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기말에세이수정] 바둑으로 마음 읽기
바둑으로 마음 읽기
주제문: 바둑으로 마음을 읽어요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과 즐기고 싶어서 도심으로 모인다. 카페로 레스토랑으로 끝없이 맛 집을 전전하고 지인들과 수다를 떨지만 뭔가 남는 게 없는 것 같고, 허전하다. 심지어 커플들도 심심해지면 각자 스마트폰에서 재미를 찾는다. 정보의 홍수 속에 감각의 극대화를 추구하지만 마음이 편치않고 여전히 외롭다. 왜 그럴까. 우리 인류는 더욱 행복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고대인들이 삶은 어땠나.
약 4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은 언어도 없었지만, 그들은 교감과 소통의 달인이었다. 특유의 ‘hmmmmmm(흠)’의 발성으로 노래를 불렀고, 춤을 추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나누었다. 아마도 각본을 짠다면 이러지 않았을까. 타잔과 제인의 대화를 상상해본다.
“흠흠흠, 제인! 꺗호호(흥미진진한 일을 겪었어). 크앙앙(동지들과 매머드를 사냥했어). 덜덜덜(맘모스의 어금니 공격 엄청 무서웠지). 흐흐흠(겨우 매머드의 공격을 피하자). 꾜꼬꼬꼬(친구들이 맘모스의 시선을 딴 곳으로 끌었지). 어흥흥흥(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서 잡았어).” “흠흠흠, 오! 타잔! 쪽쪽(넌 나의 영웅이야).
이렇게 네안데르탈인은 끝없는 생존의 위협 속에 안 보이는 동식물의 기운을 읽고, 말로 설명을 다할 수 없는 특유의 동작과 노래로 마음을 소통했다. 그리고 약 20만 년 전 더 강력한 놈이 탄생했다. 바로 사피엔스. 우리 현대인류의 조상인 그들은 ‘유동적 지성’을 탑재해서 더욱 강력한 소통과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는 다른 분야의 지식을 서로 연결하는 힘이다. 이러한 연결은 현실과 언어가 일치할 필요가 없는 ‘비유’의 능력을 더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래서 자유롭고 환상적인 사고가 생겨날 수 있었다. 즉 더욱더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경계’에서 초월이 발생한다
유동적 지성은 인류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자신을 넘어서는 힘과 기운, 안 보이는 에너지를 향해 탐구하고 실현하는 ‘초월’에 대한 직관을 열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인류는 과학을 발달시켰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인공위성을 띄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초월’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주역 계사전12장에서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書不盡言 言不盡意 (서불진언 언불진의)’ 글로는 말을 다할 수 없고, 말로는 뜻을 다할 수 없다. 즉 보이는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끝없이 유동하는 우리의 마음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언어로는 ‘사랑한다’를 다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소리와 춤을 담아 음악과 미술 등등 다양한 예술을 창조했다. ‘안 보이는 어떤 것’을 ‘보이는 어떤 도구’로서 ‘초월’을 행한 것이다.
이러한 초월은 경계에서 발생한다. 삶과 죽음 사이, 정신과 물질 사이, 혼돈과 질서 사이의 경계에서 우리는 어디로 갈지 마음을 쓴다. 그렇다. 우리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을 넘어 초월하여, 자신만의 인생을 새롭게 창조하고 싶음을 열망한다.
동양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 경에 복희씨로부터 음양의 상징이 나왔다. 밤과 낮, 멈춤과 움직임, 들숨과 날숨, 그 둘 간의 균형을 맞춰 초월하기 위해 그 사이 ‘경계’를 잘 살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경계(빨간색글자)는 천지인, 음양중으로 일컬으며 불교에서는 중도, 유교에서는 중용을 강조했다. 바둑 또한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정신수련으로 ‘정수(正手)’를 추구해왔다. 특히 바둑은 전략 자체가 ‘경계’를 보면서,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읽는 수련이다.
바둑, ‘경계’를 보며 마음을 읽는다
바둑의 어원을 살펴보자. ‘바’는 ‘밝히다’에서 왔다. ‘둑’은 ‘두다+ㄱ’ 이다. 이것을 합치면 ‘밝혀진 것(지혜)을 두어보는 것’이다. 즉 지혜를 수련하는 것이다. 바둑의 규칙은 평범한 만 4세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쉽다.
[그림1]처럼, 흑과 백이 각자 땅을 둘러싸서 나눠 갖는다. 백집 28집, 흑집 28집으로 비겼다. 집이 많은 쪽이 승리한다. 그렇다면 [그림1]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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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을 보자. 빈 땅에 흑이 구석을 차지했다. [그림2]에서 백도 땅을 차지했다. [그림3]에서 흑은 한 수를 더 두어 땅을 넓혔다. 이처럼 땅을 서로 나눠 갖는 와중에 ‘경계’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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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의 빨간 부분이 경계이다. 경계는 흑땅도 아니고 백땅도 아니다. 진흙탕같이 변화무쌍한 변화가 숨어있는 틀(질서)이 안 잡힌 공간이다. 그러한 혼돈 속에서 [그림6]을 보자. 흑을 나라고 하고, 백을 상대라고 하자. 나는 백집을 호시탐탐 엿보며 들어가려 한다. 이때 [그림7]에서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읽어야 한다. 상대는 자신의 땅을 지킬지, 새 땅으로 확장할지 알 수 없다.
승부를 바라보는 마음
이렇게 바둑은 끝없이 요동치고 변화하는 ‘경계’에서 내 마음과 상대 마음을 읽어서 합치된 선택 안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읽는 과정을 수읽기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바둑은 묘하게도 이기려고 할수록 오히려 상대 수가 잘 안 보인다. 나만 잘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욕심이니, 쉽게 보일리 없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고 나와 상대 마음을 읽으려 할 때, 오히려 묘한 전율을 느낀다. 상대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 몰입의 순간 충만함이 몰려오고 은은한 감동을 느낀다. 결과는 결국 누가 더 마음을 잘 읽었느냐에 따라 나올 뿐이다.
승부는 너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승패로 나눠지기에 ‘초월’을 다한 새로운 바둑이 탄생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바둑은 무료하고 따분할 뿐이다. 그렇게 수련을 하다보면, 매순간 경계에서, 과한 수를 두면 상대에게 응징을 당한다. 안일한 수를 두면 집 균형이 무너진다. 그래서 경험이 쌓일수록, 상대와 내가 납득이 가능한 묘한 조화점을 찾는다. 그래서 집 차이의 균형이 고수로 갈수록 1-2집으로 준다. 이것이 서로의 대립 속에 초월이 일어나며, 같이 성장하는 균형이고 대칭이다. 물론 나와 상대의 마음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극밀하게 다 읽을 수는 없다. 그 때는 느껴야 한다. 돌의 흐름과 리듬, 나와 상대의 표정이 합치되는 그 순간을! 그 때 우리는 초월을 경험하고 신의 한수가 탄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