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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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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사상사답사] 답사기 DAY-1 및 인터뷰 자료 초안

작성자
박호이나키
작성일
2025-06-07 19:32
조회
32

헉헉… 숨 가쁘게 일단 초벌합니다.. 




# 탐구생활 일본철학사상사 답사기_박준상

 

답사기 : 구도야마 사나다 박물관

 

차에서 내린 순간 등나무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결국 왔구나. 일본에.’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여. 도착까지는 물론 쉽지 않았다. 왼 방향 운전석에 적응하자마자 도로에 올라 140Km/h의 속도를 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옆자리에 앉은 김문용 선생님은 우려 섞인 눈으로 나를 거듭 바라보셨다. “어려울 것 같으면 내가 할게” “아닙니다. 제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내가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운전이었다. 때마침 이기헌 선생님이 운전대를 잡았던 2호차의 안타까운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극도의 긴장감이 더해진 참이었다. 오선민 선생님은 뒷자리에 앉으셔서 계속 말린 대추 과자를 드시고 계셨다. 여기서 잠시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인문세고 뭐고 끝장이라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결국 무사히 첫 번째 행선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와카야마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은은하게 베인 등나무 향기는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이번 답사의 전체 일정을 꾸려주신 허남린 선생님은 아이처럼 말간 웃음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캐나다에서는 벌써 방학이 시작됐는데 답사 일정에 맞춰 일본에 머물고 계셨다. 선생님을 따라 주차장서부터 골목 안으로 들어서 사나다 박물관을 찾았다. 주변 건물의 생김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통가옥 형식의 2층 건물로 입구엔 작은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이연숙 선생님과의 반가운 첫 만남도 이 곳에서 이뤄졌다. 사실 박물관 내부로 들어갔을 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장한 사무라이 3인의 동상이 떡 전시돼 있었던 것이다. 내 고향은 부산이다. 핏줄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선대가 바닷가 어귀에 살며 왜구에게 약탈을 당하거나 임진왜란 속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DNA에 각인된 영향 때문인지 왜인지 모를 거부감 같은 것이 들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궁금증을 풀 여유는 없었다. 직원 분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박물관 명예관장을 역임 중인 키타가와 히로시 선생님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인근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야두부를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김문용 선생님은 처음에 이것은 계란이다라고 하실 정도로 약간의 점성을 가진 특이한 두부였다. 와사비를 살짝 풀어 같이 먹으니 말캉한 탄성과 함께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사무라이에 대한 긴장감은 그때부터 해소되기 시작했다.

히로시 선생님께서는 박물관 견학에 앞서 사나다 가문의 묘소가 안치된 진전암(眞田庵)이라는 사찰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나를 떨게 했던 3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1547-1611)’, 아들 사나다 유키무라(1567-1615)’, 손자 사나다 다이스케(1603-1615)’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로, 진전암은 그들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선생님에 설명에 따르면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다이묘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과의 전쟁에 패해 고야산으로 유배를 오게 됐다. 그는 죄인으로 살다가 죽었지만, 아들 사나다 유키무라대에서 사나다 가문은 큰 명성을 얻게 된다.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부름을 받아 참전한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해 이에야스를 생사의 기로에 두 번이나 몰아넣은 것이다. 이와 같은 영웅담은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고 때문에 이 지역은 인구가 크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임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본격적인 박물관 견학에서는 일본의 전국시대 1467년부터 1568년까지 기간을 일컫는 100년간의 혼란한 시대 속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의 흔적과 함께, 지역의 다이묘였던 사나다 가문의 흥망성쇄를 다룬 전시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선대인 사나다 마사유키는 기마병을 다루는 다케다 가문을 섬기고 있었지만, 당시 오다 노무나가와 도쿠가와 등이 조총을 앞세우면서 다케다 가문은 멸망당했고 그 뒤를 이어 지역 호족으로 자리잡는다. 사나다 가문의 위기는 서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으며 발생한다. ‘세키하가라 전투를 위해 이동하던 도쿠가와 측 군대(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사나다 가의 성을 지나야 했는데 항복하겠다고 하면서 성을 비워주질 않아 전투시간에 늦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군은 전투에 승리했고 사나다 가문은 사형을 면한 채 지금의 와카야마 고야산에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히로시 선생님은 고야산은 당시에도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고 여성의 접근이 통제되는 것은 물론 세속 권력이 손을 델 수 없는 곳이었다면서 사나다 가문에게 어느정도 자유와 목숨을 안전하게 보장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유배된 사나다 가문의 생활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박물관 내부엔 친척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쓴 편지와 함께 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만든 을 전시해 둔 것을 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을 복권시킨 2대 사나다 유키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의 오사카성 침략 당시 아들 다이스케와 함께 고야산을 탈출해 오사카성에서 용맹을 떨친다. 사나다 박물관 내에 전시된 오사카 전투를 다룬 병풍그림 모본이 꽤 볼만했다. 더불어 사나다 가문의 비밀회의가 이뤄진 방을 비롯해, 곳곳에 매복한 닌자들의 마네킹과 그들이 작전에 사용한 각종 암기 등을 전시하는 등 다소 재미있게 당시 전국시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특히 사무라이나 닌자를 다룬 만화나 캐릭터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막부말 검객의 이야기를 다룬 바람의 검심이나 가상의 닌자 이야기 나루토등 일본의 만화를 보고 감동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답사를 정리하면서 알게 됐지만 사나다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출병 요구를 받았지만 이뤄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뒤에는 왜인지 모를 안도를 하게 됐다. 스스로 애국자라거나 이런 생각은 한 적이 별로 없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온갖 암기들과 사무라이의 칼을 보면서 들었던 일본을 향한 모종의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 여정을 마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 속에서 모진 삶을 살았겠구나 싶으면서도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 선조는 정말 왜구의 칼침을 한방 맞은 것이었을까.

