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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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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답사- 답사지 소개 및 역사] 교토

작성자
기헌
작성일
2025-06-07 22:58
조회
15

목차

1. 교토


2. 역사 시대

1)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2) 가마쿠라(鎌倉, 1185~1333)/무로마치(室町, 1336~1568)/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1568~1603) 시대

3) 에도시대(江戸時代) 혹은 도쿠가와시대(徳川時代, 1603~1868)


3. 답사지 소개

1)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 延暦寺)

2) 철학의 길(哲学)

3) 노무라 미술관(野村美術館)

4) 교토 남선사(南禅寺)

5) 교토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

 

 



1. 교토시(京都市)

교토시는 일본 간사이 지방 교토부의 남중부에 위치한 교토부청 소재지이자 교토부 최대 도시로, ‘천년고도(千年古都)’라 불리며 일본 문화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교토는 794년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806))이 불교 세력의 정치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1868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무려 1,075년간 일본의 수도였고,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는 오늘날까지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금각사(金閣寺), 은각사(銀閣寺), 기요미즈데라(清水寺) 등 수많은 사찰과 신사에 남아 있다. 과거 황실과 귀족 문화의 중심지였던 만큼 유젠 염색·가가미유리 같은 전통 공예가 발전했으며, 교토대·리쓰메이칸대 등 유수의 대학이 자리해 학문·예술·종교가 융합된 일본 문화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교토는 동쪽의 히에이산(比叡山히가시야마(東山山地), 서쪽의 아라시야마(嵐山), 북쪽의 기타야마(北山)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어,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가 찾아온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가모가와(鴨川)와 철학의 길(哲学), 아라시야마 대나무 숲 등 사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자연 명소가 많아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교토 도심의 거리 배치는 794년 헤이안쿄 천도 때 당나라 장안(長安) 시가지의 동서·남북 격자형(장방형) 체계를 본떠 도입한 것으로, 이후에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덕분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지대임에도 길 찾기가 비교적 쉽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 구획의 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2. 역사 시대

 1)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헤이안 전기에는 이전의 나라 시대 중앙집권적 율령 정치를 기본으로 계승하면서도 일부 제도를 수정하였다. 그러나 율령제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자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정부는 개인별 지배 체제를 폐기하고 토지 과세 체제로 대전환을 단행했다. 이 전환 과정에서 민간의 유력자에게 지방 통치 권한을 위임하고, 현지에 파견된 국사(國司·수령)가 이를 총괄하게 하여 새로운 지배 구조를 세웠는데, 이를 왕조국가 체제(王朝国家体制)’라고 부른다.

왕조국가 체제 아래에서는 국가로부터 토지 경영과 백성 지배 권한을 위임받은 다토(田堵묘슈(名主) 등의 유력 민층이 성장했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경찰권을 부여받은 무사 계층도 함께 부상했다. 권한 위임을 통해 중앙의 부담이 줄자 정치가 안정되었고, 관직은 가업에 따라 세습되며 셋칸케(摂関家) 가문 중심의 셋칸 정치가 전개되었다. 중류 귀족은 중앙에서는 전문 행정을, 지방에서는 수령으로서 통치를 담당했다. 한편, 특정 권문이 징세권을 독점하는 장원(荘園, 귀족의 사유지)이 점차 확대되며, 공령(公領, 국가의 공적 영지)과 함께 이중적인 토지 지배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제도는 점차 장원이 확대되고 국가의 직접 통제력이 약화되어 무사 정권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일본 중세 정치 구조 형성에 기여했다.

