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 바다 인류와 배(boat)

작성자
기헌
작성일
2025-06-02 23:00
조회
24

 

인류는 오랫동안 바다의 영향 아래 살아왔고, 끊임없이 바다로 배를 띄웠다. 인류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는 바다에서의 삶을 통해 어업, 상업, 교역, 전쟁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바다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여정은 늘 배와 함께 시대를 통과했기 때문에 배를 관찰하는 일은, 그들이 긴 역사 속에서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았는지, 그 풍경을 떠올리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해양 인류학을 공부할수록 사람들이 처한 환경 조건이나 필요에 맞추어 배를 만들어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배의 형태가 달라지고 진화한다는 사실에 흥미로웠다.

최초의 배가 등장하기 전, 처음 바다에 들어간 인류는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며 떠다니는 것에 의지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사람들은 물 위로 떠다니는 통나무를 붙잡고 이동했다. 이란에서는 동물 가죽을 풍선처럼 만들어 끌어안고 강을 건넌 기록도 발견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물에 뜨는 것 말고도, 몸이 물에 젖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초의 배, 뗏목을 만들게 되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상류지역은 바위투성이에 유속이 빨라 뗏목이 부서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고려해 동물의 가죽 주머니를 뗏목 아래에 붙여 배를 수면 위로 뜨게 고안했다. 이집트 뗏목은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노를 만들었고, 무척 큰 종려나무 이파리를 뗏목에 꽂아 최초의 돛을 세웠다. 인류의 요구에 따라 서서히 배의 재료나 형태가 달라지고, 배에 사용되는 도구들도 등장하면서 배는 점점 더 커지고 정교해지는 듯했다.

나는 변화가 거듭된 배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을 의 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집트 나일강에서 처음 돛을 사용한 배를 기원전 약 3000년으로 추정하고 있고, 1890년대 클리퍼를 범선의 쇠퇴로 본다면, 인류 항해의 역사에서 약 500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한 돛이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바람을 이용하면서 더 쉽고 빠르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배의 형태는 어느날 갑자기, 단번에 바뀐 것이 아니다. 고대 지중해 갤리선의 노예들이 힘들게 저었던 노를 버리고 바로 돛을 단 것이 아니고,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에서 바로 증기선으로 갈아탄 것도 아니다. 인류는 마주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를 시도하며 배의 형태를 바꾸어 왔다. 천천히 그 변화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초기의 항해

지구상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양 사회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인류의 대항해에서 브라이언 페이건은 약 9000년 전 알류산 열도를 따라 항해한 이들을 첫 주자로 꼽는다. 알래스카 남부에서 캄차카반도 방향으로 뻗은 이 열도는 북극에 가까운 험준한 지형으로, 얼핏 보기에 생존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해류 덕분에 이곳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며, 바다사자, 고래, 대구, 넙치 등 풍부한 해양 생물 자원을 품고 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인류는 이곳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다. 알류산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다사자 가죽과 해안에 떠밀려온 유목을 주워 바이다르카(baidarka or Aleutian kayak)라는 가죽배를 만들었다. 유연성을 갖춘 바이다르카는 부빙 충격에도 견딜 수 있었다. 에스키모들이 사용한 우미악(umiak)도 가죽을 재료로 한다. 바이다르카가 사냥용이라면, 평평한 바닥을 가진 우미악은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한 운송용 배였다.

신석기시대 북아메리카 서쪽 해안에는 선형적인 해양 세계를 이루었다. 이곳은 기원전 6000년 삼나무, 미송, 미국솔송나무, 가문비나무가 띠를 이루며 수 킬로미터 이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통나무 카누를 만들기에 적합한 결이 곧은 목재들이 풍부했다. 기원전 5000년을 지나며 해안을 따라 형성된 크고 작은 공동체는 시장을 형성했고, 연안은 점점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어 세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리가 되었고, 친구를 만나고 원수들은 싸우고 결혼과 같은 사회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공장소로 변모했다. 그들이 사용했던 통나무배는 불에 달군 돌덩어리로 통나무 속을 깎고, 수분을 공급하여 부드럽게 만들고, 돔발상어 기름으로 마무리한 후 정교한 장식으로 치장했다. 장식은 곧 물과 관련된 전설적 인물이나 정령을 의미했다. 늘 보이지 않는 영()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항해에서 끊임없이 신과 자연의 언어를 읽고 해독하는 일은 항해자들의 일상이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나무 대신 갈대가 주로 사용되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은 바람과 물결이 모두 한쪽 방향으로 흘러, 배를 타고 하류로는 쉽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상류로 올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곳에서는 갈대를 엮어 만든 가볍고 작은 배나 뗏목이 사용되었고, 쿠파(quffa)라 불리는 둥근 바구니 모양의 배도 등장했다.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 하류에 도착하면 배를 해체한 후 그곳에서 재료를 팔았다. 하류에서 할 일을 마치면 배를 타고 함께 내려갔던 나귀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이 배는 기원전 3000년부터 20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초기 항해자들에게 배를 타는 일은 순순하게 자연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어떤 위험이 일어날지 모를 대자연 앞에서 항상 조심하고 면밀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일이 최선이었다. 그들은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감지하고, 공기의 냄새와 바다의 온도, 구름의 생김, 날아가는 새를 보면서 바다를 읽어냈다.

