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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사상답사] DAY3_신성에 깃든 시간(이세 신궁에서 천리교까지)
# 탐구생활 일본철학사상사 답사기_이진진
DAY 3_기행문 신성에 깃든 시간 (이세 신궁에서 천리교까지)
(1) 고대로의 시간 여행
답사 셋째 날 우리는 이세伊勢에서 아침을 맞았다. 빡빡한 답사 일정에도 일행들은 매일 아침 숙소 근처를 산책하거나 뛰면서 주변을 탐색했는데, 오늘 아침 식사에서도 저마다 인근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스럽다. 아침잠이 많아 함께하지 못한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내일은 꼭 함께하리라 다짐해본다. 오늘 일정은 이세 신궁을 둘러보고 차로 2시간을 달려 나라로 이동해 이소노카미 신궁을 둘러볼 계획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세 신궁과 이소노카미 신궁은 2000년이 넘는 시간을 품은 곳이라고 한다. 벌써부터 오늘의 장소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기대가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세 신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2) 성과 속(이세 신궁伊勢神宮–내궁內宮 외궁外宮, 오카게 요코초 おかげ横丁)
이세 신궁은 크게는 내궁과 외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내에는 125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내궁와 외궁은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이동해야 할 정도로 떨어져 있고, 그 내도 다 둘러보려면 30분에서 1시간은 걸릴 정도로 넓다. 이 넓은 곳을 둘러보며 인상 깊었던 점은 신성하게 여겨지는 장소들이 방문객에게 어떤 격식과 가림막 같은 것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모든 신사의 입구에는 도리이(鳥居)라고 하는 독특한 문이 있다. 도리이는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관문으로 흔히 신사 앞에서 볼 수 있는데, 기본적인 구조는 양쪽으로 기둥 두 개가 서 있고 꼭대기에 가로대가 위아래로 두 개가 놓여 있다. 도리이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 짓는 경계로, 신사 안에 부정한 것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결계‘로서의 역할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사에 들어갈 때는 이 문을 통과해 들어가야 부정한 것들이 함께 들어가지 못한다고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신사의 입구에는 손과 입을 깨끗이 하는 있는 데미즈야(手水舎)라는 곳이 있다. 마치 우리나라 절에 있는 약수터처럼 생긴 곳인데,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석재의 수반, 그 위에 지붕이 덮여 있으며 수반에는 손잡이가 긴 국자가 놓여 있는데, 그것을 사용해서 물을 뜨고 왼손, 오른손을 씻은 후, 손에 물을 모아 입을 헹구고 남은 물로 국자를 씻는 것이 예의 방법이다. 신사에 들러 참배하는 행위는 신을 지상으로 불러들여 소원을 비는 행위이기에 신을 만나기 전에 손과 입 등 몸을 정갈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신사의 입구에서 이러한 격식을 취한다.
이 두 장소가 일본의 대부분의 신사에 있는 신성한 장소와 속세의 장소를 구분하는 어떤 형식이라면, 이세 신궁에는 내궁 앞의 오카게 요코초와 우지바시라고 하는 곳이 더 있었다. 또 신궁 내의 정궁(正宮)이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는 점과 가구라덴(神樂殿)이라고 하는 부적을 판매하는 곳, 정궁 등 몇 곳은 촬영까지 금지되어 있다는 점은 그곳이 신성한 장소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였다.