12세기에는 귀족 간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늘면서 무사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고, 이를 배경으로 다이라씨 정권이 등장했으나, 사회적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 빠르게 붕괴되었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내란을 수습하며 동북 지역을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천황과 쇼군의 이중적 권력 구조를 가진 무사정권 시대가 열리고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헤이안 시대는 교토로 수도를 옮기며 중앙집권이 강화된 동시에 중국에서 유입된 문화를 일본 고유의 감성과 결합해 독자적인 문화와 사상이 꽃핀 시기였다. 불교는 특히 구카이(空海, 774~835)의 진언종(真言宗)과 사이초(最澄, 767~822)의 천태종(天台宗)을 중심으로 철학적 깊이를 더했고, 두 종파는 다양한 불교 교리를 분류하고 해석하며 자신들만의 종합적 체계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유교·도교적 요소도 일부 흡수되었고, 두 종파 모두 다른 전통을 부정하기보다 포괄적인 틀 안에 수용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밀교의 영향을 받아 신체와 마음을 아우르는 수행, ‘지금 이 몸 그대로깨달음을 얻는다는 관점이 강조되었고, 천태와 진언은 수행과 교학의 통합을 중시했다. 동시에 일본 고유의 애니미즘 신앙(가미 사상)과도 융합이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불교는 자연 숭배 전통을 포용하고 신도와의 공존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이처럼 헤이안 시대는 일본 사유 전통의 토대가 마련된 중요한 전환기였다.

 

2) 가마쿠라(鎌倉, 1185~1333) · 무로마치(室町, 1336~1568) ·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1568~1603) 시대

일본의 중세는 무사(사무라이)가 정치와 군사 권력을 장악한 시기로, 중앙 귀족 중심의 헤이안 시대와 구별된다. 가마쿠라 막부는 무사 정권을 처음으로 수립하여 무사 계급이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교토를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했으나 지방 다이묘들의 세력 다툼이 심화되며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전국시대 말기로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가 일본 통일을 추진하며 전통적인 봉건 사회가 재편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일본 사회는 경제와 무역이 급속히 성장해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문화적으로는 웅장한 성곽 건축과 다도, 꽃꽂이 등 무사 문화와 예술이 융합된 독특한 미적 감각이 꽃피웠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일본 통일의 완성과 에도 시대 개막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였다.

가마쿠라 시대는 헤이안 시대 말 왕실과 불교 학승 공동체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불교 사상과 수행의 중심이 크게 변화한 시기였다. 이 시기 불교는 교육받은 상류층과 일반 대중이라는 두 계층을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전통을 발전시켰다. 사회는 말법(末法)’이라 불리는 불교의 타락한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인식이 퍼졌고, 이는 기존의 복잡하고 엄격한 수행법 대신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단일 수행법의 등장을 촉진했다. 정토종, 선종, 일련종과 같은 신불교 종파들은 각각 자신의 수행법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진정한 길임을 주장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염불, 좌선을 통한 명상, 법화경의 신앙 등을 중심으로 수행법을 단순화했다. 이 변화는 불교 수행의 대중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깨달음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깨달음이 무엇을 행함으로써얻어지는지, 혹은 무엇을 그만둠으로써얻어지는지, 깨달음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인지아니면 원래부터 내재된 본각(本覺)을 인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당시 불교 사상가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가마쿠라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신란(親鸞, 1173~1263)과 도겐(道元, 1200~1253)은 각기 다른 수행법과 깨달음 이해를 보여준다. 신란은 정토종의 수행법을 대표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수행이 신심을 일깨우고 이 신심이 진실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의지적 수행과 무의지 수행 사이의 균형, 즉 인간의 의지와 믿음이 어떻게 대승불교적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는지 탐구했다. 반면 도겐은 선종의 좌선을 유일한 깨달음의 방법으로 보았다. 그는 좌선으로 달성할 수 있는 정신적 상태가 보편적 대승불교 수행법과 깨달음 목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깊이 고찰하며, 좌선이 가진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수행 효과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 이처럼 가마쿠라 시대 불교는 단일 수행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깨달음의 본질과 수행의 의미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들이 공존하며 복잡한 철학적 논쟁을 낳았고, 이는 중세 일본 불교 사상의 풍부한 다양성과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3) 에도시대(江戸時代) 혹은 도쿠가와시대(徳川時代, 1603~1868)

