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돌(아보기) 코너>에서는 허남린 선생님께서 최근 푸~욱 빠져계시는 임진왜란 연구의 경험, 쟁점, 즐거움 등에 대한 산문을 격월로 게재합니다. 허남린 선생님은 캐나다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아시아학과에서 일본사를 가르치고 계시며, 현재 인문세에서 일본 철학과 조선 연행사 세미나를 이끌어주시고 계십니다. 쓰신 책으로는 『조선시대 속의 일본』,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 『두 조선의 여성:신체·언어·심성』, 『Prayer and Play in Late Tokugawa Japan』, 『Death and Social Order in Tokugawa Japan』이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권력욕과 조선 침략
히데요시의 권력욕과 조선 침략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조선을 침략하던 시절, 일본은 전쟁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에 처음 사무라이 군사 정권이 들어선 것은 1185년이었다. 그 후 군사 정권은 얼굴을 바꾸어 가며 일본을 지배했다. 그렇게 끝날 줄 모르던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린 것은 1945년이었다. 문관이 다스린 조선 그리고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750년 이상 무관이 나라를 다스린 셈이다.
혹자는 1868년 도쿠가와 바쿠후가 멸망하면서 군사 정권이 끝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사무라이의 계급적 법적 신분은 사라졌지만, 실제로 일본을 운영한 주체는 사무라이의 후예 군사 집단이었다. 제국 일본의 주도권은 군부가 쥐고 흔들다가 1945년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은 문의 힘이 지배했지만, 일본은 무의 힘이 전권을 휘둘렀다. 한쪽은 유교 경전을 외우고 익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떵떵거렸지만, 다른 한쪽은 사무라이 가문의 후예들이 대대로 무의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에서는 무는 문의 권위 밑에서 맥을 추지 못했지만, 이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문은 무의 위력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전국이 군벌 집단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던 시절태어나 그 속에서 자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내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출신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출신 가도를 달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집단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막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한 부하의 반란으로 죽게 되자 곧바로 그 반란자를 죽이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 히데요시는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다. 마침내 전국의 다른 군사 집단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나라를 자신의 권위 아래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을 통일했다고 해도 히데요시의 중앙 권력이 전국을 직접 통치하지는 못했다. 그럴만한 권력을 아직은 쌓아 올리지 못했다. 각 지역에는 대대로 강고한 기반을 갖는 군사 세력이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고, 외부의 지나친 간섭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중앙의 히데요시 정권에 머리를 조아리는 정도이지, 간까지 내준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어떤 형태로든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때문에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이란 중앙과 지방의 다수 군사집단들이 수직적으로 연합한 데에 불과했다.
히데요시는 다른 군사 집단을 자신의 권력에 체계적으로 서열에 따라 종속시켜 중앙 정권을 강고히 하고, 이러한 권력 구조를 자신의 후계에게 물려주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 권력은 강한 권력을 추구하고, 강한 권력은 더욱 강한 권력을 지향하게 되어 있었다. 권력에 죽고 권력에 사는 세상이었다. 다른 군사 집단들도 마찬가지로 기회만 있으면 세상을 뒤엎고 자신들의 권력을 넓히고 강화하고자 했다.
어떻게 더욱 권력을 강고히 하여 안정된 중앙 정권을 구축할 것인가? 그렇다고 이미 복속한 다른 군사 집단을 다시금 복속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을 듣겠다는데 다시 죽으라고 때릴 수가 없었다. 히데요시가 생각하기에 무력을 행사할 대상이 국내에는 더 이상 없었다. 사무라이 세상에서 상대의 복속은 무력을 통해 성취되었다. 권력은 폭력을 통해 자라고, 전쟁은 권력의 자양분이었다. 그러한 자양분이 전국 통일로 씨가 말랐다.
히데요시가 눈을 돌린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히데요시와 대립하던 군사 집단이 아니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냥 바다 건너 외국이었다. 그럼에도 히데요시는 조선을 치기로 작정했고, 조선을 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 그에게 있어 전쟁은 그냥 권력 강화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히데요시의 머리는 그렇게 굴러갔다.
