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퇴근 후 인류학 후기(1)] 얼어붙은 생각 녹이기
퇴근 후 인류학(1)_3장 후기_강평_250603
얼어붙은 생각 녹이기
현대적 생각으로 덧씌운 선사 이미지
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 공저 『모든 것의 새벽』(부제 : 다시 쓰는 인류 역사)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기존 역사가 토마스 홉스, 장자크 루소부터 시작해서 최근까지 많은 역사가들이 책을 내놓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모두 홉스와 루소 저작의 변주곡 혹은 끝없는 반복이라고 할 정도로 수렵 채집에서 농업혁명과 국가 탄생을 진화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류가 소규모 ‘무리’를 벗어나 농업혁명, 사유재산, 문자, 국가의 탄생까지 단선적으로 ‘진화’했다는 기존의 인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저자는 역사가 어떤 ‘기원’이 있어, 그것을(예를 들어 농업혁명, 어떤 특정한 위인) 계기로 갑자기, 단박에 사회가 (발전된 방향으로) 변했다는 기존 역사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화 과정에서 사회 규모가 커지며 ‘필연적으로’ 위계가 생겼다는 주장도 반박한다. 또 선사 사회를 순진무구한 집단으로 보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을 염두해두지 않는 기존 역사를 새로 쓴다. 저자는 인류의 새벽을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 우선 새벽에 대한 편견, 편견의 역사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저자는 ‘인류 선사(先史)의 화폭은 확연하게 현대적이라고 한다(116페이지)’. 토마스 홉스가 국가 탄생의 배경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제한 것은 이기적인 계산, 생산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우리 경제 시스템의 반영이라고 한다. 책의 1~2장에서 저자는 선주민 비평가들을 관찰하는 유럽 학자들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덧씌워 선주민을 보고 있다고 한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에 등장하는, 목숨을 걸고 파도를 넘어 엄청나게 먼 거리를 이동하는 사례는 자급자족 불가, 비교우위와 비교열위라는 경제학적 개념만 투영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 많다. 꼭 붙잡고 있는 ‘기존’의 생산성대신 상호 관계 그 자체, 서로의 방문 구실이라는 ‘다른 생각’이 필요한 지점이다.
필요한 것은 상상력
오선민 선생님은 선사(先史)는 유물이 드물고, 그마저도 일부이거나 훼손되어 있고, 그 2가지 이유로 해석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시간은 돌이킬 길 없이 사라졌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고도 이어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해석할 때 필요한 것은 가능성의 폭을 넓히는 상상력이다. 3장의 제목은 <빙하시대 녹이기>(부제 : 사슬과 묶임과 사슬에서 풀러남: 인간 정치의 변화무쌍한 가능성)이다. 부제는 선사시대를 ‘균일’한 전형으로 떠올리는 것 대신 ‘다양한 가능성’으로 상상해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선사를 알기 위해서 더 많이 연구하고,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이 말이 일단 돈이라는 단일하고도 균일한 척도, 돈에서 권력으로의 자유로운 변환이라는 전제를 그대로 선사에 투영하지 말아보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저자는 선사인을 ‘상상력이 풍부하고, 지적이고, 장난스러운 존재’로 대해보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우리가 단순, 순진한 존재로 상상한 사람, 즉 지배자가 ‘없는’ 사회 사람들이 사실은 그런 상상을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상력이 더 풍부해서 그런 사회에 사는 것이라면 어떻냐는 주장을 인용한다.
그간 나는 인류 초기–소규모–평등사회, 농업혁명 이후–대규모–위계사회라는 도식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왔다. 회사도 소규모 벤처는 눈빛을 보며 의사결정을 평등하게 할 수 있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권력, 위계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직장 경험까지 더해져서 그 생각은 꽤 강고했다. 나는 선사시대의 대규모 분묘, 거석을 곧바로 왕이라는 권력자의 증거로 암기해왔다. 세미나를 참석한 달팽이(이윤하) 선생님도 고인돌 = 권력자의 탄생으로 암기했다고 한다. 거석이 설치된 장소에서는 나지도 않은 몇 톤이나 되는 무게의 거석을 이고지고 옮기고 엄청난 공이 들어간 다양한 부장품을 묻으려면 노동력이 일단 필수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 시킬 수 있는 권력자가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다는 추정은 통념이다. 애써 외우고 몸으로 느꼈던 것과 다른 상상을 해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농업혁명 전, 소규모라도 위계가 있기도 했고, 대규모라도 평등한 사회도 있다고 한다. 농업 사회로 곧바로 진입한 것도 아니고, 아예 (농업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농업을 시도하지 않거나, 농업을 시도했다가 다시 수렵 채집으로 돌아가기도 한 많은 사례를 그 증거로 제시한다.
