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바다 인류](2) 해양 네트워크의 매개자
해상 실크로드 발견
인도양을 중심으로 지중해,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가 있었다. 이 교역의 크기는 중요한 거점지를 형성하게 했다. 이에 『바다 인류』의 저자 주경철 선생님은 인도양을 다양한 중심점이 존재하는 다중심적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인도양은 몬순 계절풍이 규칙적으로 불어서 일찍부터 원거리 항해가 개발되었다. 지역 단위에서 만들어진 교류의 네트워크들이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는 방식으로 확장되어 나아갔다. 지중해가 끊임없는 투쟁의 바다였다면 16세기 포르투갈의 시도가 있기 전까지 인도양은 비교적 평온했다. 해적이 없지는 않지만, 치명적인 해전을 일으켜 인도양 전체를 차지하려는 세력은 없었다. 대신 다인종·다문화 집단들 간 자유 교역이 이루어졌다.
인도 상인은 인도의 동서 방향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는 한편, 신비의 나라로 여기는 외국인이 종교·문화·경제적인 이유로 찾아왔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인도에 대한 관심이 늘 컸다. 그들은 서인도양과 동인도양의 중간에 위치한 스리랑카가 두 거대한 해양 세계가 조우하는 핵심 지점임을 알게 되었고, 이 섬을 갈 수 있다면 뱅골만을 지나 중국 방면의 항해까지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홍해는 항해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교역 루트로 개발되었다. 홍해의 아덴과 아덴만에 소코트라섬은 아라비아해, 페르시아만의 여러 해역을 연결하는 국제 교역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아프리카의 상아, 대모, 유향, 몰약, 계피; 아라비아의 유향, 몰약, 알로에; 인도의 향신료, 약재, 향제품들, 보석(터키석, 청금석, 마노,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등); 직물(면직물, 중국산 견직물), 상아, 진주 등이 오갔다. 철, 납, 주석, 구리도 매매 되었는데 주석이 가까운 곳에서도 생산되지만 육로가 수송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해로를 이용한 먼 거리에서 수입했다. 지리적 여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니라 가격이 더 싼 곳으로 상품이 이동하는 무역 체제가 자리 잡았다. 홍해 교역은 이집트가 로마 지배에 들어간 후 더욱 활발해졌지만 황실이 교역 활동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았다. 로마제국 시대에 들어와서 항해가 더욱 발전하여 아덴과 소프트라섬은 거치지 않고도 직접 더 먼 지역까지 항해가 가능해지자 항구로서 가치를 잃게 되었다.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확장
기원전 1000년경부터 베트남 중부에서는 사휜(Sa Huynh)문화가,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에서는 동썬(Dong Son) 문화가 발전했다. 이 두 문화권이 한편으로는 인도양 방면,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방면으로 소통하며 양측을 중개했다. 기원전 204년 백월 지역에 남비엣은 한과 교역을 하면서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나라 문화가 본격적으로 광등 및 광시 지역과 북부 베트남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요 교역항으로 발전한 곳이 광저우다. 광저우는 중국 역사 전반에 걸쳐 바다를 통한 세계와의 교역에서 핵심 창구 역할을 맡는다.