조선을 친다는 것은 두가지 점에서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히데요시는 몽상에 빠졌다. 하나는 일본 국내의 다른 군사 집단들의 복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되리라는 점이었다. 조선과의 전쟁에서 이들 군사 집단들을 동원하여 잘 싸우는 놈에게는 상을 주고, 못 싸우는 놈은 벌을 주어, 자신의 권력 구조를 더욱 중앙 집권적으로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을 받는 놈들은 더욱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고, 벌을 받는 놈들은 왕따를 당하다 눈 앞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조선은 아주 쉬운 상대라고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의 마지막 장애였던 관동의 오다와라에 거점을 둔 군사 집단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동원한 군대는 20여만을 헤아렸다. 이에 반해 조선을 치기 위해 동원한 군대는 15만이 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 국내의 한 군사 집단을 복속시키는 것 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셈이었다. 누워서 떡 먹기나 마찬가지이니, 조선을 치는 것은 이에 따르는 위험은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길게 잡아 6개월이면 조선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라 단정했다.
조선 침략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가져올 행운이라 몽상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최소 비용과 최대 효과의 군사 작전은 대량의 군대 투입과 전대미문의 폭력, 그리고 속전속결이었다. 단기간에 조선을 제압하기 위한 거대한 폭력 작전이었다.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친 일본의 군대들은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살육과 방화를 이어 갔다. 상상을 초월한 만행에 조선의 군대와 인민들이 흩어지자 히데요시는 조선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히데요시의 환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깨질 듯 하면서도 깨지지 않는 조선의 끈질긴 저항에 그는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명나라도 군대를 보냈다. 이에 긴장한 히데요시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획책을 구사했지만 모두 허사로 끝나고, 자신의 정권은 궤멸의 길을 걸었다. 더 큰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조선 침략을 자행했지만, 이는 자신의 머리를 망치로 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력 강화의 목표가 권력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여 권력을 얻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큰 목소리로 가르쳐주고 있다. 히데요시가 써먹었던 일본 국내에서의 방법은 조선에서는 씨가 먹히지 않았다. 무력에 쉽게 굴복할 줄 알았던 조선은 문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일견 나약하게 보였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그와는 반대였다. 조선의 땅에서는 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권력욕은 군사 폭력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군사 폭력은 인간 살육과 동의어였다. 군사 폭력으로 밤낮을 지샌 일본에서는 살육이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무력은 군사적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나 작동하는 권력의 원리에 불과했다. 무에는 무의 풍토가 있고, 문에는 문의 풍토가 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권력욕은 조선에서는 패망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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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moonse | 2024.06.21 | 0 | 299 |
수업도 정말 흥미로웠는데, 선생님의 생생한 글은 더 흥미롭습니다. 히데요시의 망상은 전대미문의 폭력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망상=폭력’ “어떻게 이 망상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의 중요함도 새삼 가져가게 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허남린선생님께 임진왜란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배웠네요. 임진왜란 이후에 달항아리가 만들어진 이유, 한일 민중들은 내세를 꿈꾸었는가? 현세에 이상향을 세우려고 했는가?(우리나라의 천도재와 일본 일향일규의 비교), 한일 관계에서 주박역할을 했던 쓰시마에 대한 이야기 등등. 임진왜란 때 한국에 온 사무라이를 비롯한 군병력은 30%이고 나머지 70%는 짐꾼, 마부 등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지고 온 6개월치 식량이 바닥이 나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민중들을 수탈합니다. 전쟁으로 한국과 일본의 민중은 죽어나갑니다. 우리나라 유교의 문인 통치세력들이 민중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등등 허남린 선생님께 늘 새롭게 배우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문의 나라는 약한 것이 아니라 무가 아예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특히 폭력으로 권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의 결말을 임진왜란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는 듯 합니다. 내일 일본행을 앞두고 임진왜란에 대해 배우니 마음이 한결 무장 되는 듯 합니다
침략을 당하는 입장에서만 바라보았는데 일본은 내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외부를 치는 전략이었군요. 가치가 다른 조선에는 무의 가치가 통하지 않았다니 학문에 힘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