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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사상답사] 이소노카미 신궁
◎이소노카미 신궁
주소지 : 384 Fru-cho, Tenri-city, Nara-pref.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덴리시(天理市) 동부 교외 지역의 숲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신사인 이소노카미 신궁은 소박한 경내와 달리 아주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일본에서 아주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인 이소노카미 신궁의 기원은 역사와 전설이 교차하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적인 힘의 중심지이자 고대 유물의 보관소로 시작해 2000년 이상에 걸쳐 일본 황실의 장수와 국가의 번영을 비는 연중행사인 고대 제례 진혼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기원전 91년경 일본 조정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제사 관련 업무도 맡았던 모노노베(物部) 가문이 창건했다. 신궁은 초대 천황이 지녔던 것으로 여겨지는 신검 ‘후쓰노미타마 검(布都御魂剣)’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다.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660년)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지는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검인 칠지도를 비롯하여 많은 성스러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소노카미 신궁은 귀중한 보물들을 관리하며 일본 황실에 충실히 봉사해 왔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다양한 신토(神道:일본의 민속 종교)의 신을 모신다. 일본 역사에서 신의 가호와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국가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주신으로는 후쓰노미타마노오카미(布都御魂大神), 후루노미타마노오카미(布留御魂大神), 후쓰시마타마노오카미(布都斯魂大神)가 있다.
후쓰노미타마노오카미는 후쓰노미타마 검에 깃든 영력이 구체화된 신이다. 후쓰노미타마 검은 다케미카즈치노오카미(建御雷神:전쟁, 번개, 지진의 신)가 지녔던 것으로 일본 신화 상의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神武天皇)에게 내려진 것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진무 천황은 이 검의 힘으로 회복하여 훗날 일본에 왕국을 세우게 된다.
후루노미타마노오카미는 아마쓰카미(天津神:천신)로 알려진 신들이 가진 10개의 성스러운 보물 ‘도쿠사노칸다카라(十種神宝)‘에 깃든 회복의 힘이 구체화된 신이다. 이 보물들은 니기하야히 노미코토에게 내려진 것으로, 진콘사이(鎭魂祭)의 중심이기도 하다.
후쓰시미타마노오카미는 바람의 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가 가지고 있던 신 검 ‘아메노토쓰카노 쓰루기 검‘에 깃든 영력이 구체화된 신이다. 일본 고대 신화에는 스사노오가 어떻게 이 검으로 머리가 여덟 개인 뱀 야마타노오 로치를 물리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배례전(하이덴)
배례전에서는 1년에 한 번 진혼제를 비롯한 신토의 제사를 지낸다. 이 배례전은 시라카와 천황(1053~1129)의 명에 따라 1081년 교토의 황궁에서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이전되었다. 이전되기 전까지는 황궁의 신카덴(천황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으며 황실을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이 건물은 약 천 년 전에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이전된 이후 한 번도 큰 규모의 개보수 및 개축을 하지 않았다. 1945년에 이 건물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 규모의 배례전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현지에서 벌목한 노송나무의 껍질로 만들어졌다.
긴소쿠치(성역)
배례전 뒤쪽에 있는 이 출입금지 구역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자 후쓰노미타마 검이 안치된 곳이다. 이 신검은 후쓰노미타마의 신체(神體)이자 이소노카미 신궁의 중심이 되는 유물로, 이소노카미 신궁은 이 신을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역은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땅‘이라는 뜻인 ‘긴소쿠치‘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스진 천황이 기원전 91년경 후쓰노미타마 검의 봉헌을 명했다고 한다. 그 후 검은 후루카와 강 근처 이소노카미후루의 다카니와라고 불리는 곳에 묻혔다. 그리고 검의 위치를 나타 내는 표지로 나무를 심었다. 그 후 그 땅은 이소노카미 신궁의 긴소쿠치(성역)이 되었다.
약 2000년 후 간 마사모토(1824~1897)라는 신참 고위 신관이 이 성역에 흥미를 느껴, 정부에 고고학적 발굴 조사 허가를 신청했고, 1874년에 몇 가지 고대 유물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후쓰노미타마 검으로 추정되는 둥근 칼자루의 철검도 있었다. 1913년에 이 신검은 성역으로 옮겨져 지금도 그 장소에 안치되어 있다.
