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 바다와 친밀해지기
바다와 친밀해지기
태양빛에 비쳐 반짝이는 윤슬,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바다의 낭만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겉모습일 뿐, 바다 속은 암흑과도 같다.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빛은 점점 사라지고 바깥의 소리는 차단돼 칠흑 같고 적막한 심해는 수면 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아무리 숙련된 사람이라도 10분 이상 머물 수 없는, 그래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는 바다는 아직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무인 탐사가 가능해지며 심해까지 내려가 그곳의 지질과 환경, 생명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많은 곳들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뭐가 있을지 알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기이한 생명체들로 가득한 심해는 언제라도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죽음의 공간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바다 앞에 서면 저 깊은 곳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고, 수많은 시간 동안 저 시커먼 바다가 집어삼킨 생명들 생각에 나는 섬뜩함이 밀려온다. 바다에 푹 빠져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신비한 해양생물들을 보여주며 바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이런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올라온다. 해양 인류학에서 바다를 공부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블루 머신』(헬렌 체르스키 지음, 김주희 옮김, 남성현 감수, 쌤앤파커스)과 『인류의 대항해』(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바다 인류』(주경철 지음, 휴머니스트)는 모두 인류의 삶이 바다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헬렌 체르스키는 인간이 바다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고, 브라이언 페이건은 최초의 항해 이전부터 인류에게 바다는 삶의 풍경이었다고 했다. 주경철 선생님은 인류사가 바다를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했다. 인간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고, 그들에게 바다는 너무도 친밀해 보였다. 나의 근간이기도 한 바다를 두려워하고 꺼림직해 한다니, 그래선 안 될 일이지 싶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이질적인 공간으로만 느껴지는 바다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친밀하게 느낄 수 있을까?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그 심연을 알 수 없다는 미지(未知), 지상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감각, 예측 불가능에서 오는 혼돈에서 기인한다. 바다를 삶의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그곳과 어떻게 관계 맺어 왔는지, 깊고 끝없는 바다가 어떤 곳인지를 배우고 알게 되면, 바다와 좀 가까워지지 않을까. 바다의 한 부분으로 오랜 시간을 지내온 인류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 극복해보려고 한다.
바다 풍경을 읽는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대형 크루즈를 타고 여행을 가는 이들을 보았다. 도시 하나가 떠다닌다고 할 정도로 배 안에는 수영장부터 쇼핑몰, 도서관까지 정말이지 없는 게 없었다. 허리케인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도 끄떡없이 항해할 수 있다고 한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인간은 망망대해 위에서도 이렇게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바다 위에 떠다니며 땅 위에서 즐기던 것을 그대로 즐기는 크루즈 위의 나를 상상해본다. 바다 속에 뭐가 있는지, 바다가 언제 나를 덮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바다를 항해하며 우리는 바다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처음 바다를 나간 사람들은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이 없었을 초기에 인류는 어떻게 바다를 항해했을까? 브라이언 페이건은 최초의 항해는 바다의 언어를 읽고 해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강의 어귀나 연안에서 뗏목이나 나무를 파내어 만든 배로 시작했을 최초의 항해는 그곳의 풍경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 걸음은 해안을 끼고 한 지형지물에서 다른 지형지물로 배를 이동시키거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지형지물을 향해 배를 몰아간다. 그렇게 시작된 항해는 조금씩 반경을 확장해간다. 시야에 들어온 연안을 해독하고 그만큼 배가 나아가고, 또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를 해독하고 나아가고를 반복하며, 인간은 바다의 풍경을 전부 해독해가고 원양 항해까지 나가게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을 항상 바다에 두는 것이다. “눈 똑바로 뜨고 끊임없이 배워라” 브라이언 페이건이 십대 시절 고기잡이배를 탔을 때 배운 교훈도 그것이었다. 바다 밑바닥의 색깔의 변화를 통해 수심을 짐작해내고,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며 육지가 있는 곳을 예측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배의 위치와 항로를 알아냈다.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 너울의 방향과 모양, 새가 나아가는 방향, 밤하늘의 별, 바람의 감각 등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든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했고, 그 지식들을 입으로 전하고 몸으로 익혔다. 모든 감각을 바다를 향해 열고 바다 풍경이 말하는 것을 끊임없이 읽으려는 태도는 그들이 얼마나 바다와 친밀하게 관계 맺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바다 시스템을 배운다
바다가 뜨거워지고 있고, 이로 인해 바다의 균형이 깨지고 그곳에 사는 해양생물들도 살 곳을 잃어간다. 너도나도 지구를, 바다를 보호해야 한다고 외치고 실천해보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여기에 헬렌 체르스키는 바다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바다와의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출발이라고 말한다. 해양 물리학자인 그녀는 바다의 구조, 구성요소, 작동원리와 각 요소들이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음을 설명한다. 바다는 태양에너지를 지구의 열에너지와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엔진이다. 이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지구의 에너지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생태계가 파괴되고, 그 안에 사는 생물들도 타격을 입고 만다. 인간도 그중 일부로 바다엔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생명체다.
그녀는 해양 물리학자로서 바다를 이해하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아우트리거 카누 세계에 발을 들이며 배우게 된 하와이인들의 바다를 대하는 관점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설명한다. 그들과 함께 카누를 항해하고 그 의식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면서 바다를 존중하고 그 앞에서 겸손해하는 태도를 배웠다. 태양이 수평선에 처음 닿는 순간을 기다려 선원들은 손을 맞잡고 둥글게 서서 함께 기념하는 노래를 부르고, 바다에 들어가며 ‘알로하’라고 인사했다. 카누에 몸을 싣고 선원들과 함께 교대로 노를 저으며 직접 태평양 바다를 항해한 경험은 태양과 바다, 하와이인들에게 배 이상의 의미인 카누, 노를 젓는 선원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되었다. 바다엔진의 유기적인 얽힘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배웠다.
바다와 친밀해지기
세미나의 초반까지도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을 없애고 바다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그런데, 수업을 거듭하며 바다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바다와 관계 맺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서, 두려움이야말로 바다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 사람들은 바다를 살아 있는 존재로 여기고 노하지 않도록 공경하고 예(禮)를 취했다. 바다를 두려움 없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지금의 내 강박적 태도에는 바다를 내가 원하는 대로 누리고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바다를 인격적으로 대했던 사람들과 그들과 달리, 나는 바다를 비인격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빙하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바다와 인류의 관계는 변화해왔다. 19세기 이후 바다를 더 잘 알고 이용하면서 인간은 바다에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바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바다에 대한 자유와 낭만의 이미지가 새롭게 생겨났다. 세 책이 모두 바다를 친밀하게 느낀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제야 그 친밀함 앞의 겸손과 두려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례함과 친밀함을 혼동하고 있었다. 바다에 직접 뛰어들어 바다를 경험하고 배우는 그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바다와 가까워지기 위해 두려움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두려움은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바다와의 연결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