 

답사기 : 고야산 입구 자존원(慈尊院)

 

히로시 선생님을 따라 간 곳은 고야산으로 들어서는 입구 아래 자리 잡은 한 사찰이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구카이와 사이초 스님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경내는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우측엔 아래는 사각형, 위는 원형 지붕을 갖춘 2층 규모의 거대한 탑이 자리해 있었다. 일본에서는 다보탑이라고 불리고 있다. 법화경의 다보여래를 모시는 탑으로, 당나라에서 밀교를 들여온 구카이가 밀교적 상징성과 입체적인 법계 구조를 중시하며 이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됐다고 한다.

건축적으로 특이한 부분이 또 있다. 사찰 가운데 자리한 본당에 들어갔는데 흔히 주불이라고 불리는 불상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대웅전이라고 해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등 해당 사찰이 중시하는 교조의 상을 드러내고 모시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하지만 진언종 밀교 사찰의 특색으로 여겨지는데 본당 내부 절반 정도는 금줄을 쳐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곳곳엔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등이나 제기, 뾰족한 촛대처럼 생긴 장식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 너머 원래 불상이 있는 곳은 닫힌 창이 달려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그 창문은 20년에 걸쳐 단 한 번만 여는데, 창을 열면 반대편에 미륵불을 모신 전각이 있어 몇 개의 창문을 거쳐 예경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을 맞아준 자존인 주지스님은 어떤 식으로 의례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각각 십이간지의 동물신 이름을 가진 12개의 소리가 다른 종을 울리거나, 부처님 발자국 위에 따라 올라서서 만다라를 감상해 우주의 기운을 느꼈다. 한국의 불교의례, 특히 주류에 해당하는 조계종의 경우 경전이나 을 굉장히 중시한다. 법당 안에는 천수경이나 금강경 같은 책을 늘 구비해두고, 신도들은 절을 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온 몸을 땅에 붙인 채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번뇌와 갈등, 집착을 부처님 전에 내려놓는다. 종교는 본래 기복적인 성격을 갖기 마련이지만 그 것이 전면으로 작용하는 것을 늘 경계하면서 부처님이라는 종조의 가르침을 좆는 수행으로서 기능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자존인에서 마주한 불자들의 신행에는 몸을 크게 사용하는 절이 없었다. 물론 경전의 가르침도 쉽게 찾기 어려웠다. 그 곳에선 석가모니 뿐만 아닌 삼세(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 그러니까 불교적 우주와 일치되기 위한 정신성이 강조되는 듯 했다. 불교를 통해 나와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계속해 모색하는 형태의 신앙이 아닌 신과의 일체감이 중시되는 것이다.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지향점은 분명히 달랐다.

사찰 바깥엔 생전 처음 보는 부적이 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가슴 모양을 흉내낸 부적이었다. 궁금했지만 다소 자세히 살피기 민망한 상황에서 주지스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유방암 등 여성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한 공양물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찾아봐서 알게 됐지만 자존원의 가슴 공양물은 미국 CNN에서도 보도됐다. 와카야마에 살고 있는 한 의사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위해 이 곳을 찾았고, 가슴 형태의 공양물을 올리면서 언론에 알려지며 순산과 암 예방 등을 기원하는 명소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자존원은 구카이의 어머니를 모신 사찰이다. 과거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 고야산은 여성의 출입이 금지돼 있었고, 구카이의 어머니를 비롯해서 여인들은 이 곳에서 참배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 고야산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여인들의 기도는 여전히 어머니의 사찰로 모이고 있다.

자존원에는 고야산 입구로 들어서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계단 정상부에는 큰 토리이가 자리해 있고 이를 통과해 들어선 곳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신사를 방문할 수 있었다. 신토의 신행에서 특이한 지점은 일단 신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방을 향해 박수를 크게 치거나 천장에 설치된 종을 흔들었다. 그리고 동전을 공양함에 넣을 때도 공손히 넣는 것이 아니라 손목 스냅을 활용해 큰 소리가 나게끔 던져 넣는다는 것도 신기했다. 신은 물론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이나 어쨌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더 기도할 맛이 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에 오른 우리는 고야산 내부로 들어서는 순례자의 길로 향했다.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외길이 너무나 상쾌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걸어야만 이렇게 산 속에 멋진 길을 낼 수 있을까. 7세기 구카이를 비롯해 신성한 산 고야산으로 들어섰던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내 발과 겹쳐지는 듯 했다. 하산하는 길에서 어느 정도 내 운전 실력에 마음을 놓은 김문용 선생님은 이런저런 사색에 잠겨 편안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야 이렇게 차를 타고 고야산을 올라가지만, 과거에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산을 올랐을까.” 긴 역사 속에서 자존원에 여성들의 기도가 쌓인 것처럼, 고야산을 향해 신성하고 귀하게 여긴 사람들의 마음이 쌓인다. 그리고 그 곳은 사찰이 되고 성소가 된다. 오늘날 그런 곳에 너무나 쉽게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리라.