내궁의 입구 오른쪽에는 요카게 요코초라고 하는 거리가 있다. 12~16세기 이세 신앙이 평민에게 확대대어 이세 순례가 유행하게 되고, 에도 시대에 이르러는 이세 진구가 많은 이들이 소망하는 순례지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허남린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돈을 모아 한 사람을 순례자로 보내고, 다음 해에는 다음 사람을 보내는 식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순례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요카게 요코초는 당시 이세 진구라고 하는 극도로 신성한 곳을 순례하고 나오며, 정반대의 역할을 했던 유곽이 늘어선 곳이었다고 한다. 평생 성스러운 장소에 가서 기원하기 위해 한 마을의 사람들이 공을 들이고, 그곳을 나오며 유곽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놀며 신성을 털어내고, 마을의 대표는 돌아와 그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내궁에 들어가려면 이스즈 강 위에 놓인 우지바시라고 하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속세와 신성한 영역을 분리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20년에 한 번 행해지는 시키넨센구에 이 다리 또한 다시 만들어져 놓인다고 한다. 처음 시키넨센구라는 의식을 접했을 때는 잘못 들었나 했다. 20년에 한 번이라고는 하지만, 전체 신궁의 건물들을 다시 짓는 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시간과 노력이 여간 소요되는 일이 아니다. 또 신성한 장소라고 하는 의미가 어떻게 보면 그간의 시간이 중첩되어 형성된 곳이라는 점에서 그걸 무너뜨린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더욱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직 이 시키넨센구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지바시까지도 이 의식에 포함된다는 점이 신궁을 더욱 신성한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궁와 외궁에 들어서 죽 늘어선 나무숲 길을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은 가구라덴이다. 이곳은 부적을 파는 곳으로 얼핏 보기에는 그냥 상점같이 보이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신성한 곳이기에 촬영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도요우케노 오미카미를 모셔놓은 정궁 또한 신성한 장소라는 이유로 촬영을 금하고 있으며, 외궁의 가장 중심에는 천황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이세 신궁을 돌아보며, 성스러움과 속됨이 어떤 경계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음을 보았다. 그 경계가 정말 있는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장막에 불과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둘을 넘나드는 어떤 의식이나 형식을 만듦으로서 둘을 구분하려고 한다.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삶은 노고스럽고 비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우리는 그런 일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신이나 신성한 장소를 찾는다. 그런 곳에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로 하고, 존재적 신을 믿지 않는 나도 그곳에 들어서면 마음이 경건해졌고 감히 그곳의 금기를 깨지 못하는 두려움이 절로 마음에 생겼다. 이 이중적인 심리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신성하다는 것이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되는지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 이세 신궁伊勢神宮(내궁+외궁) + 내궁 앞 거리(오카게 요코초 おかげ横丁) 이세 신궁(공식 명칭은 ‘신궁‘)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고타이신궁(皇大神宮:내궁內宮)과 도요우케노 오미카미(豊受⼤神)를 모시는 도요우케다이신궁(豊受⼤神宮:외궁外宮)을 중심으로 125개의 신사(新寺)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파리 중심부와 거의 비슷하다. 황실의 번영, 세계 평화,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1,500회 이상의 제사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원래 일본의 역대 천황이 황궁에서 숭배했다. 그러나 제10대 스진 천황(崇神天皇)의 통치 기간에 성스러운 거울(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이 황궁에서 옮겨졌다. 