에도시대(1603~1868)는 도쿠가와 막부의 수립으로 일본에 오랜 평화가 정착된 시기로,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철저히 제한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막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쇼군은 교육제도에서부터 상업, 종교제도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 전반을 전례 없는 감시·감독 체제로 통치하였다. 평화에 대한 부담은 역설적으로 전국적인 교역의 증가와 상업활동의 중심으로서 도시의 성장을 가져왔으며, 특히 에도(지금의 도쿄), 오사카, 교토 등은 문화와 지성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신흥 상인 계층의 성장과 함께 교육의 필요성도 대두되어 도시의 세속적인 학교들이 철학적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중국의 신유학, 특히 주희와 왕양명의 사상이 유입되며 도덕과 자연, 인간 심리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문제의식이 형성되었다. ‘()’()’의 관계와 같은 형이상학적 논의는 일본 지식인들에게 사유의 틀과 언어를 제공했고, 가이바라 에키켄 같은 사상가는 이를 일본적 맥락에서 재해석했다. 이와는 별개로, 신란의 가르침을 계승한 정토진종(浄土真宗)의 혼간지(本願寺)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는 평등한 구원의 길을 강조하며, 지역 공동체 내에서 종교적 실천과 윤리적 삶을 함께 이끄는 생활철학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16세기 이후,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에 서양 과학이 소개되면서 난학(蘭学, 네덜란드 학문)’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현상에 대한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탐구가 활발해졌다. 예컨대 상인 출신 사상가인 야마가타 반토(山片 蟠桃)나 미우라 바이엔(三浦 梅園)은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으며, 수학자나 의사들도 서양의 영향을 받아 일정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당시 일본의 지적 관심은 여전히 과학보다는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적 조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와 오규 소라이(荻生 徂徠)와 같은 유학자들은 유교 경전 속 용어의 원래 의미를 되짚으며, 올바른 언어 사용을 통해 사회 윤리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방법론은 국학(國學)’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고대 일본 문헌을 바탕으로 일본 고유의 철학과 민족적 정체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한편, 혼간지로 대표되는 정토진종 불교 전통은 신란의 가르침을 따라 일상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공동체 윤리를 유지하는 생활 속 철학을 강조했다. 이처럼 유학, 국학, 불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 삶의 의미와 사회적 질서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며, 근대 일본 사상의 기반을 형성해갔다.

  

 

3. 답사지 소개

1)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 延暦寺) : 시가현 오쓰시 사카모토 혼마치 4220

히에이산(比叡山)은 시가현과 교토부의 경계에 우뚝 솟은 산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고 웅장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약 16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최고봉은 해발 848m에 달한다. 이 최고봉을 중심으로 사찰의 경내가 약 100km²에 걸쳐 펼쳐져 있어, 말 그대로 산 전체가 하나의 사찰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히에이산은 일본 불교의 어머니 산(日本仏教母山)’이라 불리며, 산자락 곳곳에는 불교 사찰, , 암자, 수행처, 순례길이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다.

히에이산에 자리한 엔랴쿠지(延暦寺)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으로, 고승 사이초(最澄)에 의해 788년에 창건되었다. 이곳은 일본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법연(法然), 신란(親鸞),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등 일본 불교 각 종파의 창시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엔랴쿠지는 일본 불교의 뿌리이자 수많은 불교 사상의 원류가 된 수행처인 셈이다.

사찰 경내는 약 1,700헥타르에 이르며, 100여 채가 넘는 크고 작은 불전과 건축물이 산속 곳곳에 흩어져 있다. 전체 구역은 크게 동탑(東塔)’, ‘서탑(西塔)’, ‘요카와(横川)’라는 세 주요 구역으로 나뉘며, 각 구역에는 중심 법당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탑 구역에 위치한 콘폰추도(根本中堂)’는 엔랴쿠지의 중심이 되는 본당으로, 천태종의 신앙 중심지로서 높은 위상을 지닌다.