 

3. 분하사

 

분하사, 고카와데라는 첫 번째 일정의 마지막 방문지였다. 저녁이 될 무렵에 찾은 사찰이기에 넓디넓은 사찰 경내엔 우리밖에 없었고 고찰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분하사는 770년 창건됐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전소된 아픔이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사찰은 18세기 에도시대 재건됐는데, 불로 한 번 그을린 듯 그로테스크한 고동색 목재에 하나도 색을 입히지 않고 건축한 고찰이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대단한 사격이 느껴졌다. 특히 사찰 우측에 흐르는 냇물을 따라 직선형으로 길게 형성된 가람 구조가 굉장히 독특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곳에서도 만난 지장보살상이었다. 앞서 갔던 진전암에서도 경내에 조성된 지장보살상은 아기들이 끼는 턱받이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의 지장보살은 대단한 원력을 가진 구원자로 여겨진다. 육도의 모든 지옥 중생들이 성불하기 전까지 절대 성불하지 않겠다는, 모든 중생의 제도를 목표로 한 만큼 대승불교에서는 특히나 존재감이 있는 굉장히 남성적인 성격을 가진 보살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기들이 착용할 법한 털모자에 턱받이까지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곳곳에서 나타난다.

앞서 전해들은 히로시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지장보살은 일본에서 어린 아이들과 유산된 아이들, 낙태된 아이들의 수호자로 여겨진다고 한다. 부모들이 유산을 하거나 아이를 잃었을 때 아이 대신 지장보살에게 어린아이처럼 옷을 입히고, 턱받이를 씌우고 장난감을 바치면서 우리 아이를 잘 돌보아 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 일본 지장보살의 특징적 성격이다. 아이들의 영혼을 돌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그려지면서 독특한 풍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나는 남성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와 부처 등 국내 주류 종교에서 나타나는 성상이나 성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의 모습은 남성적이며, 제사를 올리는 등 신도들의 주된 신행 역시도 위의와 권위를 강조하는 힘센 아버지나 어르신을 모시는 것처럼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에서도 다르진 않았다. 일본 역시 불교 교단 제도는 남성을 중심으로 하며 금줄 내부의 일반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행해지는 밀교식 제례는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보다 연극적인 카리스마가 강조되는 듯 했다. (하물며 20년 만에 한 번씩 공개하는 불상이라니!) 본질적 차이는 민중들이 실제 신앙하는 형태, 즉 교단 외부에서 벌어진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여성성과 모성, 생명에 대한 신성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자존원에서 본 가슴 부적을 비롯해 턱받이를 한 지장보살은 대중들이 갖고 있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출로가 바로 종교임을 알게 한다.

분하사를 마지막으로 첫날 일정을 마친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무려 인공온천 목욕탕을 보유한 숙소였는데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저녁 만찬 이후 가진 목욕타임은 여정의 긴장을 말끔히 풀어주는 듯 했다. 만찬에서의 이야기들도 빠트릴 수가 없다. 선생님들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여러 가지 생각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내가 깜짝 놀랐던 대목은 일본에서는 스님들이 지켜야하는 계율이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1872년 메이지 정부가 스님들의 육식과 결혼, 머리를 기르는 것을 허용하는 칙령을 내려 이전까지는 불법적으로, 또는 묵인된 형태로 존재하던 대처 문화가 전면적으로 공식화된다. 놀라운 것은 당대 불교계의 반응이다. 일본 스님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이 당시부터 일본 불교는 하나의 의례 서비스이자 자녀에게 사찰을 물려줘 운영을 맡기는 가업으로 자리 잡게 된단 것이다. 당시 정부가 칙령을 통해 불교를 세속화한 목적 속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이 있다. 메이지 정부가 신토, 천왕 중심의 근대 국가 체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에도 시대 봉건 사회와 결합돼 있던 불교를 약화시키는 것은 국가 개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일본 불교는 현대 한국 불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 불교는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 전래됐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대처와 육식이 역수입됐고 전체 스님 중 90%가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에서 왜색 불교를 규탄한다는 명목으로 대처승 조직인 태고종과 청정 비구를 표방하는 조계종의 분규가 시작됐고 양측의 전통사찰 소유권 분쟁은 산업화와 민주화 등 우리 사회 주요한 변화 속에서 불교의 참여와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때문에 조계종단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 불교에선 일본 불교에 대한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불교는 내 생각과는 상당히 달랐다. 천태종의 개조인 사이초는 승가가 구족계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무너뜨리면서 불교가 승가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상식을 깨버렸다. 구카이와 함께 당나라서 들여온 밀교 역시 대중 정서와 부합한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문헌학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승가가 독점해온 경전적 지식을 무력화하고 진언을 암송함으로써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민중불교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일본 불교가 결국 모든 계율을 해제할 수 있었던 배경엔 그와 같이 대중과 호흡해온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첫 날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곳에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일본 불교와 더불어 신토, 그리고 사무라이까지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을 좀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은 큰 성과였다. 종교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연숙 선생님께서 깨끗한 옷을 입고 신사를 닦고 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정 중에 말씀하신 대로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그 자체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마음이 누군가에겐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고 무섭고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정치와 권력은 끊임 없이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공격한다. 공부를 통해 종교 안에 숨어들은 전체주의, 파시즘을 걷어 내고 순수한 영성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코너]

 