셋샤(경내 소규모 신사) 배례전
이 독특한 건물은 한때 거대했던 사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국보이자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불교의 급격한 쇠퇴를 나타내는 기념비적 건물이기도 하다. 이 배례전은 본래 이소노카미 신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우치야마에이큐지(内山永久寺)라는 유명한 사찰의 경내에 있던 건물이다. 우치야마에이큐지 절은 1100년대에 창건된 이래 수 세기 동안 규모를 키워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그러나 1868년 불교와 신도가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사찰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우치야마에이큐지 절을 비롯한 많은 사찰은 폐쇄되거나 해체되었다. 우치야마에이큐지의 유적은 사라졌고 부지는 황폐해졌으며 건물은 폐허가 되었다. 1890년 화재가 발생한 이후에는 이 작은 배례전만 남게 되었고, 1914년에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이전되었다.
건물 자체는 1137년 것으로 여겨지지만, 13세기와 14세기에 개축되었다. 이 배례전의 특징 은 건물을 반으로 나누는 봉당(흙이 깔린 통로)이다. 배례전의 구조를 보면 늘 이런 배치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왜 이렇게 나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현재 이 배례전은 이즈 모타케오노미코토의 셋샤(경내 소규모 신사)와 마주보고 있다. 이즈모타케오노미코토는 구사나기 검(일본 황실의 성스러운 유물 중 하나)에 깃들었다고 여겨지는 신이다.
누문
이 빛바랜 목조문은 셋샤(경내 소규모 신사) 배례전과 마찬가지로 1318년에 세워졌으며 과거 불교와 신토가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문은 불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누문으로, 큰 종을 달아 시간을 알려 승려들에게 식사와 기도에 부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문이 신사의 정중앙에 있다는 것은 신토와 불교가 같은 경내에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868년에 불교와 신토가 공식적으로 나뉘면서 종은 분리되어 팔렸다. 현재 종은 없지만, 이 누문은 ‘시캬쿠몬(四角門)’이라고 불리는 문의 좋은 예로, 처마 밑에는 2단 목조 까치발이 있으며 지붕에는 노송나무 판자로 만든 지붕널이 대어져 있다. 상층부의 목재판은 4개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를 합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나 언제나 새롭다‘라는 뜻이 된다. 이 한자는 과거 총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의 친필이다. 일본에서 아주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며 부흥과 재생의 장소인 이소노카미 신궁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도리이(鳥居)
7m 높이의 이 도리이는 1926년에 즉위한 쇼와 천황을 기념하며 1928년에 세워졌다. 도리이에 달린 편액(문패)에는 이 신사의 3주신 중 하나인 후쓰노미타마노 오카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도리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동굴에서 나오지 않자 많은 신들이 세상에 빛을 되돌리기 위해 닭들을 모아 울게 했는데 그때 닭들이 앉은 화(나무 막대)가 최초의 도리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를 뒷받침하듯 도리이는 ‘새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성한 닭
이소노카미 신궁에서는 경내의 고요함이 수탉의 울음소리로 깨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신궁에는 20~50마리의 닭이 살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1980년대에 처음으로 닭 몇 마리가 기증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신궁에는 정기적으로 닭이 기증되어 수탉과 암탉이 늘어나고 있다. 닭은 미에현의 이세 신궁을 비롯해 다른 신사에서도 사육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닭은 오랫동안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와 수호신의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믿음은 6세기 중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어떤 지역에서는 벽사를 위해 흔히 문이나 출입구에 닭 그림을 붙였다고 한다.
전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수탉은 동틀 녘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동물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일본의 건국 신화에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를 은둔처에서 불러내어 세상에 빛을 되돌리기 위해 많은 신들이 수탉을 모아 울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내에는 다양한 품종의 닭이 나무 그늘 아래서 벌레를 잡아먹으며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 그중에는 길게 울도록 품종 개량된 ‘장명계‘라는 품종도 있다.
