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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사상답사] 이세신궁
◎ 이세 신궁伊勢神宮(내궁+외궁) + 내궁 앞 거리(오카게 요코초 おかげ横丁)
이세 신궁(공식 명칭은 ‘신궁‘)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고타이신궁(皇大神宮:내궁內宮)과 도요우케노 오미카미(豊受⼤神)를 모시는 도요우케다이신궁(豊受⼤神宮:외궁外宮)을 중심으로 125개의 신사(新寺)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파리 중심부와 거의 비슷하다. 황실의 번영, 세계 평화,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1,500회 이상의 제사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원래 일본의 역대 천황이 황궁에서 숭배했다. 그러나 제10대 스진 천황(崇神天皇)의 통치 기간에 성스러운 거울(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이 황궁에서 옮겨졌다. 그 후 제11대 스이닌 천황(垂仁天皇)의 통치 기간에 천황은 그의 공주 야마토히메노미코토(야마토공주)에게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영구적으로 모시고 예배할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여러 지역을 찾은 후 마침내 공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이세에 영원히 모시고 예배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 약 2,000년 전이다. 약 1,500년 전 제21대 유랴쿠 천황(雄略天皇) 시대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또 다른 계시에 따라 도요우케노 오미카미가 교토 부 북쪽에서 소환되어 이세에 모셔졌다.
황실의 번영, 세계의 평화,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이세 신궁의 제사와 의식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직계 후손인 천황의 지휘 아래 신궁의 사제단에 의해 거행된다. 따라서 신궁에서 거행되는 이러한 제사와 의식을 황실의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의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매일 및 매년의 의례이고, 두 번째는 황실, 국가, 또는 신궁의 이익을 위해 특별한 시기에 거행되는 특별 의례이다. 세 번째는 20년마다 거행되는 시키넨센구(式年戦宮)를 위한 의례다. 이러한 의례 중 중요한 의례가 거행될 때, 천황은 신궁에 사신을 파견하여 헤이하쿠(平穴)라고 불리는 직물을 헌납한다.
매년 의례는 벼농사 주기를 기반으로 한다. 한 해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은 간나메사이(神宮祭)로, 신궁의 신관들이 신궁에서 수확한 그해 첫 쌀을 바치고, 손자를 통해 지상 세계에 첫 쌀을 선사해 주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께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간나메사이에서는 천황이 기른 햇벼 한 이삭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께 바친다.
20년마다 현재 신전과 같은 규모의 새로운 신전이 본전 인근의 다른 장소에 건립된다. 신전 건립에는 약 30회의 의식과 제사가 거행되는데, 새 신전을 위한 첫 나무를 베는 의식을 시작으로 한다. 신전에 놓일 신성한 의복, 비품, 그리고 신성한 보물들도 새롭게 제작된다. 준비가 완료되면 신궁의 승려들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인 성경을 새 신전으로 옮긴다. 이 의식을 시키넨센구(式年遷宮)라고 한다. 시키넨센구의 모든 의식과 행사는 약 8년에 걸쳐 거행되며, 게쿠(姫宮)를 비롯한 신궁의 다른 신사에서도 거행된다. 내궁의 첫 시키넨센구는 690년, 제41대 지토 천황 시대에 거행되었다. 가장 최근의 시키넨센구는 2013년에 거행된 62번째 시키넨센구였다.
1. 고타이진구皇大神宮(내궁內宮)
주소 : 1 Ujitachi-cho, Ise city, Mie Pref.
고타이진구(내궁)는 일본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사이다. 이곳은 황실의 조상 신(신도의 수호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약 2,000년 전 내궁에 모셔져 일본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이곳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궁이 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인 성경(聖鏡)은 본전 가장 안쪽 안뜰에 있는 본궁 안에 모셔져 있으며, 본궁은 네 줄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순례자들은 보통 울타리 세 번째 줄 문 앞에서 모셔진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지바시(宇治橋)
이 다리는 내궁 입구의 이스즈 강(五十鈴川)을 가로지르며, 신성한 영역과 일상의 세계를 분리한다고 전해진다. 우지바시는 순수 일본식 건축 양식을 따르며, 길이는 100미터가 넘는다. 이 다리는 시키넨센구의 일환으로 20년마다 재건축된다.