제목 두 발로 만난 사람들, 발로 쓴 인터뷰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학창시절 선생님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말입니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절대적인 학습량이 중요하다는 건데, 지적 능력이나 성장 환경의 격차와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갖고 있는 두 볼기짝으로 공부를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느낀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공부에 있어서 엉덩이가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특히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춰야 하는 수험공부에선 이해력과 암기력 등이 주요한 포인트가 되겠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는 신체로 하는 것이며, 엉덩이와 같이 단단한 하체를 갖고 있는 자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공부가 단순히 지식을 얻고 뽐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자하는 적극적인 방식과 노력을 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문공간세종의 일본철학사상사 답사 전체 일정을 직접 꾸리시면서 선봉장 역할을 해주신 허남린 선생님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공부는 발로 하는 것이다”. 닷새 동안 정말 많이 돌아다녔고, 그 덕택에 많은 분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여정이 끝난 지금은 공부는 발로 하는 것이라는 말에 격하게 동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여정을 함께해주신 분들의 인터뷰를 싣습니다. 서로를 더 이해하고자 두려움 없이 성큼 발을 내딛고 손을 맞잡아 주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통해서 독자 분들께서도 생생한 현장을 만나는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허남린 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질문 1] 선생님, 우선 일본철학사상사 답사 전체 과정을 꼼꼼하게 준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 짓는 소회가 어떠세요?

 

이번 여행은 인문공간세종에서 2년 동안 공부한 내용이 끝났기 때문에, 관련된 지역을 몇 곳 선택해서 돌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만 보았던 지역과 인물, 건물 등을 보고 어디 위치해 있는지도 알고 분위기도 느끼고.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도 만나고 유적지도 봤기 때문에. 역시 실물을 봐야지만 책에서 읽었던 내용의 이해가 깊어질 수 있고 실감이 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항상 타문화를 타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실제 현장에 가서 그 곳에 남아있는 역사적 유물이랄지. 그 것을 이어받아 전승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실제 가까운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상사든 철학사든 역사든 문화사든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의 경험에서 나온 신념입니다.

 

[질문 2] 답사단은 일본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찰과 신사, 종교시설을 방문했습니다. 무엇보다 구카이의 진언종, 사이초의 천태종의 총본산을 찾아 일본철학사상의 원류를 탐방했는데요. 일본 불교의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본 불교는 일본 종교의 근간을 이루었고요. 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종교문화가 전개되었기 때문에 어딜 가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요. 일본이 지역적으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가늘고 멀리 형성돼 있기 때문에 풍토도 다르고 기후도 조금씩 다르잖아요. 그런 면에서 각 불교의 종파들이 풍토와 지역에 맞게끔 변모해간 흔적들이 풍부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불교는 몇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전환점을 통해서 일반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그런 힘을 발휘하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그 모습이 아직까지도 깊이 남아 있고. 그 신앙의 중심 요체는 사자(死者)와 의례. 즉 자기 부모님과 조상들에 대한 숭배와 의례, 극락에 태어나길 원하는 그러한 염원들이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염원이랄지, 소원 같은 것들을 초월적인 힘을 빌어서 실현해보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이 종교적인 행위로 발현되어 전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불교문화를 접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장 불교 문화가 침투해있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질문 3] 저희 여정의 초반에 찾았던 와카야마 지역 고야산에선,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조선 군사들을 위한 위령비를 보았고요. 또 교토 노무라 미술관에선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고려다완도 직접 살필 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들이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됐는데, 이같은 역사에서 어떤 것들을 우리가 배울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 그 이전도 그렇고 현대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이 접해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은 중국과 일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입니다. 서로 접촉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고요. 이웃과 접촉했을 때 서로 사이가 좋으면 상호 얻을 것이 더 많다. 이웃과 사이가 나쁘면 얻을 것이 줄어든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처럼 역사적으로 흘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된다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그것이 어떤 나라든 관계없이 좋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이 평화와 상호 안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측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불행했던 시점이고 그 증거가 고야산의 비석에 남아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때의 참상이 이렇게까지 심각했구나. 그것을 또 미화하려고 했던 흔적들이 여기 남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요.

고려다완은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간접적인 매체를 통해서 두 나라가 만났을 때 융합적인 문화가 일본에서 생성됐다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일본이 얻은 것은 상당히 많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당시에는 그것을 모른 채 열심히 도자기를 굽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했던 사람들의 숨결이 상당히 일본에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데, 그것을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없어진 것은 아쉽게 느끼고요. 한국에서도 돌아다니면서 그러한 흔적들을 발견하고 발굴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질문 4]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발로 뛰는 공부가 진짜 공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많은 한국 사람들은 야스쿠니 신사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이 낯설고 과거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안 좋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불편을 느끼거나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편견을 깨는데 공부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일반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접해보고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진정한 랄지 생각들을 접할 수 있다면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뒷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절대 미워할 수가 없거든요.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무엇인가 애잔하고 슬픈 생각이 든다는 느낌을 늘 갖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우연히 이 곳에 살게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을 미워해서 얻는 것보다는 상대를 이해하고 보듬고 서로 인정해주는 관계에서 얻는 삶의 활력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특정한 한 두가지를 가지고 화를 내고 상당히 가슴아파하는 것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과 동시에 좀 더 발을 넓혀서 다니고 견학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연숙 히토츠바시대학교 명예교수

 

