 주로 했다.
교역품 – 아프리카의 상아, 대모, 유향, 몰약, 계피;아라비아의 유향, 몰약, 알로에;인도의 향신료, 약재, 향 제품들, 보석(터키석, 청금석, 마노,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등), 직물(면직물, 중국산 견직물), 상아, 진주 등의 사치품 / 아랍과 인도상인들은 페르시아, 아라비아 남부, 아프리카 동부 지역으로 보내는 인도의 직물, 식량, 원재료 등의 중저가 상품들과 생필품들
금속의 이동 – 철(이집트->아둘리스:사냥용 혹은 전투용 창날), 납(은 추출), 주석 구리(인근 지역에서 산출되지만 먼 곳에서 수입–육로 수송보다 해로 수입이 더 싸므로 버마, 타이, 말레이반도->동쪽으로 수출), 화폐(로마의 데나리온–고가의 몰약과 인도 바르바리콘의 중국 견직물은 현찰로만 거래)
서에서 동으로 많은 현찰이 유출되는 데 불만이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며 도덕적ㆍ윤리적 함의를 가진 주장이었다.
인도양 세계에서 로마의 지위
로마 제국은 무역을 직접 통제 관여하기보다 상인들에게 맡기고 높은 관세 수입을 얻고 수입품 중 일부는 강제적인 가격을 적용해 소득을 얻었다.
서기 1세기가 되면 부분적인 교역로들의 연쇄를 통해 해상 실크로드가 중국으로부터 페르시아만과 홍해까지 연결, 로마와 중국 사이에 물적 교류가 가능해졌다. 중간에 위치한 여러 지역은 경제ㆍ문화적으로 융성기를 맞았고, 그리스인의 지리적 인식 세계는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대서앙을 포함하는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로마가 쇠락, 유럽 경제가 기력을 잃으면서 이 연결망은 쇠퇴해갔다.
7장.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확장 –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해양 네트워크 발전과 인도양과의 연결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해양 세계
말라카해협 – 아시아 동쪽 세계와 인도양 세계를 통과하는 해협
끄라지협 –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 말레이 반도 중 좁은 육지
끄라지협과 말라카해협 –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세계와 인도양 세계 혹은 그 너머 중동과 지중해 세계를 연결하는 초장거리 네트워크위 관문으로, 이 지점을 지배하는 세력이 초장거리 해상 교역을 통제했다.
고대 중국 – 북방(‘중원’)의 황허 농민과 남쪽 연안 지역 주민들의 합으로, 육상과 해상의 잠재력을 모두 갖춤. 남중국해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외부의 물품과 정보가 들어옴.
내부 세계로 관심을 제한하려는 안정 추구 성향과 외국의 귀중한 물품에 대한 욕망 사이 긴장이 존재. 주로 유교 덕목으로 후자를 눌렀으나 때로 충돌.
‘조공’을 통해서만 외부와 교류하고자 하고, 조공이 아닌 교역에는 비호의적이었으며 해외 사치품은 윤리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정신적 태도 때문에 중국 상인과 선원은 외부로 나가지 못했고, 대신 외지인들이 중국을 찾아와 부실한 정보로 바깥 세계를 이해.
중국과 인도양 및 지중해 세계와 연결되는 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이 매개 역할.
사휜과 동썬 – 중국의 군사·정치적 압력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고대 국가 건설을 시도, 중국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중국과 무역 및 문화 교류를 지속했다. 동시에 원거리 해양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어 동남아시아, 인도양 지역, 페르시아, 로마의 다양한 물자들이 유입되었고, 그중 일부는 중국 내륙으로, 한반도와 일본까지도 전달되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베트남 중부의 사휜(Sa Huynh) 문화,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의 동썬(Dong Son) 문화가 발전. 이 두 문화권이 인도양 방면, 중국 방면과 소통하며 양측을 중개.
사휜 문화 – 베트남 중부·남부에서 발전한 금속기 문화. 참파왕국을 세운 참족의 선조
동썬 문화 –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 남중국에서 육로로 넘어온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문명권에 흡수되어 자생적 문화 형성. 높이 1m, 무게 100kg의 거대한 청동북이 중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수마트라, 자바, 술라웨시 섬 등지에 걸쳐 발견. 해양 교류 네트워크를 이용해 확산.
두 문화 사이의 견고한 경계(청동북 발견 유무)
기원전 3세기의 백월(百越)족 – 연안을 항해하며 활발히 교역,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 보석 가공과 수출에서 로마의 영향까지 볼 수 있다. 인도양의 교역 네트워크의 한 끝이 동남아시와 연결, 다시 중국과 물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
남비엣 – 백월 지역에서 비엣족을 중심으로 건설된 독립 국가. 이 왕국 덕분에 변경이 안정되는 효과, 교역도 발전. 남비엣이 한과 교역을 하면서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하는 고리가 됨. 이 시기에 한나라 문화가 본격적으로 광둥 및 광시 지역, 북부 베트남으로 확산하기 시작. 이때 광저우가 중요 교역항으로 발전.
