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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사상답사] DAY2 신앙과 길(단조가란에서 긴푸센지까지)
일본철학사상 답사기/25.6.12/오켜니
DAY 2 신앙과 길 (단조가란에서 긴푸센지까지)
1. 1,200년간을 이어온 순례길(초이시미치 입구)
답사 첫날 우리는 고야산 입구 지손인(慈尊院)에서 이루어진 모자(구카이 스님774~835년과 그의 어머니) 상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헤이안 시대 때 여성은 사찰 구역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들을 보러 갈 수 없었던 구카이 스님의 어머니는 지손인이 세워진 곳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지손인과 이어진 높은 계단을 오르면 니우칸쇼부 신사((丹生官省符神社)가 나오고 거기에 고야산(高野山)의 입구가 있다.
고야산은 산의 이름이 아니고 와카야마현 북부 이토군 고야초에 있는 1,0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800m에 있는 고원 지역을 말한다. 고야산은 1,20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 불교 진언종의 성지를 품은 지역으로 현재 117개의 사찰이 위치한다. 고야산은 밀교 진언종을 주창한 구카이 스님이 단조가란(壇上伽藍)을 세운 곳이다. ‘단조’는 밀교의 부처님을 모신 제단을 뜻하고, ‘가란’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절을 의미한다.
기이산지의 신성한 장소를 연결하는 순례길은 24㎞의 초이시미치(町石道)를 비롯하여 구마노–산케이미치–고헤치, 오미네 오쿠가케미치 등 모두 300여㎞에 이른다. 이들 순례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초이시미치(구도야마~고야산 곤고부지)이다. 초이시미치는 그 이름처럼 180개의 표석이 서 있는 순례길이다. 산 아랫마을 구도야마의 지손인(해발 100m)에서 고야산(해발 800m)의 곤구부지(金剛峯寺)까지 109m마다 서 있는 180개의 표석(標石)이 유명하다. 표석은 구카이 스님 때부터 마을에서 산으로 가는 순례길을 표시하도록 꽂아둔 나무표지에서 유래되었지만, 지금부터 900여년 전부터 돌로 만든 표석으로 서서히 교체됐고, 그 표석들이 문화경관으로 자리 잡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어제 키타가와 히로시 선생님(사나다 박물관 명예관장)께서 구도야마에 위치한 초이시미치 순례길의 초입에 우리를 데려가 주셨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는 109m마다 숫자가 적힌 표석이 서 있었는데 180에서 시작한 표석의 번호는 고야산에 가까워질수록 숫자가 하나씩 작아진다. 스페인의 산티아고길만을 알고 있었는데 가까운 일본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순례길이 있다 는 사실이 신기했다. 지금은 자동차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고야산에 오르지만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은 이 길을 따라 수없이 산에 오르며 수행을 하고 고야산 지역에 사찰을 지으면서 이 지역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많은 시간과 의미가 담긴 순례길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 성스러운 느낌이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삿갓을 쓰고 흰 옷을 입은 오헨로 순례자들이 구카이 스님을 의미하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구카이 스님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만큼 신격화된 스님이 계셨던가? 천 년 이상을 이어온 구카이 스님의 염력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구카이 스님 때부터 1,200년간 이어온 순례길, 하지만 스님의 어머니여도 여성은 갈 수 없던 길의 초입에서 고야산의 일본 밀교 성지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져 갔다. 고야산 근처 기노카와시에 있는 호텔에서 잠을 청한 우리는 답사 둘째 날 드디어 고야산으로 향했다.
2. 붉은 색의 강렬한 곤폰다이토, 구카이 스님이 던진 산쇼코(단조가란壇上伽藍)
우리가 고야산에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단조가란이었다. 단조가란은 곤도(金堂), 곤폰다이토(根本大塔), 동탑, 서탑, 종루, 경정 등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신앙적 구역을 이르는 말이다. 구카이 스님이 가장 먼저 세운 것이 곤도였고, 곤도에는 병을 치유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이곳 곤도에서는 고야산 진언종의 주요 의식이 치러진다. 단조가란의 양쪽 끝에는 서탑과 동탑이 서 있고 그 중간에는 곤폰 다이토가 위치해 있다.