[질문 1] 선생님, 이번 일본철학사상사 답사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학우들과 같이 여행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여행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일상을 흔들고 재창조하는 큰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일상을 탈바꿈하고 거듭나는 그런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질문 2] 이번 답사는 종교와 영성을 주제로 여정을 떠났는데요. 선생님께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갖고 계시면서도 각 사원이나 성소를 방문할 때마다 진심을 다해 기도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오늘날 영성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20세기가 자본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영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넘어서는 영성이 필요한데요. 종교는 영성과는 다르죠. 또 종교의 시대에서 영성의 시대로 가는 것이기도 하고요. 종교는 각 교리 등 문턱이 있었는데 오늘날엔 하늘 자체가 넓어졌어요. 모든 영성이 만나고 거기에서 서로 돕고 웃고 화해하는 그런 시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에 가면 부처님이 계시고 성당에 가면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이 계시고. 다른 종교를 가도 그 곳만의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다 통하는. 모로 가면 전부 통하는 것처럼 영성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3] 선생님께서 언어학자이시기도 하고, 특강 등에서 언어도 숲이나 꽃처럼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요. 이번 여정에서 만난 신사를 쓸고 닦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신앙역시 그렇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의미를 말씀해주신다면?

 

인류사를 보면 마음이 중요하고, 그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 서로 통한다는 것이 고대로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정갈함을 가지고 마음을 한 데 모이면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기운이 모여서 신전이 되고 향기가 모여 널리 퍼져나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 저는 언어를 우주의 호흡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더럽혀지거나 남을 비난하는데 사용되면 기운이 탁해지고 호흡도 나빠지죠.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정치나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언어가 정형화되거나 왜곡될 때가 있습니다. 이를 인식해서 가꾸고 떨쳐내고 정화시키고,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말. 그 말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의식하는 언어 수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말로 많은 상처를 받고 갈등하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이 부분을 조금만 신경써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 4] 마지막 질문입니다. 저는 사실 한국인으로서 일본 종교에 대해 편견이 많았는데 실제 보면서 많은 부분에서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종교를 바라볼 때 우리 안에 형성된 전체주의와 내셔널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종교도 제도입니다. 제도를 유지하려면 자본도 필요하고 권력과 손을 잡아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되도록 그 부분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필요하겠죠. 지금 세계적으로는 이웃 종교간의 화해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한 종교가 높은 담 속에서 딱딱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할 부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내셔널리즘과 종교 전쟁에 참가한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 문을 부서뜨리고 나아가면 잘못된 방향이 조금이라도 수정되면서 서로를 다독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국제사회라고 하면 나라와 나라간, 계급간 또 세대간 연결을 하고 있지만 종교간의 연결도 바른 영성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김문용 선생님

 

[질문 1]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평소 특강도 해주시고 많이 저희가 배우는 입장이었는데 인문세와 함께하시면서 느낀 감정들을 말씀해주세요.

 

멋모르고 따라와서 45일 잘 즐기다가 돌아갑니다. 이번에 둘러본 장소들이 평소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문세 동료들과 그 길을 함께 했다는 것이 좋았고요. 박준상 선생님과 함께한 것도 즐겁고 좋았습니다.

 

[질문 2]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다면요?

 

고야산 일대가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야산은 오랫동안 종교적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순례했던 유서깊은 장소이니까요. 무엇보다 고야산의 이모저모가 눈에 많이 들어왔고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고야산에 다녀온 우리를 포함해서 관광객들의 모습도 참 인상적이었고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고야산 오쿠노인에 머물고 있는 귀신들, 그네들의 이모저모도 마치 감지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깊은 삼나무 숲에 오랜 이끼가 한 켜 한 켜 비석 위에 쌓인 정취는 쉽게 하루아침에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자연과 역사가 빚어낸 광경을 공부한 것이 뜻 깊었습니다.

 

[질문 3] 이번 여정의 핵심 주제는 불교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실 때 일본 불교를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우리가 일본 불교사 자료도 이것저것 읽어보았고. 이번에 와서 그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여전히 매우 얕은 정도, 표피를 곁눈질한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점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 불교는 아무래도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강조해왔던 깨달음보다는 비교적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함으로 인해서 마음의 안정과 공동체의 안정을 도모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경로든 불교적 실천이라는 것이 믿음, 깨달음, 그리고 실천 그리고 증험이라는 과정을 다 거치기 마련인데, 특히 한국불교 같은 경우는 승려들이나 전문적인 신자들인 경우엔 깨달음의 과정을 매우 강조하는 듯 해요. 참선수행이나 경전공부나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얼핏 본 바로는 일본 불교는 의례와 생활 속에서 자잘한 불교적 가르침의 신행, 이런 것들이 좀 더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깨달음 중심이냐, 아니면 실천 중심이냐 이렇게 볼 수 있을 텐데요. 깨달음의 영역에 관한 일본 불교인들의 노력과 추구가 쉽게 잘 안드러나 보여서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질문 4] 그리고 이번 답사엔 신토, 슈겐도, 천리교의 성지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일본 내 종교를 둘러봤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보셨나요?

 

슈겐도를 보면 육체적 단련을 통해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 자연을 지배하는 원리 내지는 입법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동아시아에 존재해왔던 이러저러한 많은 종교적인 노력과 추구들, 중국의 도교나 한국의 신선도 등과 큰 틀에선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는 듯 싶습니다. 저로서는 슈겐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신체단련을 통한 깨우침이 나름대로 강조되는 듯 해서 말이죠.