현재 엔랴쿠지의 많은 건축물과 유물은 일본의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히에이산과 엔랴쿠지는 자연과 신앙, 역사와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일본 불교의 성지로, 지금도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대강당(大講堂)

대강당은 엔랴쿠지에서 승려들이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수행하며 강론을 펼치는 중심 공간으로, 천태종의 교학 전통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원래는 824, 엔랴쿠지를 창건한 사이초의 뜻을 계승한 제자들이 건립하였으며, 화재와 전란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해 왔다. 현재의 건물은 1963년에 복원된 목조건축물로, 전통적인 일본 사찰 건축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강당 내부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본존불로 모셔져 있으며, 이 밖에도 일본 불교 여러 종파의 창시자인 법연(法然), 신란(親鸞),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등의 존상(坐像)이 안치되어 있어, 엔랴쿠지가 일본 불교의 공동 발원지임을 상징한다. 또한,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불과 더불어 천태종과 관련된 고승들의 초상화(祖師像)도 함께 봉안되어 있어, 이곳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일본 불교 전체의 뿌리를 기리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대강당은 오늘날에도 법회, 강의, 의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엔랴쿠지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불교 수행의 전통과 정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콘폰추도(根本中堂)

콘폰추도(根本中堂)는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정신적 중심이자 상징적인 본당으로, 사찰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엔랴쿠 7(788),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가 엔랴쿠지를 창건하면서 처음 세운 것으로, 이후 수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42년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후원으로 재건된 것으로,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콘폰추도 내부에는 사이초가 직접 봉헌한 약사여래(薬師如来)가 본존불로 모셔져 있으며, 이 여래불은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자비의 부처로 신앙되고 있다. 약사여래 앞에는 엔랴쿠지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 중 하나인 불멸의 법등(不滅法燈)’이 타오르고 있다. 등불은 사이초의 서원(誓願)에 따라 1200년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밝혀져 왔으며, 지금도 매일 아침 승려들이 직접 등유를 보충하며 지키고 있다. 이 불은 현세가 말법(末法)의 시대로 접어들지라도, 미래에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는 그날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이라 전해진다. 따라서 콘폰추도는 단순한 법당을 넘어, 일본 불교의 신앙적 정체성과 불멸의 수행 정신이 깃든 장소로 숭배받고 있다.

현재 콘폰추도는 노후화된 기와 지붕을 교체하고 내부 목조 구조를 보강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비와(檜皮) 지붕의 방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전통 기법과 현대적 보존 기술을 접목하여 수리를 시행하고 있으며, 공사 기간 동안에도 법당 내부에는 출입을 허용해 불교 수행과 참배가 계속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2) 철학의 길(哲学)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조도지이시바시냐쿠오지바시

철학의 길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책길로, 난젠지(南禅寺) 근처에서 시작해 긴카쿠지(銀閣寺)까지 약 2km에 걸쳐 이어진다. 비와호 수로(琵琶湖疏水)를 따라 조성된 이 길은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 사계절 내내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수로 옆으로는 정갈한 길이 이어지고, 양옆에는 아기자기한 찻집, 전통 상점, 갤러리 등이 늘어서 있어 교토 특유의 정취를 더해준다.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은 일본 근대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郎)에서 유래했다. 그는 교토대학에 재직하던 시절 이 길을 따라 매일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다고 전해지며, 그의 철학이 길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이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 길을 사랑하며, 지금은 교토의 정신문화와 예술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책길 남쪽에는 웅장한 삼문(三門)과 고요한 정원이 아름다운 난젠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에이칸도(永観堂), 한적한 선종 사찰 호넨인(法然院)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 끝에는 은각사로 널리 알려진 긴카쿠지가 있어, 산책의 여정을 더욱 뜻깊게 마무리할 수 있다.

철학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교토의 자연과 전통, 불교 정신이 어우러진 깊은 정서를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길을 걷는 내내 계절의 숨결과 사색의 여운이 깃들어 있어, 발걸음마다 고요한 감동이 다가온다.