다름을 포용, 분산되는 중심
아메리카 원주민과 서구인들의 서로에 대한 생각이 그들의 관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원주민은 서구인을 ‘이질적 존재’, ‘미지의 타자’로, 서구인인 원주민을 자신들의 좀 더 이른 버전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보이는 것 이면의 모르는 영역을 인정하는 원주민들과 진화 개념으로 무장된 서구인의 차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의 좁은 상상력 속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 역사는 사람이 살만한 곳(식량이 풍부하고 생존에 유리한 기후의 장소), 지금의 인류와 외형상 비슷하면서 털이 좀 많고 전곡 선사 박물관에서 본 사냥꾼의 옷을 한 사람의 이미지이다. 저자는 아프리카 북단 모로코에서 남단 희망봉 사이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사막과 우림으로 차단되어 지역적 특성이 강한 모습으로, 소인 호빗, 거인, 요정 엘프 등 신체적으로 다양한 사람이 사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아프리카인, 선사인이라는 집합명사로는 정형화할 수 없이 매우 다양한 신체, 그 신체보다 더 다양한 사회 양식이 있다는 상상말이다. 저자는 인간 사회의 ‘원래’ 형태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소규모–채집–평등 대 대규모–농경–위계는 상상력이 배제된 단편적인 이미지이다.
저자는 막연한 상상력만으로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러시아 북부 숭기르에서 발견된 사치스러운 의복, 장신구, 튀르키예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거석, 러시아 유디노보 유적의 매머드 하우스는 대규모 사회가 농경사회 이전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저자는 명령하는 권력의 위계가 있다고 보기에는 요새, 창고, 궁전같은 겉치레는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어려운 대공사라는 거석 건축물도 애써 만들고 몇 세대 지나면 고의로 파괴한다. 계속 확장, 축적하려는 전형적인 현대 국가의 권력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시신을 매장조차하지 않는 사회에서 거인 등 신체적 기형자들을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사후에는 공을 들인 부장품과 함께 매장하는 것은 왜일까. 오선민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힘 있는 사람을 찾는 현대의 방법 이외에, 여기저기를 오갈 수 있는 경계에 있는 사람을 찾는 원시의 방법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경계에 있는 자란 강력한 중앙집중적 힘이 아니라 적응력, 유연성, 관용(포용력)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의미이다.
저자는 원시의 위계가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 계절에 따라 사냥과 채집 등 경제 생활이 바뀌고 이에 따라 위계가 생겼다, 없어지며 일시적으로만 작동하고 그 역할이 순환되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위계라는 단어 안에 고정적, 불변적이라고 생각해왔기에 언뜻 상상이 어려웠다). 시기마다 다른 역할, 다른 이름, 다른 사람이 된다. 세웠다 부숴버린 거석처럼 사회 구조 자체를 전제적으로 등장시키고 ‘해체’한다. 독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지배형태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상상을 가로막는 기원을 묻는 질문
이 책의 공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당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이 책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질문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쓰기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불평등의 기원이란 곧 문명의 기원에 대한 탐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곧이어 ‘불평등의 기원’대신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대한 것으로 질문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을 묻는 것은 기원이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그 전제는 다른 상상을 할 없도록 생각을 고착화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언제부터 유연하지 못하고 꽉 막힌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류가 수만 년 이상 거석을, 전제적 사회 구조를 공들여 쌓고 또 일부러 해체하는 실험을 계속하다가 영구적이고 불변하는 탑을 쌓게 되었는가, 즉 어쩌다 그토록 거부했던 불변하는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는가 탐구해보자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진화를 생각하고, 원시 사회를 현대 사회가 지나온 전단계로 생각하는 것을 (어렵겠지만) 지양해보고 싶다. 원시 사회 사람들은 순진하고 뭘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대로 ‘똑같이 지각이 있고, 똑같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혼자 칩거하면서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고 혼자서는 스쳐버렸던 문장을 하나하나 세미나로 다시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고, 또 글로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상상은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고, 서로 나누는 능력인 것 같다.
상상 자체도 내 생각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 같고, 나는 정말로 나를 얼마나 넘어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통념이 통념인지 깨닫기도 매우 어렵군요.(몹시 답답) 선생님의 말씀으로 상상은 일단 타인이 필요하네요. ^^ 그렇다면 계속 만나요~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며, 상상력을 떠올리기도 힘든 사고의 고착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강평쌤의 후기를 읽으며 상상력이란 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를 기준으로, 사회를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보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