 

신토의 경우는 글쎄요. 제가 아는 한에선 불교적 의미의 깨달음과 관련된 특별한 가르침이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을 일본 불교가 신행 중심으로 어떻게 보면 권위에 대한 귀속, 이를 통한 심리적인 안정, 나아가서는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식의 경향이 이 신토야말로 아주 적나라하게 잘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일본 불교가 한국 불교 내지 중국 불교와 갖는 차이가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면, 일본 불교의 특징은 일본 신토의 성격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천리교도 마찬가지죠. 천리교 교단에 들어가서 엄숙하고 장엄한 종교적 분위기를 느끼고 우리들 스스로도 놀랐던 종교적 심성이 우러난다고 하는 경험을 여러 사람이 같이 했는데요. 제게는 천리교 문제도 앞으로 좀 더 공부해보아야겠다는 과제를 안겼습니다. 모종의 수련이나 혹은 그 외의 실천을 통해서 자연과 우주를 지배하는 입법과 합일할 수 있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인들이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근대종교로서 천리교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전통이 남아있고 또 바뀌어 나갔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이 듭니다.

 

[질문 5] 근대사를 보았을 때 종교가 국가를 운영하는데 이용한다거나 많이 활용되었는데요. 우리가 과연 종교에서 희망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현대사회는 대부분의 국가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죠. 저는 그 점은 인류사회에 진보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보았을 때 종교인들은 유권자들 아닌가요? 그네들 이라고 해서 정치의식이 없을 수 있나요? 종교도 사회내 존재하는 여러 단체들 중 하나죠. 그래서 원리적으론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것이 사실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가 현실 정치를 개선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겠죠. 이 측면에서 보면 과거 오랫동안 종교는 긍정적인 역할을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종교 내부나 바깥에서 정치 문제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다듬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6] 일본의 경우 종교에서 자연과의 결합과 신과의 결합이 강조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종교 행위가 특정 장소에서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로 여겨지는 듯 한데, 선생님께서 보실 때 궁극적인 두 나라간 종교에서 차이는 무엇일까요?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런 것 같아요. 한국에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종교적 갈등이 덜 표면화된 사회인거죠. 그 요인 중 하나가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 불교는 사찰 안에서 제한되고 그 바깥을 나오면 스스로가 종교인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 않고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것이 다종교 공동체의 나름대로 지혜일 수 있을텐데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활동이 너무 형식화되고 형해화된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자기 세계관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이념이나 관념이나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삶의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미쳐서 내가 통일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교회당에서 또 사찰에서의 종교적 심성이 가능한한 바깥으로 나갔을 때도 유지되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다만, 전제했듯이 그럼으로 생기는 종교간의 갈등 문제는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7] 마지막으로 이번 여정에 함께하지 못했던 분들에게 한 말씀해주십시오.

 

. 제가 아는 분들 중 한 분도 함께하지 못했군요. 이 거 보지 마세요. 인문세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들과 사진들, 영상들 보시면 너무나 부러워 할 거예요. 하하

 

 

# 키타가와 히로시 구도야마 사나다 박물관 명예관장(전 오사카성 박물관장)

 

[질문 1]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선, 일본 불교의 특징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불교는 한반도의 백제를 통해서 전달됐는데 당시에는 학문으로서의 불교 연구가 왕성하게 시작됐습니다. 그 다음 불교가 크게 변화한 것은 헤이안 시대 들어와 구카이와 사이초의 역할에 의해서 전환점을 맞게 됐습니다. 사이초와 구카이는 견당사의 일원으로서 중국을 방문했고 새로운 불교를 배워 귀국하게 됐습니다. 그 뒤에 일본 불교의 모든 종파는 구카이의 진언종과 사이초의 천태종을 기반으로 해서 진화하며 분파가 이뤄지고 발전해왔습니다.

 

[질문 2] 고야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는 종교간 화합의 성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라 하셨는데요. 그 의미를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곳 고야산은 구카이가 수행의 장소로 선택해서 개창한 지역입니다. 가장 처음에 고야산은 진언종의 승려들이 수행하는 장소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토종과 합쳐지며 정토진언종이 펼쳐지며 보다 활발하게 불교의 분파가 이뤄지며 발전을 이루게 됐습니다. 정토종은 현세가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사후에는 극락에서 편히 지낼 것을 염원하는 것을 주제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정토종에서는 이 고야산이 바로 정토, 극락의 지역이라고 바라보면서 관심을 끌게 됐습니다. 고야산에는 고야 히지리(, ひじり)’라는 소위 선교사들이 활동하는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고야산을 정토라고 가르치면서 전국적 관심을 끌게 됐습니다. 그 결과 일본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죽으면 유골을 여기에 묻고 정토 극락에서 영생하길 바라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고야산은 진언종의 범위를 넘어서서 이 곳이 바로 정토이기 때문에 일본 국민 전체의 신앙적 대상이 되었고 이 지역 자체가 총묘’, 묘의 총본산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렇게 많은 묘와 석탑이 있는 것은 사후에 정토극락에 환생하고 싶다는 염원의 바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유해가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계속 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전근대 시대에는 여성들은 고야산에 올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후 극락에 환생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유해도 이 곳에 많이 묻히게 됐습니다. 사후에는 남녀가 없기 때문에 여성들의 유해도 이 곳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서있는 석탑은 임진왜란때 조선에서 사망한 일본군과 조선군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사후에는 적도 아군도 없기 때문에 양자의 극락환생을 발원하기 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질문 3] 올해가 한일수교 60주년입니다. 불교라는 전통문화를 같이하는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서로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요?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 교류를 위해서는 불교라는 것은 그 지역의 풍토에 적응해서 맞게 진화돼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되면 자연스럽게 한일 교류가 풍성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현재 불교와 신토와 수험도가 서로 화합하면서 공존하고 있지만 예전엔 이렇게 사이좋게 공존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백제에서 불교가 전파되었을 때도 일본은 종교를 믿을까 믿지 않을까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상호 화합하고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현재와 같은 평화와 공존이 실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에도 종교의 대립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가 있지만, 저희의 염원으로는 상호 이해를 깊게 해서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지내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 안넨 호겐 자존원 부주지스님