그 후 제11대 스이닌 천황(垂仁天皇)의 통치 기간에 천황은 그의 공주 야마토히메노미코토(야마토공주)에게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영구적으로 모시고 예배할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여러 지역을 찾은 후 마침내 공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이세에 영원히 모시고 예배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 약 2,000년 전이다. 약 1,500년 전 제21대 유랴쿠 천황(雄略天皇) 시대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또 다른 계시에 따라 도요우케노 오미카미가 교토 부 북쪽에서 소환되어 이세에 모셔졌다. 황실의 번영, 세계의 평화,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이세 신궁의 제사와 의식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직계 후손인 천황의 지휘 아래 신궁의 사제단에 의해 거행된다. 따라서 신궁에서 거행되는 이러한 제사와 의식을 황실의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의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매일 및 매년의 의례이고, 두 번째는 황실, 국가, 또는 신궁의 이익을 위해 특별한 시기에 거행되는 특별 의례이다. 세 번째는 20년마다 거행되는 시키넨센구(式年戦宮)를 위한 의례다. 이러한 의례 중 중요한 의례가 거행될 때, 천황은 신궁에 사신을 파견하여 헤이하쿠(平穴)라고 불리는 직물을 헌납한다. 매년 의례는 벼농사 주기를 기반으로 한다. 한 해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은 간나메사이(神宮祭)로, 신궁의 신관들이 신궁에서 수확한 그해 첫 쌀을 바치고, 손자를 통해 지상 세계에 첫 쌀을 선사해 주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께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간나메사이에서는 천황이 기른 햇벼 한 이삭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께 바친다. 20년마다 현재 신전과 같은 규모의 새로운 신전이 본전 인근의 다른 장소에 건립된다. 신전 건립에는 약 30회의 의식과 제사가 거행되는데, 새 신전을 위한 첫 나무를 베는 의식을 시작으로 한다. 신전에 놓일 신성한 의복, 비품, 그리고 신성한 보물들도 새롭게 제작된다. 준비가 완료되면 신궁의 승려들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인 성경을 새 신전으로 옮긴다. 이 의식을 시키넨센구(式年遷宮)라고 한다. 시키넨센구의 모든 의식과 행사는 약 8년에 걸쳐 거행되며, 게쿠(姫宮)를 비롯한 신궁의 다른 신사에서도 거행된다. 내궁의 첫 시키넨센구는 690년, 제41대 지토 천황 시대에 거행되었다. 가장 최근의 시키넨센구는 2013년에 거행된 62번째 시키넨센구였다.
1. 고타이진구皇大神宮(내궁內宮) 주소 : 1 Ujitachi-cho, Ise city, Mie Pref. 고타이진구(내궁)는 일본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사이다. 이곳은 황실의 조상 신(신도의 수호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약 2,000년 전 내궁에 모셔져 일본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이곳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궁이 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인 성경(聖鏡)은 본전 가장 안쪽 안뜰에 있는 본궁 안에 모셔져 있으며, 본궁은 네 줄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순례자들은 보통 울타리 세 번째 줄 문 앞에서 모셔진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지바시(宇治橋) 이 다리는 내궁 입구의 이스즈 강(五十鈴川)을 가로지르며, 신성한 영역과 일상의 세계를 분리한다고 전해진다. 우지바시는 순수 일본식 건축 양식을 따르며, 길이는 100미터가 넘는다. 이 다리는 시키넨센구의 일환으로 20년마다 재건축된다.
2. 도요우케다이진구豊受⼤神宮(외궁外宮) 주소 : 279 Toyokawa-cho, Ise city, Mie Pref. 도요우케다이진구는 도요우케노오미카미(豊受⼤神)를 모시고 있다. 약 1,500년 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계시에 따라 이 신이 이곳에 소환되어 모셔졌다. 도요우케노오미카미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함께 신궁에서 교우 관계를 맺고 신성한 음식을 제공한다. 풍년을 기원하며, 인간 삶의 세 가지 필수 요소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행복의 수호자이다. 외궁의 신궁 건축양식은 내궁과 거의 같지만, 외궁에만 있는 미케덴(御饌殿)이라는 홀이 있다.