 

3) 노무라 미술관(野村美術館)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 시모카와라초 61

노무라 미술관은 1984년 일본의 금융 재벌이자 노무라 증권 창립자인 노무라 토쿠시치 2(野村徳七)의 예술품 컬렉션을 바탕으로 개관하였다. 이 미술관은 일본 전통문화의 미()를 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1,700점에 달하는 유물과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소장품은 다도구(茶道具), 노가면과 노의상(能面能装束), 회화, 서예, 불교 미술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7점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9점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세손 슈케이(雪村周継)폭풍우, 삼십육가선도(三十六歌仙絵巻)등 일본 미술사에 큰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 건물은 전통적인 스키야(数寄屋) 양식을 기반으로 지어졌으며, 실내에는 정갈한 다실이 마련되어 있어 일본 다도문화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미술관을 둘러싼 정원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예술 감상과 더불어 교토 특유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4) 남선사(南禅寺)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후쿠치초

남선사(南禅寺)는 교토 히가시야마(東山) 언덕 기슭에 위치한 대표적인 선종(禪宗) 사찰로, 일본 선종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사찰은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역사와 문화, 정원이 조화를 이루는 교토의 상징적인 명소다.

남선사의 기원은 13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64년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 1249~1305)은 이곳에 자신의 별궁을 세우고, 정치적 압력으로 퇴위한 뒤 아들과 함께 은둔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그는 세속의 권력을 내려놓고 1289년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선종 승려인 무신 다이민 고쿠시(無関大明 国師)의 제자가 되었다. 깊은 신앙과 수행의 뜻을 품은 가메야마 천황은 1291, 자신의 궁전과 부지를 희사하여 대규모의 선종 사찰 건립을 시작했고 이로써 남선사가 창건되었다.

사찰의 경내에는 1890년부터 차례로 지어진 12개의 탑두(塔頭, 하위 사찰)가 그늘진 숲과 비와호 수로(琵琶湖疏水)를 따라 늘어서 있다. 특히 경내를 가로지르는 수로각(水路閣)은 고풍스러운 벽돌 아치 형태의 수로교로, 일본 전통 사찰 경관 안에 서양식 구조물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삼문(三門)

난젠지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정문은 삼문(三門)’이라 불린다. 삼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지나야 할 세 가지 관문, 즉 공(),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의미하는 삼해탈문(三解脱門)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영적인 입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삼문은 1628, 에도 시대 초기 도도 타카토라(藤堂高虎)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 높이 약 22미터에 2층 누각 구조를 갖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다. 도도는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에서 전사한 무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문을 헌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삼문은 위령의 의미 또한 함께 지니게 되었다.

이 삼문은 텐카류몬(天下竜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용문을 통과한 자가 용이 된다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이 문을 오르면 한층 더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2층 누각에 오르면 교토 시내와 히가시야마의 산세가 한눈에 펼쳐지며, 선종 사찰 특유의 경건하면서도 개방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5)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 :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 가라스마도리

히가시 혼간지는 정토진종 오타니파(真宗大谷派)의 본산으로, 정식 명칭은 진종 본묘(真宗本廟)”이다. 1602, 에도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존 혼간지(本願寺)’ 세력을 분할하여, 히가시 혼간지(동본원사)와 니시 혼간지(서본원사)로 나누면서 설립되었다.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658년부터이며, 이후로 정토진종의 중심 사찰로서 그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은 정토진종의 창시자인 신란(親鸞, 1173~1263)의 유골이 봉안된 영묘(御影堂)를 중심으로 신앙과 의례가 이루어진다. 신란이 입적한 뒤 그의 유골은 1272년 교토 히가시야마의 오토코야마(男山) 근처에 처음 안치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이장을 거쳐 지금의 히가시 혼간지 경내로 이관되었다. 이 영묘는 신도들에게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신란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정신적 중심지이자 순례의 성지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참배와 기도를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이 사찰은 웅대한 목조건축물로도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미에이도(御影堂)는 세계 최대급 규모의 나무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거대한 건물을 건축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재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특히 무거운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된 특별한 머리카락 밧줄(毛綱)’이 유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건축 현장에서 일반 밧줄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끊어지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지켜본 여성 신도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바치며 밧줄을 엮었다고 한다. 이 머리카락 밧줄은 신도들의 헌신과 신앙심을 상징하는 유물로서 지금도 경내에 전시되어 있으며, 히가시 혼간지의 정신적 유산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물은 단순한 공사 도구가 아니라, 신심(信心)이 만들어낸 공동체적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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