 

[질문 1] 자존원은 어떤 절인가요? 그리고 일본인에게 구카이 스님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습니다.

 

자존원은 구카이의 어머니가 시고쿠에서 왔을 때, 구카이가 어머니를 맞으러 온 굉장히 의미있는 사찰입니다. 구카이는 일본인에게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에 평소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요. 다만 중국에서 밀교를 가져왔고 구카이의 가장 큰 가르침 중에는 사후에 극락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안에 이미 부처가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기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구카이는 굉장히 효자여서 한달에 아홉 번이나 만났고 이 자존원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장소였습니다. 저기에 있는 젖꼭지 부적은 다른 사람이 보면 우습게 볼 수 있지만, 여성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으며 과거 여성들이 고야산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와도 고야산에 간 것과 같은 효험을 볼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질문 2] 한국의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여기는 감이 특히 맛있습니다. 한국의 불자들이 이 곳에 오셔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튼튼하게 해서 수행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환영합니다.

 

# 토니 아키라 교토 노무라 미술관 관장

 

[질문 1] 에도시대 고려다완의 유행은 일본인의 감각과 조선인의 기술이 호응한 결과로 느껴집니다. 혹시 우리가 이 같은 역사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치와 경제는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리기 어렵겠지만, 문화의 측면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문화에 존경을 표하고 인정하고 교류한다면 반드시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엔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한일 관계가 어려워지면 일본내 매스컴엔 한국 사람들이 반일 데모를 한다거나 일본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등 이런 내용이 강조돼 보도가 되곤 합니다. 한국에 갈 일이 있어도 저희 아내는 가지 말라고 막아서기도 하는데요. 그러면 저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한국에 가면 전혀 그런 일이 없고 많은 한국인들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한다면, 또 문화적인 연대감이 있다면 정치와 경제 분야 역시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2] 임진왜란 당시 한일 양국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을 했는데요. 어떻게 서로가 호감을 갖고 문화적 교류가 곧바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게 되며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1609기유약조로 화평조약을 맺었지만 여전히 사람들 안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보니까, 다도를 하는 차인들이 역시 조선에 있는 다완이 그립고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교류는 이어지게 됐습니다.

 

# 권수현 선생님

 

[질문 1] 권수현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어릴 때 우연한 기회에 일본을 오게 되어서 커서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곳에 18년 동안 살고 있고, 현재 일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 한국 문화, 국제 교류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질문 2] 오늘 어디서 오셨고, 왜 이 답사팀에 합류하게 되셨나요?

도쿄()에서 여기 교토역까지 신칸센과 버스를 이용해서 세 시간 반 걸렸습니다. 인문세 답사팀에 찾은 이유는 일상에서 가득하게 쌓인 독소를 해소하려고 왔습니다. 선생님들을 만나면 느끼는 에너지가 있어요. 누구를 만나든 나름의 에너지가 있지만 선생님들은 뭔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공부하고 싶어하죠. 다른 것 또는 예전의 것에 대한 리스펙이 있는 것 같아요. 인문세 선생님들이 오신다니 지쳐있는 외국살이에 리프레쉬하고 에너지를 느끼기 위해 합류했습니다.

 

[질문 3] 이번 답사를 통해, 제가 알던 불교가 일본에서는 다른 형식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막연하게 불교는 만국 공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문화나 믿음 체계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잘은 모르지만, 일본은 화산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다보니 내 힘으로 노력해서 하지 못하는 게 있음을 받아들여요. 내가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만물에 신이 있다. 그런 것들요. 한국은 내가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편인데 그에 비해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다녀온 히에이산 콘폰추도에서 1200년 동안 한 번도 안꺼졌다고 하는 불멸의 법등이 옛날부터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그 의미가 한국과 다르다고도 생각됩니다. 일본에서는 어떤 재난, 재해도 열심히 대비는 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고 생각해요.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오늘도 촛불에 기름을 계속 공급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오래된 것에 영원성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요. 자연에 순응하고 주어진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믿음, 즉 신이 아닐까 싶어요.

 

[질문 4] 한국 바깥(일본)에 계시니까 한국 내부를 더 잘보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떠세요?

 

외국에서 살다보니 한국과 나를 동일시하는 면이 있어요. 한국이 잘되면 나도 좋고, 잘 안되면 안타깝고 그런 마음이, 한국에서 떨어져 나와 있어서 더 큰 것 같기도 해요. 한국분들이 행복하고 재미있고 자랑스러운 일들이 많으면 그게 내 자랑 같아요. 자존심과도 같은 일이죠. 누군가 한국의 사고나 정치적 이슈를 물을 때 나를 공격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할 때가 있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기서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속상하고 예민하게 느꼈는데, 이제는 그것이 민주주의, 우리(한국)는 대통령도 처벌할 수 있는 나라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합니다. 결국 어떻게 보면 제 문제일 수도 있어요.