3. 오카게 요코초(おかげ横丁) 주소 : 52 Uji-Nakanokiri-cho, Ise city, Mie Pref. 이세 신궁 참배가 붐을 맞이한 에도 시대의 거리를 재현한 작은 마을 오하라이마치(おはらい町)에 있는 거리로, 이세신궁 내궁으로 이어지는 약 800m의 거리다. 제61회 이세신궁 시키넨센구가 거행된 1993년에 완성되었다. 일본어로, 오카게(おかげ)라는 단어는 감사함을 의미하고 요코초(横丁)는 일종의 골목을 의미, 오하라이(おはらい)는 정화를 의미한다. 일본 에도 시대(1603년~1867년)부터, 이세 마을은 이세 진구에서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전국 각지의 수많은 순례자들의 목적지였다. 에도시대에는, 어사의 관이 줄지어, 전국으로부터의 참배자를 맞이하는 번화한 마을이었다. 그 당시 다섯 명 중 한 명은 그들의 여정과 함께 오는 어려움을 고려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진자에게 갔다고 한다. 심지어 가사가 있는 민요도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나는 Ise에 가고 싶다, 나는 Ise를 보고 싶다, 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보고 싶다.” 종종 길고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이세로 가는 길은 보통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피곤한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에는 숙소와 음식의 부족뿐만 아니라 고향을 벗어나 모험을 하기 위한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행이 어려웠다. 순례자들이 마을로 가는 여정에서 직면한 장애물을 잘 알고 있는 이세 지역 마을 사람들은 종종 지친 방문객들을 두 팔 벌리고 감사하며 환영했다. 그들은 이 방문객들에 대한 그들의 관대함과 친절이 이세 진구의 신들에게 자신의 감사를 표현하는 경스러운 방법이라고 믿었다.
4. 관련 시대 이세 지역은 일본의 신화와 왕실, 민속, 순례, 정치를 포괄하는 다층적인 역사 공간으로, 이세 신궁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 순례문화가 이세의 역사적 흐름을 이끌어 왔다. 고대(~8세기)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이세에 머물면서 “이 땅이 마음에 든다”고 한 야마토히메 전설에 기반한 이세 신궁이 창건된다. 이세 신궁은 천황가가 직접 제사를 올리는 유일한 신궁으로, 아마테라스의 거처는 일본의 중심이라는 상징이 확립된다. 농경과 어업에 적합한 평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이세강과 미야가와 유역에 초기 정착지가 발달한다. 특히 벼농사와 공물 제공을 위한 국가 직할을 신성한 토지가 운영된다. 나라–헤이안 시대(8~12세기)에는 이세 신궁이 정식으로 국가 제례의 중심이 된다. 천황가가 직접 제사를 올리는 신궁으로 기능하며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지’로서 위상이 확립되고, 천황 대신 ‘사이오(斎王:제사 전담 왕족 여성)’이 파견되어 신궁을 모시면서, 나라와 이세를 잇는 ‘사이오 순례길’이 형성된다.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12~16세기)에는 이세 신앙이 귀족층에서 무사와 상인, 농민으로 확대되며, 관음 신앙과 융합되면서 구마노 고도(熊野古道)와 연결되는 혼합적 순례 문화가 형성된다. 특히 ‘이세 순례’가 이 시기 유행하면서 자기 정화와 속죄, 기원을 위한 도보 순례가 이뤄지게 된다. 에도 시대(江戸時代)(1603~1868)에는 전국에서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방문하며 경제적 성장과 함께 ‘순례 도시’로 발전했다. 메이지 시대(1868~1945)에 메이지 정부가 ‘신도’를 국가 종교로 지정하고 이세 신궁은 최고 격인 ‘국가신사’로 지정된다. 천황의 조상신 숭배는 천황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고, 철도 ‘산구선’의 개통은 이세 순례를 대중화시켰고 국가와 민중 모두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게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신도 체계가 해제되고 신앙의 자율성이 회복된다. 하지만 이세 신궁은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으로 유지되고, 2013년 ‘G7 이세시마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등 연간 8백만 명 이상이 방문해 신앙과 문화, 관광이 어우러지는 명소로 발전하게 된다. 18세기에 정점에 달했던 일본의 국학 운동을 형성시킨 일련의 철학적 고심과 분석들은 네 가지의 일본 문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첫째가 ‘가미(신(神))’신앙이다. 