단조가란의 중심에는 50m 높이의 붉은 색 탑인 곤폰다이토가 있다. 내부에는 대일(大日)여래를 중심으로 5분의 부처님과 16분의 보살이 모셔져 있다. 곤폰다이토는 밀교 수행자들이 불보살들에게 진언을 외우면서 기도하고 성불을 위해 수행하는 장소이다. 화재로 인해 1937년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는데 1층은 사각형, 2층은 원형의 형태로 땅과 하늘을 포함한 우주의 만다라 세계를 상징한다. 곤폰다이토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중앙에는 금불상인 대일여래가 모셔져 있었고 대일여래 주변에 큰 기둥을 세워서 그 기둥에 부처와 불보살을 그려놓은 것이 특징적이었다.
곤도와 곤폰다이토 중간에 ‘산코노마쓰(三鈷노の松)’라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구카이 스님께서 당나라 유학시절에 일본의 수행처를 물색하고자 산코쇼(三鈷杵, 세 개의 발을 가진 절굿공이)를 던졌고 산코쇼가 이 소나무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소나무 잎은 원래 두 개로 갈라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산코쇼의 영향으로 세 개로 갈라진 소나무 잎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열심히 땅에 고개를 숙이고 행운의 클로버를 찾듯이 찾았다. 시간이 부족해서인지 아무도 찾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에서 한번 찾아보고 싶었다.
3. 아름다운 장벽화와 피비린내 나는 역사 이야기(곤고부지金剛峯寺)
단조가란을 떠나 곤고부지(金剛峰寺)로 향했다. 단조가란이 신앙의 구역이라면 곤고부지는 고야산 승려들의 생활과 수행 구역이다. 답사를 떠나기 전에 자료조사를 하면서 목조건물인 곤고부지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고자 지붕에는 물통이, 건물 양쪽에 사다리가 놓여진 곤고부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곤고부지는 고야산 117개 사찰의 중심이자 일본 3,600여개 밀교 진언종 사찰의 총본산이다. 곤고부지 건물은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세운 절 세이간지(靑巖寺)가 시초가 되어 1861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일본의 사찰은 회랑을 사이에 두고 방에는 아름답고 우아한 장벽화가, 마당에는 정원이 있는 구조가 일반적인데 곤고부지 또한 그러하다.
입장료를 내고 곤고부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곤고부지의 내당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칸마다 역사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그림의 장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먼저 대광칸(大廣間) 내 지부츠노마(持佛間)에는 곤고부지의 본조인 비불 ‘구카이 대사 좌상’과 양측에 역대 천황,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역대 주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류로도(柳鷺圖, 버드나무와 새가 그려진 장벽화)가 있는 야나기노마(柳の間)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자살한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누나의 아들로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입적이 돼 관백의 자리까지 물려 받았던 히데쓰구는 히데요시가 58세에 친자 쓰루마쓰마루를 출산함으로 후계자 갈등 속에서 이곳에서 자결하였다.
곤고부지의 반류테이(蟠龍庭)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조 정원이다. 정원에 놓인 돌들은 아직 승천하지 못한 반룡이라고 한다. 140개의 화강암을 배열하여 구름에서 나오는 두 마리 용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매일 바닥에 새롭게 그리는 모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반류테이는 일본 정원의 대표적인 양식인 가레산스이(枯山水庭園)이고 물을 사용하지 않고 모래와 돌과 이끼를 가지고 정원을 구성한다.