 

[질문 5] 오늘 답사에 참여하시면서 인상 깊으셨던 것은?

 

노무라 미술관에서 관장님께서 유물(다완, 찻잔)을 대하는 태도와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거듭해서 포장을 풀고, 몇 겹의 포장들이 일렬로 나열되고 마침내 도기를 천천히 꺼내어 조심스레 다루는 그 일련의 과정이요. 관장님의 말씀 중에 한국이 가진 센스와 일본이 가진 차 문화가 융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고 하셨는데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우리는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각자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중에서 어떤 통하는 지점, 서로 즐길 수 있는 그 지점을 찾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찾아보고 싶습니다.

 

[질문 6] 일본에서는 대중들이 인문세와 같은 공부 모임이 있나요? 제도권의 공부가 아닌 대중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에서도 아주 다양한 분야, 새로운 것을 같이 알아보자는 모임이 많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거나 각자 공부를 하는 방식으로요. 참여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일본 분들도 공부를 좋아하시고 체계적이고 열심히 하는 분들이 많아요. 일본은 모든 분야에서 일단 교육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오타쿠 문화처럼 하나를 깊이 파는 것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질문 7] 답사 참여하신 선배로서 마지막 하고 싶은 말씀은?

 

저는 이제껏 전공 공부만 해왔어요. 확실한 목적이 있는 공부죠.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진지하게 공부하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도 그런 방식으로 공부하고 싶어요. 저는 일과 공부가 동일한 상황인데, 그것을 떠나서 내가 정말 궁금한 내용을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니 아주 색다르죠. 재미있고요. 여기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든 과정이 공부인 것 같아요. 습득해서라기보다는 과정 자체가 공부죠.

 

지나고 보면 내가 얻은 것들은 미리 계산해서 알아낸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해봐야 비로소 아는 것들이 있지요.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쉽게 얻는 것, 경제적 이득을 생각하게 되잖아요. 인문세 선생님들이 일본에 오신다고 해서 중간 참여하게 되었는데 역시 뜻밖의 공부와 에너지를 받고 갑니다.

## 특별인터뷰 오선민 선생님

 

[질문 1] 이번 여정을 무사히 마친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이번 답사여행에서 책으로만 보던 장소에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됐고. 그리고 안다고 생각했던 지식들이 실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도 알게 돼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공부나 답사지의 유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이 손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사실들도 다가오고. 어떤 절이나 탑이 어제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 세월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단 걸 알게 돼서 제 주변의 친구나 제가 읽었던 책들을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질문 2] 가장 인상적인 답사지는 어디였나요?

 

이번 답사에서 진언종 사찰이나 천태종 사찰, 그리고 여러 신사들을 방문하게 됐는데요. 의외로 절이나 가장 인기가 많고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절은 어머니와 관련된 절이 많았습니다. 구카이라는 진언종의 스님 어머니를 모신 절이나, 고야산에 오쿠노인이라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거기는 한반도를 침략하기도 한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를 기리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어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체험같지만 영적인 체험의 근본에 낳고 기른 존재에 대한 감사함이 깔려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종교의 성격이랄까. 종교라고 하는 것의 젠더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가장 인상적인 답사지는 구카이라는 스님의 어머니를 모셨던 자존인이라는 사찰입니다.

 

[질문 3] 한국은 사실 신앙이라는 것이 예수님, 부처님 이렇게 종조라고 해야할까요. 사람들을 섬기고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인식하는데요. 일본에서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수험도나 우리가 무속이라 폄훼하는 자연과의 접촉이 보편적인 듯 했습니다. 거기서 느끼는 점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우리가 답사를 간 곳 중에 이세 신궁이라고 해서 일본 천황과의 시조가 된 신전도 있었고 이소노카미 신궁이라고 해서 일본의 물건들을 모신 신당도 있었습니다. 들어가보면 쌀의 신을 모신다거나 아니면 칼의 신을 모신다거나 되어 있습니다. 원래 신의 개념이 출발에서는 우리를 먹고 자라고 살게 하는 것들에 대한 감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요. 그러한 사물에 대한 우리가 존재하게 하는 물적 토대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있는 사당을 보게 되어서 아주 좋았고 그러한 태도는 이웃나라 문화이지만 배우고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는 여러 가지 20세기의 정치적 사건이랄까. 전근대의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쟁 때문에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서 평가를 따로 해야할 것들이 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 중에 배울만한 영적인 태도가 독특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4] 출국 시간이 가까워졌네요. (갈까요?) 아직 안됩니다. 마지막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내년에 또 인문세 답사단이 중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 중에 저희는 한일문화교류에 대해서 조선 통신사나 한중간 교류한 중세의 연행사 등 두 나라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선비들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문화적인 차이와 그 차이가 서로를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심화되기도 하는데요.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다른 문제의식과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함께 있을까라는 고민 속에서 옛날 여행기를 보면서 배우려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내년이나 앞으로도 여행한 사람들을 따라가는 답사를 기획하고 있는데요. 가능하면 내년에는 조선시대때 중국의 연행사들을 따라서 가는 답사를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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