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 항해자,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다시 태어나다
해양 인류학 / 에세이 / 2025.5.13 / 손유나
항해자,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다시 태어나다
오래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은 베링 육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일부 수렵채집민이 시베리아 대륙을 지나 알래스카로 이주하였고, 이들이 북미 원주민 이누이트족의 조상이 된다.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베링 육교는 물에 잠기고, 오늘날 베링해협이라고 부르는 약 85km 폭의 바다가 두 대륙을 단절시켰다. 이때부터 분리된 대륙은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바다는 육지와 육지를 가르는 자연적 경계이고, 때로는 인종과 국가, 언어와 종교를 분리하는 문화적 경계이다.
그러나 바다가 만들어 낸 경계는 확고하게 고정된 선은 아니다. 바다는 늘 출렁인다. 파도가 밀려오고 물러나는 연속된 움직임 속에서 경계는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항해자는 흔들리는 물결을 타고 경계를 넘어갔다. 어떤 이는 기꺼이 경계를 넘었고, 어떤 이는 강제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넘은 이는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바다를 매개로 한 경계 넘기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바다를 항해함으로써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다르게 인식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사례를 살펴보고 싶다.
자연의 경계를 넘다
2015년 ‘유럽 난민 사태’가 연일 국제 뉴스로 보도되었다. 당시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종교 갈등, 빈곤을 피해 유럽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 그들에게 지중해는 물리적으로 자신들을 가로막은 경계이자 동시에 국경과 국적이 허물어지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낡은 고무보트를 타고 항해하다 전복되거나 심지어 직접 보트에 구멍을 뚫어 침몰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국제 해양법상 어떤 선박이든 침몰한 사람들을 구조하여 가장 가까운 안전한 항구에 하선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구조만 된다면 이들은 난민이란 신분으로 유럽에 입국하여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었다. 그들에게 바다는 기존의 정체성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규정될 기회의 통로였다. 이 항해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항해함으로써 새로운 신분을 얻고자 함은 오늘날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도 마젤란, 세계지도에 최초로 태평양을 그려 넣은 제임스 쿡 등 잘 알려진 항해자들도 또한 항해를 이전의 삶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겼다. 이들은 귀족 가문의 장남이 아닌, 물려받을 유산이 없는 차남 이하의 남성이거나, 부유하지 못한 중간 계급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육지에서 작동하는 기존 질서 안에서는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새로운 육지에 도달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얻어 존재의 조건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모든 항해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강제로 바다를 건넌 이들도 있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지속된 대서양 노예무역이 비자발적 항해의 대표적인 사례다. 공동체의 일원이자 자유인이었던 서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강제로 대서양을 건너 모든 권리가 박탈된 노예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억압받는 자이자 저항하는 자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아프리카의 리듬과 유럽의 화성 이론이 결합하여 탄생한 블루스나 저항 정신을 표현을 레게 음악이 그 유산 중 하나이다.
사회 인식의 세계를 확장하다
헬렌 체르스키는 『블루 머신』에서 바다를 푸른 기계로 정의하고 “푸른 기계와 계절이 거대한 패턴으로 춤을 구사하면 수많은 생물종은 그에 맞춰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회전한다.”(374)라고 말했다. 인간도 자연에 속한 자로서 바다가 작동하는 방식을 따라 구조화가 되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견고한 기존 사회 질서도 흔들린다. 이 틈새에서 바다와 리듬을 맞춰 활동하면서, 사회에서 강요하던 성 고정관념을 넘어선 여성들이 있었다. 19~20세기 청어 산업에 종사하던 스코틀랜드의 여성들로, 청어 소녀(herring girls)라고 불렸다.
청어 소녀들에게 기회를 열어준 것은 청어의 이동이었다. 청어는 고정된 서식지가 없는 회유성 어종으로 일정한 시기에 북해에 등장했다. 대규모로 무리 지어 다니기 때문에 어획량이 풍부하여 오래전부터 북유럽에서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그러나 청어는 지방 함량이 높아 빠르게 부패하여 신속하게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이는 가공 과정이 필수였다. 19세기 증기선과 철도의 발달로 청어 절임이 유럽 전역에서 소비되면서 수요가 폭발하자 스코틀랜드의 수천 명의 여성들이 청어 가공 노동자가 되었다.