2. 도요우케다이진구豊受⼤神宮(외궁外宮)
주소 : 279 Toyokawa-cho, Ise city, Mie Pref.
도요우케다이진구는 도요우케노오미카미(豊受⼤神)를 모시고 있다. 약 1,500년 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계시에 따라 이 신이 이곳에 소환되어 모셔졌다.
도요우케노오미카미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함께 신궁에서 교우 관계를 맺고 신성한 음식을 제공한다. 풍년을 기원하며, 인간 삶의 세 가지 필수 요소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행복의 수호자이다. 외궁의 신궁 건축양식은 내궁과 거의 같지만, 외궁에만 있는 미케덴(御饌殿)이라는 홀이 있다.
3. 오카게 요코초(おかげ横丁)
주소 : 52 Uji-Nakanokiri-cho, Ise city, Mie Pref.
이세 신궁 참배가 붐을 맞이한 에도 시대의 거리를 재현한 작은 마을 오하라이마치(おはらい町)에 있는 거리로, 이세신궁 내궁으로 이어지는 약 800m의 거리다. 제61회 이세신궁 시키넨센구가 거행된 1993년에 완성되었다. 일본어로, 오카게(おかげ)라는 단어는 감사함을 의미하고 요코초(横丁)는 일종의 골목을 의미, 오하라이(おはらい)는 정화를 의미한다.
일본 에도 시대(1603년~1867년)부터, 이세 마을은 이세 진구에서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전국 각지의 수많은 순례자들의 목적지였다. 에도시대에는, 어사의 관이 줄지어, 전국으로부터의 참배자를 맞이하는 번화한 마을이었다. 그 당시 다섯 명 중 한 명은 그들의 여정과 함께 오는 어려움을 고려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진자에게 갔다고 한다. 심지어 가사가 있는 민요도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나는 Ise에 가고 싶다, 나는 Ise를 보고 싶다, 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보고 싶다.” 종종 길고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이세로 가는 길은 보통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피곤한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에는 숙소와 음식의 부족뿐만 아니라 고향을 벗어나 모험을 하기 위한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행이 어려웠다. 순례자들이 마을로 가는 여정에서 직면한 장애물을 잘 알고 있는 이세 지역 마을 사람들은 종종 지친 방문객들을 두 팔 벌리고 감사하며 환영했다. 그들은 이 방문객들에 대한 그들의 관대함과 친절이 이세 진구의 신들에게 자신의 감사를 표현하는 경스러운 방법이라고 믿었다.
4. 관련 시대
이세 지역은 일본의 신화와 왕실, 민속, 순례, 정치를 포괄하는 다층적인 역사 공간으로, 이세 신궁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 순례문화가 이세의 역사적 흐름을 이끌어 왔다.
고대(~8세기)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이세에 머물면서 “이 땅이 마음에 든다”고 한 야마토히메 전설에 기반한 이세 신궁이 창건된다. 이세 신궁은 천황가가 직접 제사를 올리는 유일한 신궁으로, 아마테라스의 거처는 일본의 중심이라는 상징이 확립된다.
농경과 어업에 적합한 평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이세강과 미야가와 유역에 초기 정착지가 발달한다. 특히 벼농사와 공물 제공을 위한 국가 직할을 신성한 토지가 운영된다.
나라–헤이안 시대(8~12세기)에는 이세 신궁이 정식으로 국가 제례의 중심이 된다. 천황가가 직접 제사를 올리는 신궁으로 기능하며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지’로서 위상이 확립되고, 천황 대신 ‘사이오(斎王:제사 전담 왕족 여성)’이 파견되어 신궁을 모시면서, 나라와 이세를 잇는 ‘사이오 순례길’이 형성된다.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12~16세기)에는 이세 신앙이 귀족층에서 무사와 상인, 농민으로 확대되며, 관음 신앙과 융합되면서 구마노 고도(熊野古道)와 연결되는 혼합적 순례 문화가 형성된다. 특히 ‘이세 순례’가 이 시기 유행하면서 자기 정화와 속죄, 기원을 위한 도보 순례가 이뤄지게 된다.