이는 천신(天神)들, 자연 현상, 영과 영혼, 또는 위대한 인간을 상기하는 기념물 따위의, 신이 임하여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곳에 예를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신도(神道))’ 즉 ‘가미노미치’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신의 길’을 뜻한다. 두 번째는 ‘와카(和歌)’를 짓고 평가하면서 고대 일본의 토착어의 높은 가치를 파악한 것이다. 세 번째는 고대 일본 황실의 신화적 역사서(『고사기(古事記)』712년,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이며, 네 번째는 가미로부터 이이온 황실의 혈통이다. 국학은 13세기에 막부(幕府)로 정치적 권력이 넘어가자,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귀족들이 황가가 있는 교토를 문화적 수도로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이 네 가지 요소를 결합해 벌인 다채롭고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은 와카를 핵심으로 삼는 고대 황실의 음악, 가미, 그리고 황제 통치권의 본질과 관련한 새로운 유형의 가르침과 의례를 창안했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거의 변함없이 와카였다. 중국에서 비롯된 한자의 사용과 구문의 사용을 금지하고 순수한 언어로 쓴 와카는 대륙에서 수입된 문화에 지배되었던 환경에서 ‘일본’의 정수를 대변하게 되었다. 그것의 기본적인 생각은 일본 토착어의 소리에는 시인의 마음 즉 고코로를 세상과 또 인간과 융합시키는 정신적·심미적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힘을 고토다마(言霊)라 했고 그것은 나중에 고유한 일본 언어의 거의 마법적인 가치를 찬양하는 핵심 용어가 되었다.
참고문헌 : https://www.isejingu.or.jp/ |
(3) 이야기의 힘(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이소노카미 신궁은 일본의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그 역사가 아주 깊은 곳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신사는 다양하고 많은 신들(돌, 자연, 바다, 항해, 어업, 무기, 건강, 장수 등)을 모신다고 전해지며, 그만큼 여러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이런 신화와 이야기들을 공부하고 가서였을까, 다른 신사나 절들에 비해 소박하고 조용했지만 이곳은 뭔가 숙연했고 유구한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은 ‘칠지도’가 발견 보관된 곳으로 혹시라도 그 진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얽힌 이야기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일본의 기원을 상징하는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이 나라를 진정시키는 데 사용한 검이 모셔져 있다고 전해졌다. 일본의 신화 속에서 신비한 힘을 지닌 이 검은 신화 속 인물인 다카쿠라지가 준 것으로, 진무 천황의 일행을 부활하게 하고 도적들을 흩어지게 했다고 한다. 진무 천황이 실재했던 인물인지, 이 검이 실재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신화 속의 인물과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신사는 이 검에 깃든 신을 모신다.
이 외에도 이곳은 진무 천황의 건국 당시 큰 공로를 세웠던 모노노베 가문의 신사이기도 하다. 허남린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과거 일본은 가문마다 소속된 신사가 꼭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에서 신사의 역사는 길고 일본인들에게 그 의미는 중요한 것 같다. 모노노베 가문의 먼 조상인 니기하야 히노코토는 천상에서 내려왔을 때, 천진의 신으로부터 ‘하늘의 열 가지 보물’을 하사받았다. ‘십종신보(十種神寶)’라고도 불리는 보물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秀武) 천황과 황후의 성스러운 생명의 장수를 기원할 때 이 보물을 사용하여 진혼제를 거행했다고 한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이 열 개의 보물에 깃든 신을 모시며, 지금도 매해 11월 22일 밤에는 ‘진혼제 축제’가 거행된다.