계절풍에 맞추어 항해하는 선원처럼 청어 소녀들도 청어 떼의 계절적 이동을 따라 해안선에서 해안선으로 이동했다. 매년 5월 스코틀랜드의 북주의 셰틀랜드, 오크니,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출발하여 잉글랜드의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여 11~12월에 그레이트 야머스, 로스토프트에서 여정을 끝냈다. 항구에서 어선이 청어를 잔뜩 싣고 들어오면, 여성들은 3인 1조가 되어 작업했다. 날카로운 칼로 청어의 아가미와 내장을 제거하고, 무게에 따라 분류하여 나무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1분에 5~60마리를 손질하는 숙련된 기술자들이었다. 피와 내장, 썩은 생선 냄새를 몸에 잔뜩 묻혔고, 날씨가 궂은 날에도 예외 없이 야외에서 작업했다. 이따금씩 남자 선원과 시끄럽게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이 여성들은 남성들의 일을 돕는 잡역부가 아니라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들로서, 남성 선원과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때로는 파업에 동참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당당하고 진취적인 모습이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당시는 빅토리아 시대 절정기로, 여성은 단정한 차림새로 가정에 머무는 존재였다. 노동계급의 여성이라 할지라도 하녀, 세탁부, 바느질 정도가 여성의 몫이었다. 가정을 떠나 여행을 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은 기이한 존재였다. 그래서 청어 소녀들은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청어 소녀들은 연령대가 다양했다. 어리면 13세에서 나이 많은 성인 여성들까지 있었으나 모두 청어 소녀 혹은 청어 아가씨라고 불렸다. 나이와 상관없이 불린 이 호칭에는 비정상적인 무리로 규정 짓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어 소녀들은 기꺼이 사회에서 강요하는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넘어섰다. 가정을 떠나 홀로 자립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부모나 남성의 허락 없이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자신들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졌고, 동료들끼리 깊은 연대감을 형성했다. 휴일에는 뜨개질인 사교 활동을 하며 즐겼다. 사회에서 이 소녀들을 비정상이라고 비난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은 청어 소녀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청어 소녀들은 바다가 열어준 틈새를 항해함으로써 사회적 구속을 넘어 독립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했다.
문화 정체성을 회복하다
폴리네시아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폴리네시아인에게 바다는 조상이 떠난 길이자 신성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고, 카누를 타고 항해하며 자연을 느끼고 이해하고, 다른 섬과 소통했다.
하지만 18세기 유럽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폴리네시아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었다. 섬이 분할되어 각각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 통치 하에 놓이면서, 자연과 공동체를 연결해주던 연속성의 공간이었던 바다가 각국의 배타적인 해역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자연과 다른 섬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항해와 함께 신화와 의례 전통 항해법도 사라지고, 서구와 비교하여 열등하다는 왜곡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변화는 1960~70년 사이에 식민지에서 독립하면서 전통문화를 다르게 인식하고 부흥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일어났다. 『바다 인류』에서는 태평양의 재개념화를 거론하는 에펠리하우오파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태평양 세계의 주민들은 작은 세상에 갇혀 사는 게 아니라 서로 왕래하고 교역하는 대양 공동체”이며“광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들(islands in a far sea)이 아니라 섬들로 구성된 바다(a sea of islands)”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노력의 상징적인 결실이 바로 ‘호쿨레아 호’의 항해이다. ‘기쁨의 별’이라는 뜻을 가진 호쿨레아 호는 별의 위치나 바다와 바람의 움직임, 새의 이동과 주변 섬을 관찰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항해했다. 하와이섬에서 출발하여 타히티섬까지 항해하면서 식민지를 겪으며 왜소해진 전통문화와 정신을 고취 시켰다.
첫 항해가 성공적으로 끝난 호에도 호쿨레아 호는 일주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2023년 4년간의 일정으로 태평양 일주 여행을 떠났는데, 이 항해를 ‘우마나누이아케아’라고 명명하고, 36개국 345개 항구를 방문하여 최소 150개의 원주민 영토를 방문하는 계획이다. 호쿨레아 호는 단지 전통 항해 지식과 기술을 되살리겠다는 목적 이상으로 식민 통치를 겪으면서 제국주의 세력으로 인해 끊어진 네트워크를 다시 연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 호쿨레아 호는 대양 공동체를 회복하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본다. 물은 경계이다. 하지만 해안선은 파도에 따라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꾼다. 바다가 대륙과 대륙을 단절했지만, 항해자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바다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국적과 신분, 삶의 조건이 바뀌고 재구성되었다. 더욱이 바다의 리듬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사회적 통념이 흔들리고, 항해를 통해 관계를 잇고 정체성을 다시 확립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며 새로운 삶을 꿈꾼다. 바다는 여전히 흔들리며, 새롭게 태어날 가능성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