 

돛의 출현

아직 돛은 출현하기 전이었지만, 바람을 이용해 강 상류로 오르던 배가 있었다. 나일강은 메소포타미아처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기는 하지만 물의 흐름과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을 내려갈 때는 물의 흐름에, 강을 오를 때는 바람의 흐름에 배를 맡겼다. 이집트 뗏목은 주변을 연결하는 편리한 나일강 덕분에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변신해갔다. 곧 사람들은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노를 만들었고, 배 끝에 키 구실을 하는 노들을 장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항해 장치인 이 탄생했다. 최초 이집트 돛의 형태는 종려나무 이파리를 세운 것으로 시작되었고, 기원전 3500년에는 갈대나 아마포를 엮은 네모난 가로돛이 만들어졌다. 이제 그들은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 바람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1500년경, 하트셉수트의 사원이 있는 데이르 엘바흐리의 부조 펀트로 가는 항해에서는 이집트 선박의 항해 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은 두 개의 돛대와 넓게 펼쳐진 돛을 단 배에 사람들이 순풍에 노를 젓고 나무, 향료, 동물, 금속 등 귀중한 물건을 가득 싣고 푼트로 항해한다. 그들은 단순한 교역을 넘어 당시 기세등등한 왕권의 상징성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항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에서 발전한 항해 기술은 지중해로 퍼져나가며 페니키아인의 해상 무역 제국 형성에 기여했고, 이후 그리스 문명을 거쳐 기원전 700년경 이집트식 갤리선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지중해에서의 무역로나 해상 패권 경쟁에서, 돛과 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갤리선은 매우 유용한 선박이었다. 이 선박의 특징은 적의 측면을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충각(衝角)이었으며, 충각에는 날카로운 두 눈이 그려져 있어 적에게는 위협을, 아군에게는 승리를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갤리선은 점점 대형화되어,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맞붙은 레판토 해전에서는 수백 명의 병력과 노꾼이 탑승한 거대한 전함으로 발전했다. 이때는 다수의 마스트와 삼각돛까지 갖추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 칼을 든 전사들과 그 아래 노를 젓느라고 총력을 다하는 노꾼들이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다. 기술의 발전은 더욱 공격적이고 웅장하게 배의 모습을 바꾸었다. 예전보다 바람과 파도를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고도 목적을 이루는데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류의 어떤 목적들이 배를 움직이게 했는지 더 알아보자.

짙어진 목적

8세기 북해와 발트해에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 바이킹이 있었다. 침략, 폭력만 떠오르는 바이킹에 대해 나는 조금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초기 바이킹의 모습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바이킹 시대에 그들은 타국과 교류하고 힘을 키워나가기 위해 배를 몰았다. 노르웨이의 곡스타드에서 건져 올린 배로 바이킹이 삶을 그려볼 수 있다. 길이 23.80미터, 5.1미터 크기에 110제곱미터의 돛을 달고 32명이 노를 젓는 이 배는 전투, 교역, 사람과 상품 이송에 두루 사용했다. 배의 구조상 폭이 넓고, 바닥이 평평하고, 선체가 안정적이어서 북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을 만큼 원거리 탐험과 교역이 가능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곡스타드에서 발견된 이 배는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유골과 함께 발견되었다. 그들에게 배가 단순히 운송용 수단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지점이다. 평생 배 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함께 묻히는 배는 현실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저승 항해를 위한 함선이 아니었을까.