2. 역사적 배경
선사시대 애니미즘적인 일본 고유의 경향은 이후 일본 철학적 사유의 보편적 바탕이 되었다. 고대 일본인들은 세상만물이 경이로는 ‘다마(魂)’ 혹은 ‘영적인 힘’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에서의 특정한 사물이든, 특별한 사람이든, 귀신이든, 혹은 신성한 존재든, 그러한 혼이 특히 두드러지는 곳을 가리켜 ‘가미(神)’라 하였고, 이 가미를 제의, 예술, 건축적 양식을 통하여 경배하였다. 심지어 내뱉는 말조차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신비한 힘-‘고토다마(言靈)’라고 하는–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渡來人)들이나 무역상인들을 통해 건너온 중국의 고전(당시 유교전통에서 경전으로 받들어졌던 문헌들)을 읽음으로써 한자를 받아들였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일본인들은 처음엔 불교가 공헌하는 문화적이고 제의적인 발전상에 주로 매료되었고, 한자로 쓰여진 불교 경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귀족과 승려 사이에 지적인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7세기 초반 10~20년 사이에는 충분히 성숙하여 조정은 관료들의 국정을 위한 ‘헌법’을 제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일본은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들어 황실의 권력이 명확해지고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함에 따라 사회적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전에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터부 때문에 천황이나 황후가 죽을 때마다 왕궁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수도를 나라에 건설하게 된다. 당(唐)의 장안(長安)을 본 딴 수도 건설은 불교사원 안의 커뮤니티의 수적 증가를 야기했는데, 이들 커뮤니티는 승가적 수행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방대한 중국의 불교문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술아카데미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지식인들은 불교 용어에 대한 정교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불교 철학적 체계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나라시대에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두 권의 중요한 역사문헌이 편찬되었다. 이 문헌들은 창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부터의 궁정 행사와 사건들을 매우 자세히 서술하기에 이른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창조신화와 함께 황실이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손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성문화한 만큼 이들 두 문헌은 결국 천황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도(神道) 논리의 이념적인 토대가 되었다.
요컨대, 쇼토쿠 태자의 『십칠조헌법』 이후 7세기에서 8세기까지는 사상적 발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배움의 장, 특히 수도인 나라의 불교 연구의 중심 시설들은 창조적인 사상을 위해 원전 자료들을 습득하면서, 이후 9세기 초반 구카이(空海, 774~835), 사이초(最澄, 767~822)를 통해 일본 불교 사상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될 때까지 그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784년에 간무 천황은 수도를 야마시로국의 나가오카쿄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794년에는 또다시 헤이안쿄로 이전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 794~1185)가 시작되었다. 나라의 사원들은 정치적인 수도를 옮긴 후에도 강력한 힘을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나라는 헤이조쿄의 남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난토(南都)로 불렸다. 이 시기는 중국의 문화적, 철학적, 종교적 전통 들을 일본 고유의 문화적 표현에 동화시키고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후대의 대다수 일본사상가들은 헤이안 시대를 일본의 독창적인 지적, 미학적 활동이 꽃피웠던 시대로 회상하게 된다. 조정과 정부의 제도나 불교사원과 승가제도 등은 여전히 중국적 양식의 큰 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상가들은 일본의 토착적인 감성에 조화를 이루는 관념과 가치들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의 혁신, 가령 이전 세대에서 무시되었던 고대 애니미즘적인 요소들의 의식적인 복원과 같은 노력에 보다 관대해지고 있었다.