일본 신화 속의 신인 스사노오와 관련된 검의 신도 이곳에서 모셔져 있다고 한다. 스사노오는 바다와 폭풍을 다스리는 일본 신화 속의 신으로 태양을 다스리는 아마테라스의 동생이다. 스사노오는 천계에서 말썽을 부려 이즈모로 쫓겨난다. 스사노오가 이즈모 땅에 도착했을 때, 한 노부부가 애도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 보니, “매년 하치마타의 대뱀이 나타나 딸들을 차례차례 잡아먹고, 마지막 남은 이나다 공주도 곧 잡아먹힌다“고 했다. 스사노오는 용감하게 하치마타의 대뱀을 물리치고 이나다 공주와 행복하게 연합했다. 이때 뱀을 쓰러뜨린 검은 천십악검(天十握剣)으로, 이 검이 나중에 이시가미 신궁에 모셔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와 그곳에 모셔진 여러 신들을 보면서,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힘과 그 장소에 깃드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 전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와 관련된 검이나 보물이 묻혀 있다고 여겨질 때, 이 신사는 지금처럼 건물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저 그렇다고 전해지는 곳을 찾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빌다가, 이곳에 신사가 세워지고 건물들이 옮겨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지금도 영험한 곳으로 여겨지는 데에는 일본 건국과 관련된 신화를 품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의 일본 건국 신화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나지만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 것에 비해, 이소노카미 신궁의 규모나 그 모습은 이세 신궁에 비해 고요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신사 내의 몇몇 건물이나 문도 오래되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긴 시간을 품은 곳에 들어서면 내가 그곳에 깃든 이야기나 시간성을 알고 있지 않더라도, 그 유구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수령이 오래된 나무 앞에서 느껴지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눈에 보이지도 현대의 과학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기운이 있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그 시간성, 시간이 중첩되어 쌓여 있는 어떤 힘이 눈에 보이고 증명되지 않았지만, 실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소노카미 신궁 (石上神宮) 주소지 : 384 Fru-cho, Tenri-city, Nara-pref.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덴리시(天理市) 동부 교외 지역의 숲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신사인 이소노카미 신궁은 소박한 경내와 달리 아주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일본에서 아주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인 이소노카미 신궁의 기원은 역사와 전설이 교차하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적인 힘의 중심지이자 고대 유물의 보관소로 시작해 2000년 이상에 걸쳐 일본 황실의 장수와 국가의 번영을 비는 연중행사인 고대 제례 진혼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기원전 91년경 일본 조정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제사 관련 업무도 맡았던 모노노베(物部) 가문이 창건했다. 신궁은 초대 천황이 지녔던 것으로 여겨지는 신검 ‘후쓰노미타마 검(布都御魂剣)’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다.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660년)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지는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검인 칠지도를 비롯하여 많은 성스러운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소노카미 신궁은 귀중한 보물들을 관리하며 일본 황실에 충실히 봉사해 왔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다양한 신토(神道:일본의 민속 종교)의 신을 모신다. 일본 역사에서 신의 가호와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국가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주신으로는 후쓰노미타마노오카미(布都御魂大神), 후루노미타마노오카미(布留御魂大神), 후쓰시마타마노오카미(布都斯魂大神)가 있다. 후쓰노미타마노오카미는 후쓰노미타마 검에 깃든 영력이 구체화된 신이다. 후쓰노미타마 검은 다케미카즈치노오카미(建御雷神:전쟁, 번개, 지진의 신)가 지녔던 것으로 일본 신화 상의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神武天皇)에게 내려진 것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진무 천황은 이 검의 힘으로 회복하여 훗날 일본에 왕국을 세우게 된다. 후루노미타마노오카미는 아마쓰카미(天津神:천신)로 알려진 신들이 가진 10개의 성스러운 보물 ‘도쿠사노칸다카라(十種神宝)‘에 깃든 회복의 힘이 구체화된 신이다. 이 보물들은 니기하야히 노미코토에게 내려진 것으로, 진콘사이(鎭魂祭)의 중심이기도 하다. 후쓰시미타마노오카미는 바람의 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가 가지고 있던 신 검 ‘아메노토쓰카노 쓰루기 검‘에 깃든 영력이 구체화된 신이다. 일본 고대 신화에는 스사노오가 어떻게 이 검으로 머리가 여덟 개인 뱀 야마타노오 로치를 물리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배례전(하이덴) 배례전에서는 1년에 한 번 진혼제를 비롯한 신토의 제사를 지낸다. 이 배례전은 시라카와 천황(1053~1129)의 명에 따라 1081년 교토의 황궁에서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이전되었다. 이전되기 전까지는 황궁의 신카덴(천황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으며 황실을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이 건물은 약 천 년 전에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이전된 이후 한 번도 큰 규모의 개보수 및 개축을 하지 않았다. 1945년에 이 건물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 규모의 배례전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현지에서 벌목한 노송나무의 껍질로 만들어졌다.