바이킹의 폭풍이 가라앉은 후 북유럽 지역은 어업과 해상 교역이 순조롭게 발달했다. 12세기 이전부터 북부 독일 도시 상인들이 북해의 오래된 해상 교역로들을 활성화시키며 한자 동맹(Hansa, Hanseatic League)이라는 상호 협력 상인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한자 동맹은 동유럽과 서유럽 간 교역을 중개하며 러시아의 모피, 발트 지역의 호박, 스웨덴의 구리 같은 고가품에다가 밀과 호밀 등의 곡물, 맥주 임산물 등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대신 작물과 소금 등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특기할 상품은 청어로 늦여름에 알을 낳으러 북해와 발트해로 몰려오는 청어는 수가 엄청나고 크기도 컸다. 청어잡이는 가을 한 철에 이루어지므로 이 시기에 모자라는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다. 14세기에는 한 철에 약 4만 명이 몰려와서 청어 시즌에는 도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바다 인류에서는 한자 도시들의 성공 요인 중 하나를 우수한 선박으로 꼽는다. 발트해에서 사용된 코그선은 그 지역의 얕은 바다에 최적화한 선박으로, 바닥이 평평하고 적재량이 큰 우수한 선박이다.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와 같은 중앙타가 발명되어 또 한 번, 선박 조종에 혁신적인 개선을 했다. 다른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에 따르면 한자 동맹에서 스칸디나비아 어부가 잡은 청어는 독일 상인이 판매했는데 만약 속임수를 쓰면 파산을 당할 정도로 양질의 관리가 철저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동맹의 규약과 이익을 공유하되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상거래를 주도했다. 계량이나 통화 등을 표준화해서 거래 비용을 절감시키고 분쟁 발생을 최소화하였다. 그러나 청어 떼가 다른 바다로 이동하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식민지 교역로를 열면서 유럽 교역의 흐름이 바뀌며 한자 동맹은 쇠퇴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첫 항해는 대항해시대의 상징적 사건이다. 그는 종교적 신념과 근거 없는 낙관, 그리고 신분 상승의 꿈을 품고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대규모 탐험은 국가 차원의 후원이 필수였고, 에스파냐의 지원을 겨우 얻어 출항했다. 콜럼버스의 원정대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남겼지만, 과도한 폭력과 원주민 학살, 노예 무역의 토대를 닦는 부작용도 함께 가져왔다. 콜럼버스 함대는 처음 5척의 함대로 출발했으나 한 척은 버림받고, 또 한 척은 침몰하여 결국 니냐’, ‘핀타’, ‘산타 마리아세 척만 남았다. 긴 항해 동안 식량 부족과 피로, 그리고 지휘권 갈등으로 선원들 사이에 긴장과 불신이 감돌았다.

한편,바다 인류에 등장하는 중국의 15세기 정화 원정대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다. 명나라 환관 정화는 군사적 위업을 쌓고 오늘날 장관격인 태감(太監)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겨울 몬순 계절풍을 타고 남해를 돌아 말라카해협, 뱅골만, 스리랑카, 인도, 페르시아만까지 항해하고 여름 몬순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원정대는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해상 사업단이었다. 200척의 선박에 27,000명의 선원이 동원되었고, 적재량도 엄청났는데 실린 품목은 도자기, 비단, 금속 공예품, , 약재, 동물, 무기, 갑옷, 곡물, , 술 등이었다. 정화는 목적지에 닿으면 황제의 조서를 낭독하고 조공을 요구하면서 준비한 선물을 준 다음 명나라에 복속하기를 요청했다. 정화의 원정대는 배가 국가 권력과 위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진화와 상실

배는 인류의 다양한 삶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그 형태와 기능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물 위를 떠다니는 수단에 불과했던 배는, 사람들의 필요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는 더욱 정교해지고, 웅장한 위용까지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단지 발전이나 향상이라는 말로 담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배가 점점 더 효율적이고 거대하며 복잡해지는 그 이면에는, 인간이 자연과 멀어지는 또 다른 변화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돛이 발명되기 이전의 항해자들은 바다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람의 미묘한 흐름을 온몸으로 감지하고, 파도의 결을 읽으며 자연과 섬세하게 교감해야 했다. 하지만 돛이 등장한 이후, 인간은 바람을 섬세하게 느끼는 존재에서 바람을 조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는존재로 변해갔다. 나는 배의 형태와 구조가 점점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며 놀라워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는 인간이 점점 자연에 무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교함과 웅장함 이면에 감춰진 교감의 상실이 진화의 다른 모습처럼 느껴졌다. 산업혁명의 상징적 사건으로 꼽히는 1780년대 증기선의 등장은, 목적과 필요에 집중한 인류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니었을까.

 

참고 자료와 사이트

바다 인류(주경철, 휴머니스트출판그룹)

인류의 대항해(브라이언 페이건, 미지북스)

고대의 배와 항해 이야기(라이오넬 카슨, 가람기획)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