4. 자연과 인간과 역사가 함께 만든 풍경(오쿠노인奥の院)
고야산에는 오쿠노인이라는 공동묘지가 있다. 오쿠노인은 ‘별당, 별원’이라는 뜻이다. 일본 절은 가장 귀중한 것을 본당이 아닌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별당에 모셔놓는다고 한다. 이곳은 구카이 스님의 사당을 중심으로 1200년간 조성된 약 20만기의 묘소가 있다. 약 2km의 빽빽한 삼나무 숲에 위치한 큰 규모의 묘지이다. 오쿠노인에는 황실, 구게, 다이묘뿐만 아니라 현대 재벌가 가문의 묘지도 있다. 오쿠노인은 공동묘지이며 동시에 역사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 이다. 오쿠노인은 죽어서도 구카이 스님과 함께 하겠다는 일본 불자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일본의 불자들은 오쿠노인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오쿠노인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고뵤(御조, 위인의 영혼을 모시는 궁)에는 구카이가 지금도 그곳에 살며 세상의 평화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명상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두 차례 구카이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오쿠노인을 보면서 일본의 묘지 문화가 궁금해졌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죽으면 절에 가서 장례를 치른다. 일본의 주택가나 절 근처에서 석탑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공동묘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일본 각지에서 보이는 석탑묘(石塔墓)가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에도시대(1603-1867년) 중기이다. 이때 확립된 사청제도(寺請制度)는 일반 서민들이 사원에 단가(檀家), 즉 신도로 등록하여 사적(寺籍)이 곧 호적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되는 제도이다. 이에 따라 모든 일본인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람이 죽으면 절에서 장례를 하고 묘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일본불교를 장식불교(葬式佛敎)라고 이름하게 되었으며, 절을 하까(墓)라고 할 정도로 절은 죽어서 쉴 수 있는 처소로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의 장례문화와 달리 일본의 공동묘지는 절 근처나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공동묘지에 대한 혐오나 배타적인 마음이 없고 조상이나 죽은 가족을 가까이에서 보살필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오쿠노인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비석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며 그 주변을 삼나무가 장식하고 있다. 일본의 삼나무는 목재로 많이 쓰이는데 두께가 굵고 키가 크다. 삼나무숲과 비석의 조화가 아름다웠고 비석에 낀 이끼가 세월의 오랜 흔적을 말해주었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석조 스투파(五倫塔)과 나무로 만든 가쿠도파(角塔婆)가 섞여 있다. 스투파는 아래로부터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5대 원소를 따서 아래로부터 차례로 직육면체, 원, 삼각, 반원, 보주 모양의 돌을 쌓고 지, 수, 화, 풍, 공의 산스크리트어를 적어 놓는다. 그 모양을 나무 기둥에 새긴 것이 가쿠토파이다. 스투파와 가쿠도파뿐만 아니라 석등 같은 다양한 석물과 작은 사당 등이 오쿠노인을 구성하고 있다.
허남린 선생님께서 몇 개의 스투파를 소개해주셨다. 슈겐 부인(사후 불교 이름)의 스투파는 6.6m로 오쿠노인에서 가장 큰 석조물로 ‘일번석(一番石)’이라고 불린다. 1627년에 슈겐 부인의 아들 타다나가가 세웠다. 슈겐 부인은 도쿠가와 쇼군인 히데타다의 부인이었다. 슈겐 부인의 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하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임진왜란(1592-1598년) 때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년)의 명령으로 1599년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년)와 그의 아들 타다츠네(1576-1638년)에 의해 석탑이 세워졌다. 이 석탑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사망한 일본군과 조선군을 위해서 세운 것이며 그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다. 어쩌면 침략자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감추고 미화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묘지들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묘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양자이며 인질로 보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의 묘도 있었다.
5. 고행을 통한 깨달음(긴푸센지金峯山寺)
둘째 날의 마지막 일정은 요시노산의 긴푸센지(金峯山寺)를 방문한 것이었다. 일본의 산악신앙은 뿌리가 깊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일본인들에게 산은 신들이 사는 성역으로 간주되었다. 기이 산지는 예부터 산림 수행자의 신앙지로 이곳저곳에 산림 수행자의 행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산악 신앙이 자연스레 모아지면서 구마노를 둘러싼 커다란 신앙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구마노산로가 목표로 한 것은 ‘고모리’(인큐베이션)로 수행과 꿈, 기도를 통해 어떠한 계시를 받고자 한 것이다. 기이반도 일대에서 산악 수행자들의 수행 장소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7세기의 엔노교자(634년 생)는 슈겐도를 창설하였다.
슈겐도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로 ‘산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산에 머물고 들에 머무는 종교로서 수행의 도장이 대자연이다. 두 번째 특징은 ‘종파를 초월한 실천주의’라는 점이다. 슈겐이라는 것은 수행득험을 말한다. 수행을 함으로서 신통력인 겐리키(驗力)를 얻는다. 그 겐리키가 신의 계시 또는 스스로의 깨달음이다. ‘종파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교의 다른 종파 사람과도 함께 수행하고 신관과 함께 걷기도 한다. 세 번째 특징은 ‘신불혼효(神佛混淆)의 다신교적 종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