긴소쿠치(성역) 배례전 뒤쪽에 있는 이 출입금지 구역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자 후쓰노미타마 검이 안치된 곳이다. 이 신검은 후쓰노미타마의 신체(神體)이자 이소노카미 신궁의 중심이 되는 유물로, 이소노카미 신궁은 이 신을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역은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땅‘이라는 뜻인 ‘긴소쿠치‘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스진 천황이 기원전 91년경 후쓰노미타마 검의 봉헌을 명했다고 한다. 그 후 검은 후루카와 강 근처 이소노카미후루의 다카니와라고 불리는 곳에 묻혔다. 그리고 검의 위치를 나타 내는 표지로 나무를 심었다. 그 후 그 땅은 이소노카미 신궁의 긴소쿠치(성역)이 되었다. 약 2000년 후 간 마사모토(1824~1897)라는 신참 고위 신관이 이 성역에 흥미를 느껴, 정부에 고고학적 발굴 조사 허가를 신청했고, 1874년에 몇 가지 고대 유물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후쓰노미타마 검으로 추정되는 둥근 칼자루의 철검도 있었다. 1913년에 이 신검은 성역으로 옮겨져 지금도 그 장소에 안치되어 있다.
셋샤(경내 소규모 신사) 배례전 이 독특한 건물은 한때 거대했던 사찰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국보이자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불교의 급격한 쇠퇴를 나타내는 기념비적 건물이기도 하다. 이 배례전은 본래 이소노카미 신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우치야마에이큐지(内山永久寺)라는 유명한 사찰의 경내에 있던 건물이다. 우치야마에이큐지 절은 1100년대에 창건된 이래 수 세기 동안 규모를 키워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그러나 1868년 불교와 신도가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사찰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우치야마에이큐지 절을 비롯한 많은 사찰은 폐쇄되거나 해체되었다. 우치야마에이큐지의 유적은 사라졌고 부지는 황폐해졌으며 건물은 폐허가 되었다. 1890년 화재가 발생한 이후에는 이 작은 배례전만 남게 되었고, 1914년에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이전되었다. 건물 자체는 1137년 것으로 여겨지지만, 13세기와 14세기에 개축되었다. 이 배례전의 특징 은 건물을 반으로 나누는 봉당(흙이 깔린 통로)이다. 배례전의 구조를 보면 늘 이런 배치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왜 이렇게 나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현재 이 배례전은 이즈 모타케오노미코토의 셋샤(경내 소규모 신사)와 마주보고 있다. 이즈모타케오노미코토는 구사나기 검(일본 황실의 성스러운 유물 중 하나)에 깃들었다고 여겨지는 신이다.