에도 시대(江戸時代)(1603~1868)에는 전국에서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방문하며 경제적 성장과 함께 ‘순례 도시’로 발전했다.
메이지 시대(1868~1945)에 메이지 정부가 ‘신도’를 국가 종교로 지정하고 이세 신궁은 최고 격인 ‘국가신사’로 지정된다. 천황의 조상신 숭배는 천황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고, 철도 ‘산구선’의 개통은 이세 순례를 대중화시켰고 국가와 민중 모두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게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신도 체계가 해제되고 신앙의 자율성이 회복된다. 하지만 이세 신궁은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으로 유지되고, 2013년 ‘G7 이세시마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등 연간 8백만 명 이상이 방문해 신앙과 문화, 관광이 어우러지는 명소로 발전하게 된다.
18세기에 정점에 달했던 일본의 국학 운동을 형성시킨 일련의 철학적 고심과 분석들은 네 가지의 일본 문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첫째가 ‘가미(신(神))’신앙이다. 이는 천신(天神)들, 자연 현상, 영과 영혼, 또는 위대한 인간을 상기하는 기념물 따위의, 신이 임하여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곳에 예를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신도(神道))’ 즉 ‘가미노미치’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신의 길’을 뜻한다. 두 번째는 ‘와카(和歌)’를 짓고 평가하면서 고대 일본의 토착어의 높은 가치를 파악한 것이다. 세 번째는 고대 일본 황실의 신화적 역사서(『고사기(古事記)』712년,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이며, 네 번째는 가미로부터 이이온 황실의 혈통이다. 국학은 13세기에 막부(幕府)로 정치적 권력이 넘어가자,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귀족들이 황가가 있는 교토를 문화적 수도로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이 네 가지 요소를 결합해 벌인 다채롭고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은 와카를 핵심으로 삼는 고대 황실의 음악, 가미, 그리고 황제 통치권의 본질과 관련한 새로운 유형의 가르침과 의례를 창안했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거의 변함없이 와카였다. 중국에서 비롯된 한자의 사용과 구문의 사용을 금지하고 순수한 언어로 쓴 와카는 대륙에서 수입된 문화에 지배되었던 환경에서 ‘일본’의 정수를 대변하게 되었다. 그것의 기본적인 생각은 일본 토착어의 소리에는 시인의 마음 즉 고코로를 세상과 또 인간과 융합시키는 정신적·심미적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힘을 고토다마(言霊)라 했고 그것은 나중에 고유한 일본 언어의 거의 마법적인 가치를 찬양하는 핵심 용어가 되었다.
5. 답사기(성과 속)
이세 신궁은 크게는 내궁과 외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내에는 125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내궁와 외궁은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이동해야 할 정도로 떨어져 있고, 그 내도 다 둘러보려면 30분에서 1시간은 걸릴 정도로 넓었다. 이 넓은 곳을 둘러보며 인상 깊었던 점은 신성하게 여겨지는 장소들이 방문객에게 어떤 격식과 가림막 같은 것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모든 신사의 입구에는 도리이(鳥居)라고 하는 독특한 문이 있다. 도리이는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관문으로 흔히 신사 앞에서 볼 수 있는데, 기본적인 구조는 양쪽으로 기둥 두 개가 서 있고 꼭대기에 가로대가 위아래로 두 개가 놓여 있다. 도리이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짓는 경계로, 신사 안에 부정한 것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결계‘로서의 역할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사에 들어갈 때는 이 문을 통과해 들어가야 부정한 것들이 함께 들어가지 못한다고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또 신사의 입구에는 손과 입을 깨끗이 하는 있는 데미즈야(手水舎)라는 곳이 있다. 마치 우리나라 절에 있는 약수터처럼 생긴 곳인데,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석재의 수반, 그 위에 지붕이 덮여 있으며, 수반에는 손잡이가 긴 국자가 놓여 있는데 그것을 사용해서 물을 뜨고 왼손, 오른손을 씻은 후, 손에 물을 모아 입을 헹구고 남은 물로 국자를 씻는 것이 예의 방법이다. 신사에 들러 참배하는 행위는 신을 지상으로 불러들여 소원을 비는 행위이기에 신을 만나기 전에 손과 입 등 몸을 정갈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신사의 입구에서 이러한 격식을 취한다.