한–남비엣의 평화로운 교역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중국과 로마의 통교 노력
두 제국의 교역은 도상의 여러 중개 교역집단들(소그드인, 파르티아 변경의 차락스와 아폴로구스, 시리아사막의 팔미라)에 의한 릴레이에 의해 이어졌지, 전체를 통제하는 것은 어려웠다. 두 제국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직접 접촉하려고 시도(서기 97년 반초의 감영 파견)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 사이의 멀고 험난한 길과 그 길목을 지키는 폭력적인 민족들 때문에 육상 실크로드를 통한 직행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중간 매개 지역들의 도움을 받아 간접적으로 교류했다.
지오치와 푸난
손권의 강남 지방 지배로 북중국은 남중국 및 해양 세계와 직접 접촉이 일시적으로 끊어졌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 해양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실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동오(東吳) – 중국 남부 지역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 말 산지인 중앙아시아와 연결이 끊기자 자오치를 침략, 윈난성의 말 공급선과 연결하고 열대 산물을 얻었다. 한족의 영향 하에 들어간 양쯔강 이남 지역의 자오치가 압박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광저우가 그 역할을 대신하여 성장 번영했다. 이즈음 끊어졌던 해양 네트워크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 남방 교역이 되살아나고 사치품이 유입되면서 광저우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304~316년 흉노족의 공격 지배를 받은 중국 북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이때 한족 문화, 제도, 언어 등이 광범위하게 유입, 경제도 성장했다. 육상보다 해상 교역도 커져, 남방 교역이 증진되어 해외 교류가 확대되었다.
『한서』「지리지」 – 베트남 북부의 일남에서 남인도의 동부 해안에 있었던 황지국까지의 뱃길 기록. 수년이 걸리는 위험한 모험. 황지~말레이반도(8개월), 말레이반도~일남(2개월) / 합포, 일남~차오프라야강 하류·말레이반도 상부 지역~끄라지협 통과(10일 이상)~벵골만~황지
자오치 – 3세기 참족이 새로운 국가 입읍(참파) 형성. 참파의 항구 호이안은 중세까지 양한 국적의 외국 상인들과 교류하며 중요한 항시로 기능.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상당한 자율권을 받아 주도적으로 교역을 중개, 다양한 종교가 유입, 문화가 급속도로 섞였다.
푸난 –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 일대를 무대로 성장한 고대 왕국. 2~6세기 프놈 왕국이 번영. 2세기 이후 끄라지협을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수행하면서 동남아시아 해양 강국으로 발전. 동남아시아 최초의 해상 교역 국가. 정치적 중심지는 앙코르 보레이, 경제적 중심지는 외항인 옥에오(타이만과 남중국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 물산이 풍부. 몬순이 바뀌는 지점. 유럽, 인도, 중국 등지의 다양한 물품이 출토)이다.
참파의 호이안과 푸난의 옥에오 – 동남아시아에서 발전하던 항시의 전형. 교역의 필요에 의해 산간, 내륙이나 해안가의 다른 항시와 결합하여 항시국가라는 형태의 국가를 형성.
말라카해협 – 해로가 좁고 옅은 여울이 계속되며 강한 조류가 배의 운항을 방해한다. 또한 이곳을 기점으로 몬순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범선이 대기해야 하는데, 이때 해적이 기승을 부렸다. 이를 피하기 위해 끄라지협을 넘어 육로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동남아시아 – 세계화의 수문 역할. 중국과 인도양 세계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면서 강력한 ‘해양 무역 국가’ 등장. 푸난이 그 첫 번째. 그 후 스리위자야, 샤일렌드라, 마타람, 말라카가 뒤를 이어 발전.
5세기, 법현과 말라카해협
불교는 3세기 해로를 통해 본격적 확산되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간 해상 연결 네트워크가 발전하는 데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불교 관련 서적과 물품 등이 상인들을 통해 전해지고 상인들과 불교의 관계도 깊어졌다.
동진 시대 승려 법현의 천축행(장안을 출발 6년 만에 중부 인도에 도착) 귀국 여정(벵골만 교역로를 이용하여 귀국 – 갠지스강 – 인도의 첨파대국 – 다마리제국 – 스리랑카 – 광저우)을 통해 당시 항해를 살펴본다. 스리랑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해 한 섬에 표류, 해상에는 해적이 들끓고 길어진 여정에 식량 조달에도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배에 탄 사람들은 주로 동남아시아의 상인이었고, 그 후에도 폭풍우로 항로를 이탈 항해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동남아시아 해상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동남아시아 상인들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역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제국(581~618)
중국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대운하 정비. 당나라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강물을 연결하는 공사 – 수도 뤄양에서 북쪽으로 1,350km, 남쪽으로도 확대된 대운하
뤄양 서원에서 산양까지 통제거(605), 산양에서 강도까지 한구(605), 고구려 원정을 위하여 판저에서 탁군까지 영제거(609), 경구에서 여항까지 강남하(611)
(수 세기 동안 착실하게 성장해 생산성이 더 높아진) 양쯔강과 (전통적인 북쪽의) 황허, 두 강과 그 주변 지역을 내륙 수송망으로 연결,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번영을 누렸다. 남북을 연결, 상이한 두 지역의 자연자원 및 인적자원을 이용, 화려한 중세 황금기를 열 수 있었다. 이후 중국이 중국 대륙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장기적으로 제국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에 이 대운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이후 중국은 스스로 바다에서 멀어지고 대륙 내부에 갇혀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