한제국 몰락 후 370년 동안 분열의 시대가 이어진다. 이 시기에 무대에 등장한 동오(東吳)는 중국 남부 지역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나라는 말 산지인 중앙아시아와 연결선이 끊어지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자오치(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지역)를 침략했다. 자오치를 중심으로 끊어졌던 해양 네트워크가 점차 다시 활성화되고 남방 교역이 살아나고 사치품이 유입되면서 광저우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맞았다. 하지만 광저우의 타락도 극심해졌다. 자오치지역은 내분으로 세가 약화되어 3세기가 되면 새로운 국가인 임읍(林邑), 즉 참파가 형성되었다. 이 지역의 항구도시들은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상당한 자율권을 받아서 주도적으로 교역을 중개하였으며,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문화가 급속도로 섞였다. 참파에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서기2~6세기에는 푸난(프놈 왕국)이 번영했다. 푸난은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 일대를 무대로 성장한 고대 왕국이다. 참파의 호이안이나 푸난의 옥에오는 동남아시아에서 발전하던 항시의 전형이었다. 이런 곳들은 교역에 필요에 의해 산간, 내륙이나 해안가의 다른 항시와 결합하여 항시국가라는 형태의 국가를 형성했다. 동남아시아 역사는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변전이 심하며, 내분과 외침이 잦았다. 다만 이 역사를 관통하는 한 가지 중요한 경향은 중국과 인도양 세계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광대한 아시아 동쪽 세계와 인도양 세계가 접하는 지역이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그리고 그 사이의 말라카해협이다. 중국의 관점에서 말라카해협 너머 서쪽 바다로 가는 바닷길이 서양이고, 그쪽에서 들어오는 동쪽 바닷길이 동양이다. 중국은 육상과 해상의 잠재력을 다 갖추고 있었지만 남부 해안 지역과 그 너머 세계에 대해 단지 귀중한 이국 상품이 들어오는 통로로만 볼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바다와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자신들 내부로만 관심을 제한하려는 안정 추구 성향과 외국의 귀중한 물품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황허 유역은 일찍부터 여러 단계의 매개를 통해 인도양 및 지중해 세계와도 연결되었는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이 매개 역할을 했다.
이슬람의 바다
이슬람 발흥 이전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강력했지만 비잔틴 제국과 치열한 경쟁으로 아랍–이슬람 세력에 흡수되었다. 페르시아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종교적으로 이슬람화가 크게 진척되어 갔으나 아랍 문화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온전히 지켰다. 이는 이슬람권 내부의 종교·정치적 긴장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으나 아랍 상인과 페르시아 상인은 갈등 없이 함께 활동했다. 762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하여 거대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바그다드는 권력의 중심지이자 아랍 과학과 철학의 요람이 되었다. 바그다드는 비옥하고 인구가 많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중심지로서, 중동 지역 사치의 중심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이것이 페르시아만 항구들과 인도양 간 교역을 자극했다. 소하르, 시라프, 키시, 호르무즈 등이 주요 항구였고 아라비아반도의 아덴과 제다가 아랍어를 하는 페르시아인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되었다.
8세기 이후 시라프가 두각을 나타냈다.(10세기 말까지) 가장 중요한 항구. 무덥고 식량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물이 깊고 폭풍우로부터 보호받는 위치여서 인도양 교역에 유리했다. 시라프는 가까운 내륙 지방에 위치한 시라즈의 캐러밴 루트와 연결된, 육로와 해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교역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8세기부터 스와힐리 해안에 모스크가 들어선 것은 페르시아의 시아파 이슬람교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종교 전도와 함께 이슬람 상업 공동체들이 아프리카 동해안에 형성되는데, 이들은 오만과 페르시아만에 연결되어 있었다. 인도양 방면 해양 소통로와 아프리카 내부 소통로가 만나는 지점들에서 스와힐리 문화가 발전했다. 페르시아 남자와 현지 여성의 결혼을 통해 동화가 가속화했다.
페르시아 시라프 항구는 국제 교역의 중심점이 되면서 엄청난 부가 쌓였다. 여러 항구에서 작은 보트들을 이용해 상품을 가지로 시라프에 오면 이곳에서 중국행 선박에 적재한다. 상품을 적재하고 나면 인도의 퀼롱 등 몇 군데를 거치며 교역도 하고 물이나 식량 등 보급을 확보한다. 그리고 말라카해협을 지나 스리위자야 혹은 베트남이나 중국으로 간다. 시라프에서 광저우까지 해로는 9,000 킬로미터 거리다. 이 엄청난 거리 항해가 가능했던 것은 우수한 선박인 다우선, 몬순 체제, 중국과 아랍·페르시아 세계의 지배자와 상층의 소비재 수요가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소수 아랍인들은 육로나 해로로 탐사를 했고 멀리 신라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