헤이안시대의 불교도들은 당시 가미 숭배로 특징적인 일본 고유의 애니미즘적인 신앙, 즉 나중에 결국 신도의 핵심적 요소로 발전하게 되는 전통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애니미즘적인 경향이 아직도 자연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반면, 거기에는 뚜렷하게 신도(神道)라고 칭할 만한 교학과 지적인 발전이 결여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의 진언과 천태는 주로 밀교적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애니미즘적인 정서나 가미 관련 제의들을 심오한 불교적 진실상의 표면적 현현이라는 이해와 함께 상당부분 포용했다. 이로써 17세기 혹은 18세기까지 지속된 불교와 신도 간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 동안 신도의 사상도 어렴풋하게나마, 불교적 분석에 기대어 그것을 신도식으로 변형시키면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3. 기행문(이야기의 힘)
이소노카미 신궁은 일본의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그 역사가 아주 깊은 곳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신사는 다양하고 많은 신들(돌, 자연, 바다, 항해, 어업, 무기, 건강, 장수 등)이 모신다고 전해지며, 그만큼 여러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이런 신화와 이야기들을 공부하고 가서였을까, 다른 신사나 절들에 비해 소박하고 조용했지만 이곳에는 뭔가 숙연하고 유구한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은 ‘칠지도’가 발견 보관된 곳으로 혹시라도 그 진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얽힌 이야기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일본의 기원을 상징하는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이 나라를 진정시키는 데 사용한 검이 모셔져 있다고 전해졌다. 일본의 신화 속에서 이 신비한 힘을 지닌 이 검은 신화 속 인물인 다카쿠라지가 준 것으로, 진무 천황의 일행을 부활하게 하고 도적들을 흩어지게 했다고 한다. 진무 천황이 실재했던 인물인지, 이 검이 실재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단지 신화 속의 인물과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신사는 이 검에 깃든 신을 모신다.
이 외에도 이곳은 진무 천황의 건국 당시 큰 공로를 세웠던 모노노베 가문의 신사이기도 하다. 허남린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과거 일본은 가문마다 소속된 신사가 꼭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에서 신사의 역사는 길고 그 의미는 중요한 것 같다. 모노노베 가문의 먼 조상인 니기하야 히노코토는 천상에서 내려왔을 때, 천진의 신으로부터 ‘하늘의 열 가지 보물’을 하사받았다. ‘십종신보(十種神寶)’라고도 불리는 보물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秀武) 천황과 황후의 성스러운 생명의 장수를 기원할 때 이 보물을 사용하여 진혼제를 거행했다고 한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이 열 개의 보물에 깃든 신을 모시며, 지금도 11월 22일 밤에는 ‘진혼제 축제’가 거행된다.
일본 신화 속의 신인 스사노오와 관련된 검에 깃든 신도 이곳에서 모셔져 있다고 한다. 스사노오는 바다와 폭풍을 다스리는 일본 신화 속의 신으로 태양을 다스리는 아마테라스, 달을 다스리는 츠쿠요미와 함께 일본 신화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신이다. 스사노오는 천계에서 말썽을 부려 이즈모로 쫓겨난다. 스사노오가 이즈모 땅에 도착했을 때, 한 노부부가 애도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 보니, “매년 하치마타의 대뱀이 나타나 딸들을 차례차례 잡아먹고, 마지막 남은 이나다 공주도 곧 잡아먹힌다“고 했다. 스사노오는 용감하게 하치마타의 대뱀을 물리치고 이나다 공주와 행복하게 연합했다. 이때 뱀을 쓰러뜨린 검은 천십악검(天十握剣)으로, 나중에 이시가미 신궁에 모셔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와 그곳에 모셔진 여러 신들을 보면서,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힘과 그 장소에 깃드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 전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와 관련된 검이나 보물이 묻혀 있다고 여겨질 때, 이 신사는 지금처럼 건물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저 그렇다고 전해지는 곳을 찾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빌다가, 이곳에 신사가 세워지고 건물들이 옮겨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 연유에는 일본 건국과 관련된 신화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의 일본 건국 신화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나지만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 것에 비해, 이소노카미 신궁의 규모나 그 모습은 소박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신사 내의 몇몇 건물이나 문도 오래된 느낌이 들고 고요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품은 곳에 들어서면 내가 그곳에 깃든 이야기나 시간성을 알고 있지 않더라도, 그 유구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수령이 오래된 나무 앞에서 느껴지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눈에 보이지도 현대의 과학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기운이 있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그 시간성, 시간이 중첩되어 쌓여 있는 어떤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참고자료] 위키백과, 「이소노카미 신궁」(Japan Tourism Agency),
이소노카미 신궁 공식 홈페이지(https://web.archive.org/web/20160301021240/http://www.isonokami.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