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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 바다, 가능성이 발아하는 곳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5-06-03 07:31
조회
16

해양 인류학 / 에세이 / 2025.6.3 / 손유나

 

바다, 가능성이 발아하는 곳

오래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은 베링 육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일부 수렵채집민이 시베리아 대륙을 지나 알래스카로 이주하였고, 이들이 북미 원주민 이누이트족의 조상이 된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베링 육교는 물에 잠기고, 오늘날 베링해협이라고 부르는 약 85km 폭의 바다가 두 대륙을 단절시켰다. 이때부터 분리된 두 대륙은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바다는 육지와 육지를 가르는 자연적 경계이고, 때로는 인종과 국가, 언어와 종교를 분리하는 문화적 경계이다.

그러나 바다가 만들어 낸 경계는 확고하게 고정된 선은 아니다. 바다는 늘 출렁인다. 파도가 밀려오고 물러나는 연속된 움직임 속에서 경계는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항해자는 흔들리는 물결을 타고 경계를 넘어갔다. 어떤 이는 기꺼이 경계를 넘었고, 어떤 이는 강제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넘은 이는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바다를 통한 경계 넘기는 언제나 새로운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바다를 건넘으로써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다르게 인식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항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바다가 경계인 동시에 재탄생의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살펴보고 싶다.

 

신분과 지위가 변하는 통로

2015유럽 난민 사태가 연일 국제 뉴스로 보도되었다. 당시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종교 갈등, 빈곤을 피해 유럽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 그들에게 지중해는 물리적으로 자신들을 가로막은 자연 경계이자 동시에 국경과 국적이 허물어지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낡은 고무보트를 타고 항해하다 전복되거나 심지어 직접 보트에 구멍을 뚫어 침몰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국제 해양법상 어떤 선박이든 침몰한 사람들을 구조하여 가장 가까운 안전한 항구에 하선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구조만 된다면 이들은 난민이란 신분으로 유럽에 입국하여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었다. 그들에게 바다는 기존의 정체성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규정될 기회의 통로였다. 이 항해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항해함으로써 새로운 신분을 얻고자 함은 오늘날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태평양을 그려 넣은 제임스 쿡 등 잘 알려진 항해자들도 또한 항해를 이전의 삶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겼다. 이들은 귀족 가문의 장남이 아닌, 물려받을 유산이 없는 차남 이하의 남성이거나, 부유하지 못한 중간 계급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육지에서 작동하는 기존 질서 안에서는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새로운 육지에 도달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얻고 존재의 조건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모든 항해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강제로 바다를 건넌 이들도 있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지속된 대서양 노예무역이 비자발적 항해의 대표적인 사례다. 공동체의 일원이자 자유인이었던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강제로 대서양을 건너 모든 권리가 박탈된 노예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억압받는 자이자 저항하는 자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아프리카의 리듬과 유럽의 화성 이론이 결합하여 탄생한 블루스나 저항 정신을 표현한 레게 음악이 그 유산 중 하나이다.

 

견고한 고정관념이 멈추는 틈새

헬렌 체르스키는 블루 머신(헬렌 체르스키 지음, 김주희 옮김, 남성현 감수, 쌤앤파커스)에서 바다를 푸른 기계로 정의하며, “푸른 기계와 계절이 거대한 패턴으로 춤을 구사하면, 수많은 생물종은 그에 맞춰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회전한다(같은 책, 374)고 설명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바다의 작동 방식에 따라 구조화되며, 인간이 만들어낸 견고한 사회 질서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19~20세기에 바다를 매개로 삼아 사회적 경계를 넘어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청어 산업에 종사하던 스코틀랜드의 여성들로, ‘청어 소녀들(herring girls)’이라 불린 이들이다. 이들은 바다와 리듬을 맞춰 춤을 추며, 사회가 강요한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넘었다.

청어 소녀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청어의 이동이었다. 청어는 고정된 서식지가 없는 회유성 어종으로, 특정 시기가 되면 북해에 모습을 드러낸다. 대규모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청어는 어획량이 풍부해, 오랜 시간 북유럽에서 중요한 식량 자원으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방 함량이 높아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잡자마자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이는 가공이 필수적이었다. 19세기에 들어 증기선과 철도가 발달하면서 청어 절임이 유럽 전역으로 유통되면서 수요가 급증하자, 스코틀랜드의 수천 명의 여성들이 청어 가공 노동자가 되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계절풍에 맞춰 항해하는 선원들처럼, 청어 소녀들도 청어 떼의 계절적 이동에 맞춰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다. 매년 5, 스코틀랜드 북부의 셰틀랜드, 오크니,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출발해 잉글랜드 동부 해안으로 내려갔고, 11~12월에 그레이트 야머스, 로스토프트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청어잡이 어선이 항구에 청어를 가득 싣고 돌아오면, 여성들은 31조로 팀을 이루어 작업에 나섰다. 두 사람이 청어의 아가미와 내장을 날카로운 칼로 제거하고, 다른 한 사람은 청어를 무게에 따라 분류하여 나무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이들은 1분에 50~60마리를 손질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자들이었다. 작업 현장은 피와 내장, 썩은 생선 냄새로 가득했고, 궂은 날씨에도 예외 없이 야외에서 노동을 이어갔다. 이 여성들은 단순히 남성 노동을 돕는 잡역부가 아니었다. 이들은 청어 산업을 떠받치는 핵심 노동자로, 남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때로는 파업에 동참해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기도 했다.

