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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항해자, 청어를 따라 이동한 진취적인 소녀들 (초안)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5-04-22 01:23
조회
21

2025.4.21/물과 인류/에세이/손유나

 

항해자, 청어를 따라 이동한 진취적인 소녀들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육지는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끝나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있어서 바다가 막다른 공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통나무, 갈대, 가죽을 이용해 바다 건너고 새로운 육지에 발을 딛으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바다는 단지 지나치는 통로가 아니었다. 바다 위에 배를 띄우고 바람과 물의 흐름을 느끼고, 그에 맞추어 노를 젖거나 돛으로 조종했다. 항해란 바다를 느끼고,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반응하며 이동하는 복합적인 활동이었다.

항해란 단순히 물 위를 가로지르는 물리적 행위 그 이상이다. 헬렌 체르스키는 블루 머신에서 항해자를 환경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장소를 이동하는 존재로 정의한다. 직접 바다를 거넌지는 않았지만, 해안선에서 해안선으로, 항구에서 항구로, 청어를 따라 이동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항해를 인간이 이동하려는 의지를 갖고 자연에 맞추어 대처하고, 물과 관계 맺는 방식의 총체(?)라고 본다면 이 여성들 또한 항해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녀들은 20세기 초 철로와 증기선의 발전으로 청어 무역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봄이 되면 스코틀랜드 섬의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립과 독립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당찬 여성들의 항해에 대해서 살펴보자.

 

 

청어 무역의 성장

북해는 오래 15세기부터 청어잡이의 중심지였다. 청어는 대규모로 무리지어 이동하고, 회유성 어류로서 고정된 서식권이 없고 해류를 따라 회유를 한다. 그래서 청어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북해에 떼를 지어 나타났고, 청어의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면 안정적인 어획이 가능했기 때문에 중세부터 유럽 사람들의 주요 식량이었다.

하지만 청어는 기름기가 많아 만 하루만에 부패하기 때문에 근처 항구에서만 소비되다 14세기 후반 네덜란드에서 기빙(gibbing)’이라는 청어 염장 기술이 개발되면서, 청어가 장거리 무역 상품이 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주요한 교역 상품이 되었다. 특히 19~20세기 초에는 철도와 증기선의 발전으로 물자 수송이 용이해지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청어산업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2. 청어 소녀의 이동

청어 소녀들은 대게 5월 봄철에 세틀랜드, 오크니,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배를 타고 기차를 갈아 타면서 청어의 이동에 맞추어 항구에서 항구로 이동했다.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시작하여 잉글랜드의 동부 항구도시까지 이동하며 각 항구에서 몇 주 혹은 몇 달씩 머물며 작업했다. 스스로도 자신들을 청어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늦가을 늦으면 12월에 여정을 멈췄다.

청어를 따라 이동하는 수천 명의 소녀들은 어리면 13~14세부터 시작하여 성인 여성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소녀 혹은 아가씨라고 불렀다. 어휙량 면에서는 그레이트 야멋, 로스토프트, 그림즈비에, 노스 쉴즈 항구이다. 전성기에 6000명에 달하는 소녀들이 청어 어업에 종사했고, 계절풍에 맞추어 돛을 올리고 항해를 하고 선원들과 다르지 않게 바다에 맞추어 잠시 멈추거나 바람과 해류를 만난다면 항해를 시작하는 뱃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3. 소녀의 감각과기술

항구에서 청어를 가득 실은 선박이 도착하면 여성들은 항구 근처 작업대로 몰려들었다. 청어의 아기미와 내장을 제거하고 염장 처리하는 일이 여성의 몫이었다 .‘손가락을 감아라.’가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는데, 내장을 제거하는 칼에 손이 다치지 않도록 손가락에 클루트(cloots)’라는 천을 둘러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31조가 되어 2사람은 내장을 제거하고, 1사람은 청어의 크기를 분류하여 팔레인(farlane)’이라는 통에 넣었다. 이 통에는 900~1,200마리의 생선이 들어갔다.

작업량에 따라 돈을 받을 수 있기에 소녀들은 매우 빠르게 손을 놀렸다. 분당 30~50마리를 손질하고, 숙련자는 분당 60마리까지 손질했다. 그리고 청어의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통에 담아야 했다. 한 사람이 10시간 교대로 30통을 채울 수 있었다. 속도가 생명이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지 않곡도 손가락 감각만으로 내장을 제거하고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한 여성 노동자의 회고록에는 손에 닿는 청어의 무게와 촉감만으로 오늘의 어획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사회적 교류

소녀들은 조를 이루어 작업하면서 항구를 이동하면서도 같은 조로 활동했다. 그리고 고된 노동 속에서 공동체 의식과 강한 연대감을 가졌다. 작업도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뜨개질을 취미로 했는데 당시 각자 집안을 나타내는 뜨개 패턴을 공유하기도 했다.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는 죽은 어부의 시신이 해안가에 떠내려오면 옷을 보고 신원 확인 할 수 있도록 마을 고유의 혹은 가족끼리 사용하는 특정 무늬를 넣어 뜨개질을 했다고 한다.

소녀들이 항구로 오면 숙박 주인들은 환영했다고 한다. 숙박하는 마을에서와 관계

 

그리고 토요일에는 댄스, 영화, 항해 파티, 토요일,

 

외부 / 관계의 확장.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구에서 선물 사서 돌아갔다. 흔히 셰리, 과일 케이크, 섬의 사치품, 사탕이었다. 루이스 섬의 앨리슨 스텐모어는 총어 소녀 이모들이 집으로 들어와 항구에서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청어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와 사탕을 기억한다.

뱃사람들이 다른 육지의 새로운 문화와 만나 교류하고, 낯선 곳에 자신들의 종교 사원을 짓기도 한것처럼 소녀들도 다른 출신의 소녀들이 만나 교류하고,

어부들과 함께 파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바다와 배라는 남성적인 공간에

 

4. 독립적, 의지

진취성. 독립성. 당시 가사에 한정되던 환경. 빅토리아 말기 여성은 가사 노동에 한계

어촌마을이어도 여성의 역할은 남성이 떠난 빈자리를 메우거나(노동), 그물을 손질, 해초에 대한 것.

부모로부터 독립.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자 함.

한 청어 여성은 인터뷰에서 우린 배는 몰지 않았지만, 바다에서 일하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청어 거래가 줄어들고, 염장 보다는 냉동 기술이 선호되고,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여성들에가 다른 일자리 기회가 주어지면서 청어 소녀들의 여행은 멈추었다.

뱃사람들이 바다의 흐름, 날씨, 물의 깊이, 풍향 등 다양한 자연적 요소를 읽고 이동 경로를 조정해서 나아갔듯이 청어 소녀들도 바다라는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목표에 맞추어 여정을 시작

모험, 수백 수천배 뛰어오른 사치품의 마술, 정복, 엄격함과 거센 손길, 엄함. 북해 뱃사람의 이미지, 문화와 문화가 섞이면서 발생하는 설레임. 바다를 설명하는 많은 이야기는 모험이고 영웅적이고 서사적인 이야기가 따라다니지만 거의 모두는 남성 중심의 이야기이고 여성의 이야기가 뒤에 잊혀졌다. 하지만 경계에서 항해를 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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