이 두 장소가 일본의 대부분의 신사에 있는 신성한 장소와 속세의 장소를 구분하는 어떤 형식이라면 이세 신궁에서 내궁 앞의 우지바시와 오카게 요코초라고 하는 곳이 더 있었다. 또 신궁 내의 정궁(正宮)이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는 점과 가구라덴(神樂殿)이라고 하는 부적을 판매하는 곳,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셔놓은 정궁 등 몇 곳은 촬영까지 금지되어 있다는 점은 그곳이 신성한 장소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였다.
내궁의 입구 오른쪽에는 요카게 요코초라고 하는 거리가 있다. 12~16세기 이세 신앙이 평민에게 확대대어 이세 순례가 유행하게 되고, 에도 시대에 이르러는 이세 진구가 많은 이들이 소망하는 순례지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허남린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돈을 모아 한 사람을 순례자로 보내고, 다음 해에는 다음 사람을 보내는 식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순례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요카게 요코초는 당시 이세 진구라고 하는 극도로 신성한 곳을 순례하고 나오며, 정반대의 역할을 했던 유곽이 늘어선 곳이었다고 한다. 평생 성스러운 장소에 가서 기원하기 위해 한 마을의 사람들이 공을 들이고, 그곳을 나오며 유곽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놀며 신성을 털어내고, 마을의 대표는 돌아와 그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내궁에 들어가려면 이스즈 강 위에 놓인 우지바시라고 하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속세와 신성한 영역을 분리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20년에 한 번 행해지는 시키넨센구에 이 다리 또한 다시 만들어져 놓인다고 한다. 처음 시키넨센구라는 의식을 접했을 때는 잘못 들었나 했다. 20년에 한 번이라고는 하지만, 전체 신궁의 건물들을 다시 짓는 데는 8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다고 하니, 시간과 노력이 여간 소요되는 일이 아니다. 또 신성한 장소라고 하는 의미가 어떻게 보면 그간의 시간이 중첩되어 형성된 곳이라는 점에서 그걸 무너뜨린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더욱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직 이 시키넨센구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지바시까지도 이 의식에 포함된다는 점이 성과 속을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궁와 외궁에 들어서 죽 늘어선 나무숲 길을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은 가구라덴이다. 이곳은 부적을 파는 곳으로 얼핏 보기에는 그냥 상점같이 보이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신성한 곳이기에 촬영을 금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도요우케노 오미카미를 모셔놓은 정궁 또한 신성한 장소라는 이유로 촬영을 금하고 있으며, 외궁의 가장 중심에는 천황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이세 신궁을 돌아보며, 성스러움과 속됨이 어떤 경계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계가 정말 있는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장막에 불과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둘을 넘나드는 어떤 의식이나 형식을 만듦으로서 둘을 구분하려고 한다.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삶은 노고스럽고 비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우리는 그런 일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신이나 신성한 장소를 찾는다. 그런 곳에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로 하고, 존재적 신을 믿지 않는 나도 그곳에 들어서면 마음이 경건해졌고 감히 그곳의 금기를 깨지 못하는 두려움이 절로 마음에 생겼다. 이 이중적인 심리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신성하다는 것이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되는지 좀 더 고민해복 싶어진다.
출처 : https://www.isejingu.or.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