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수정) 낯섦을 친밀함으로
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수정), 250602, 보나
낯섦을 친밀함으로
바다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전지구적으로 촘촘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시간적·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바로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관심사가 아니면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인식의 지평과 관계하며, 관점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과 성격을 규정한다.
나에게 넓은 바다는 잠시나마 답답한 가슴을 뚫리게 하는 휴식처이기도 하지만 염분이 피부에 남는 감각이 불편하고, 깊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해양 인류학을 통해 바다 이야기에 입문하게 되었지만, 바다는 분명 정신적으로 거리가 먼 낯선 공간이다. 바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변화할 수 있을까?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바다와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바다를 삶의 풍경으로 인식하며 살아왔던 뱃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인류의 대항해』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이었다. 덴마크 화가 미샤엘 앙셰르의 <보트 옆의 두 어부>는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가르는 카테가트 해와 북해가 만나는 항구인 스카겐에서 폭풍이 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어부들을 그린 작품이다. 거센 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뱃사람들의 모습과 얼굴, 시선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태도와 방식을 짐작하게 했다. 거친 풍파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뱃사람들의 강단 있는 모습은 나에게도 바다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고대 사회는 어떻게 바다에 관한 이해를 발전시키고 관계를 맺어왔을까? 바다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았다고 하는 항해자들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자.
바다와 인류의 관계 변화
브라이언 페이건에 의하면 바다와 인류의 관계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변화해왔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돛과 노를 이용한 항해의 기본 기술을 활용해 연안을 항해하면서 조심스럽게 대양으로 나아갔다. 고대의 항해자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전승된 지식과 기술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바다를 파악하며 특색 없는 풍경을 친숙한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이들은 바다를 면밀하게 주시하며 눈에 띄지 않던 지형지물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표지판으로 삼아 따라가는 방식으로 항해하며 점차 먼 바다로 항해 영역을 확장했다. 이러한 친밀감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은 여전히 바다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바다는 친밀하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힘이 존재하는 초자연적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의 기독교 교리로 이어져 바다는 혜택의 원천이자 잠재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무질서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불안은 18세기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바다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 이제 해변은 우리가 휴가를 가는 휴양지이자 바다와 존재에 대해 관조적인 태도로 명상하는 곳으로 변했다. 과학의 발달은 항해술과 교역에 자본이 결합한 산업화와 함께 인간에게 우주 만물의 작동을 거의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바다와의 정신적 친밀감을 잃게 했다. 컴퓨터, GPS의 사용으로 바람과 날씨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정확한 시간에 맞춰 출발지와 목적지를 오가게 하거나 배가 어디에 있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인류는 바다와 비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에타크(etak)
폴리네시아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노련한 항로 안내인 밑에서 도제살이를 하며 항해 기술을 익힌다. 이들은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항해에 참가하면서 별의 궤도와 너울의 패턴, 새에 대한 실용적 지식과 신화, 종교적 지식을 배우고 암송하는 구술 훈련을 받는다. 이들은 특히 망망대해에서 방향 감각과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별자리를 이용한 위성항법과 ‘에타크’라는 거리 표시 체계로 항해한다. 북극성, 남십자성의 다섯 가지 위치, 13개의 별자리를 바탕으로 한 ‘항성 나침반’을 통해 목적지 섬의 천정을 통과하는 별의 위도를 따라 방향을 잡고, 카누가 아니라 섬이 움직인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항해를 이어갔다.
에타크는 카누가 정지해 있다는 허상의 관념을 이용한 거리 표시 체계로, 미크로네시아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머릿속으로 카누와 별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고 섬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마음속 이미지를 기준으로 이동 거리를 판단했다. 에타크는 고정된 목적지를 기준 삼아 거리를 측정하고 목적지만을 향해 질주하는 지금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흔들리는 바다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마음속 지도를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는 뱃사람들의 거리 조절 방식으로, 변화무쌍한 자연의 초자연적 힘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거나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며 지배하려는 폭력적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축적된 경험과 전승된 지식, 노와 돛을 이용해 수천 킬로에 달하는 먼바다까지 이동한 이러한 인류의 용기와 탁월함은 관조적인 태도로 대상을 바라보거나 관심사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반응하는 우리네 방식과는 다르게 친밀함이 결부되어 있다. 육지와 바다의 구분이 따로 없을 만큼 주변 바다에 대한 막힘없는 지식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흐리게 했지만, 바다를 끊임없는 배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의 자세는 다시 인간의 활동성을 추동했다. 이것이 우리가 바다와의 관계 맺음에서 지식의 탐구와 기술 습득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친밀감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삶의 풍경이 되다
페이건은 연안 항해를 통해 많은 경험과 고도의 익숙함, 판단력을 익혔음에도 수평선 너머로 배를 모는 것은 거대한 정신적 도약이라고 말한다. 망망대해를 항해하기로 결심하려면 깊은 호기심뿐만 아니라 강력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동기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강력한 종교적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것은 브라이언 페이건이 먼바다 항해가 연안 항해보다 훨씬 쉽다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노나 돛을 이용한 항해에서는 연안이 먼바다에 비해 오히려 수많은 숨겨진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숙한 지형지물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다. 고대 항해자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던 고대 항해자들은 먼바다에도 반짝이는 별과 태양과 같이 항해를 위한 자연의 표지판이 풍성하다는 점을 알았다. 그들에게 천체의 운동이나 바람과 해류의 변화, 육지를 향해 날아가는 새 떼는 모두 먼바다 항해의 표지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항해자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승된 문화적 기억과 점진적 침투를 통해 바다에 대한 이해를 터득하면서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그들은 바다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가 바다가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 바다의 분위기와 거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들을 배웠다. 뱃사람들은 이러한 배움을 통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대양의 자그마한 일부를 알아차리고, 온갖 종류의 날씨에서 돛과 노로 배를 조종하는 법, 커다란 파도를 피해 안전한 상륙지를 찾는 법을 알았다. 고대 항해자들은 바람과 조류, 바다 위에 솟은 바위와 지형지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바다의 분위기를 파악할 정도로 바다를 속속들이 알았지만, 바다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찰의 대상이자 삶의 동반자로 생각했다. 바다가 존재의 일부이자 삶의 풍경인 고대 항해자들은 바다에 대한 친밀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가지며, 지형지물로 바다 풍경을 정의하는 지도 제작자이자 항해사로서 바다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