청어 소녀들의 모습은 활기차고 진취적이었지만, 당대 사람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비쳤다. 당시 사회는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로, 여성은 단정한 차림새로 가정에 머무는 존재여야 했다. 노동계급 여성이라 해도 하녀, 세탁부, 재봉사 같은 일이 여성의 몫으로 여겨졌다. 그런 시대에 가정을 떠나 여행을 다니고, 열악한 환경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며, 때로는 그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은 이질적이고 기이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청어 소녀들은 종종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청어 소녀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기꺼이 넘어섰다. 가정을 떠나 자립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부모나 남성의 허락 없이도 독립적으로 삶을 꾸려나갔다. 자신 맡은 일에 자부심을 느꼈고, 동료들과 깊은 연대감을 형성했다. 휴일이면 뜨개질이나 댄스파티 같은 사교 활동을 즐겼다. 비록 사람들은 청어 소녀들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청어 소녀들의 존재 없이는 청어 무역이 지탱될 수 없었기에, 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어 소녀들은 바다가 열어준 틈새를 항해하며, 사회의 구속을 넘어 스스로를 증명했고 자신의 삶을 확장했다.

훼손된 정체성이 회복되는 길

태평양은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각 섬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이들은 카누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며 다른 섬들과 소통하고 교류했다. 이들에게 바다는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바다는 조상이 떠난 길이자 신성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고, 서로 신화와 의례를 공유했다. 태평양의 원주민들은 바다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18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태평양의 섬들은 식민 지배를 겪는다. 섬이 각각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제국의 지배 아래 분할되었고, 자연과 공동체를 연결해 주던 연속성의 공간이었던 바다는 단절되어, 각국의 배타적인 해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섬들 사이를 오가던 항해는 물론, 그에 수반되던 신화와 의례, 전통 항해법 또한 사라졌다. 더욱이 그들의 문화가 서구에 비해 열등하다는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변화는 1960~70년 사이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다르게 인식하고 부흥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일어났다. 바다 인류(주경철 지음, 휴머니스트출판그룹)에서는 태평양의 재개념화를 거론하는 에펠리하우오파의 견해가 소개된다. 그는 태평양 세계의 주민들은 작은 세상에 갇혀 사는 게 아니라 서로 왕래하고 교역하는 대양 공동체이며광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들(islands in a far sea)이 아니라 섬들로 구성된 바다(a sea of islands)”(같은 책 41~42)라고 말한다. 이 노력의 상징적인 결실이 바로 호쿨레아 호의 항해이다. ‘기쁨의 별이라는 뜻을 가진 호쿨레아 호는 하와이섬에서 출발하여 타히티섬까지 별의 위치나 바다와 바람의 움직임, 새의 이동과 주변 섬을 관찰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항해했다. 이를 통해 바다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왜소해진 전통문화와 정신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첫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호쿨레아 호는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20234년에 걸친 태평양 일주 항해에 나섰다. 이번 항해에서는 36개국 345개 항구를 방문하고, 최소 150개의 원주민을 만날 계획이다. 호쿨레아 호의 항해는 단순히 전통 항해 지식과 기술을 되살리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단절되었던 해양 네트워크를 복원하고, 식민 통치를 겪으며 약해진 대양 공동체의 연대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깊은 의도가 담겨 있다. 오늘날 호쿨레아 호는 이러한 공동체 회복의 상징으로서, 여전히 대양을 가로지르며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나는 바닷가에 가면 발목까지만 물에 담근 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본다. 물은 경계이다. 기존처럼 두 발로 걷는 방식으로는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해안선은 파도에 따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발가락 밑에서는 모래가 쓸려나가는 감각이 선명하다. 바다는 육지를 단절시키는 자연의 장벽이지만 동시에 경계가 흔들리는 장소이고, 물결을 타고 나르는 항해자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바다라는 경계를 넘는 순간, 그 사람이 지녔던 국적과 신분, 삶의 조건은 바뀌고 다시 구성된다. 바다는 사람의 인식과 사회 질서를 흔들고, 때로는 관계를 이어주고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바다를 건너며 새로운 삶을 꿈꾼다. 바다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으며, 항해자는 그 물결을 따라 넘나들며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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