누문 이 빛바랜 목조문은 셋샤(경내 소규모 신사) 배례전과 마찬가지로 1318년에 세워졌으며 과거 불교와 신토가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문은 불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누문으로, 큰 종을 달아 시간을 알려 승려들에게 식사와 기도에 부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문이 신사의 정중앙에 있다는 것은 신토와 불교가 같은 경내에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868년에 불교와 신토가 공식적으로 나뉘면서 종은 분리되어 팔렸다. 현재 종은 없지만, 이 누문은 ‘시캬쿠몬(四角門)’이라고 불리는 문의 좋은 예로, 처마 밑에는 2단 목조 까치발이 있으며 지붕에는 노송나무 판자로 만든 지붕널이 대어져 있다. 상층부의 목재판은 4개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를 합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나 언제나 새롭다‘라는 뜻이 된다. 이 한자는 과거 총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의 친필이다. 일본에서 아주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며 부흥과 재생의 장소인 이소노카미 신궁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도리이(鳥居) 7m 높이의 이 도리이는 1926년에 즉위한 쇼와 천황을 기념하며 1928년에 세워졌다. 도리이에 달린 편액(문패)에는 이 신사의 3주신 중 하나인 후쓰노미타마노 오카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도리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동굴에서 나오지 않자 많은 신들이 세상에 빛을 되돌리기 위해 닭들을 모아 울게 했는데 그때 닭들이 앉은 화(나무 막대)가 최초의 도리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를 뒷받침하듯 도리이는 ‘새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성한 닭 이소노카미 신궁에서는 경내의 고요함이 수탉의 울음소리로 깨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신궁에는 20~50마리의 닭이 살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1980년대에 처음으로 닭 몇 마리가 기증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신궁에는 정기적으로 닭이 기증되어 수탉과 암탉이 늘어나고 있다. 닭은 미에현의 이세 신궁을 비롯해 다른 신사에서도 사육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닭은 오랫동안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와 수호신의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믿음은 6세기 중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어떤 지역에서는 벽사를 위해 흔히 문이나 출입구에 닭 그림을 붙였다고 한다. 전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수탉은 동틀 녘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동물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일본의 건국 신화에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를 은둔처에서 불러내어 세상에 빛을 되돌리기 위해 많은 신들이 수탉을 모아 울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내에는 다양한 품종의 닭이 나무 그늘 아래서 벌레를 잡아먹으며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 그중에는 길게 울도록 품종 개량된 ‘장명계‘라는 품종도 있다.
2. 역사적 배경 선사시대 애니미즘적인 일본 고유의 경향은 이후 일본 철학적 사유의 보편적 바탕이 되었다. 고대 일본인들은 세상만물이 경이로는 ‘다마(魂)’ 혹은 ‘영적인 힘’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에서의 특정한 사물이든, 특별한 사람이든, 귀신이든, 혹은 신성한 존재든, 그러한 혼이 특히 두드러지는 곳을 가리켜 ‘가미(神)’라 하였고, 이 가미를 제의, 예술, 건축적 양식을 통하여 경배하였다. 심지어 내뱉는 말조차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신비한 힘-‘고토다마(言靈)’라고 하는–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渡來人)들이나 무역상인들을 통해 건너온 중국의 고전(당시 유교전통에서 경전으로 받들어졌던 문헌들)을 읽음으로써 한자를 받아들였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일본인들은 처음엔 불교가 공헌하는 문화적이고 제의적인 발전상에 주로 매료되었고, 한자로 쓰여진 불교 경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귀족과 승려 사이에 지적인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7세기 초반 10~20년 사이에는 충분히 성숙하여 조정은 관료들의 국정을 위한 ‘헌법’을 제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일본은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들어 황실의 권력이 명확해지고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함에 따라 사회적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전에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터부 때문에 천황이나 황후가 죽을 때마다 왕궁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수도를 나라에 건설하게 된다. 당(唐)의 장안(長安)을 본 딴 수도 건설은 불교사원 안의 커뮤니티의 수적 증가를 야기했는데, 이들 커뮤니티는 승가적 수행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방대한 중국의 불교문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술아카데미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지식인들은 불교 용어에 대한 정교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불교 철학적 체계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나라시대에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두 권의 중요한 역사문헌이 편찬되었다. 이 문헌들은 창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부터의 궁정 행사와 사건들을 매우 자세히 서술하기에 이른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창조신화와 함께 황실이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손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성문화한 만큼 이들 두 문헌은 결국 천황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도(神道) 논리의 이념적인 토대가 되었다. 요컨대, 쇼토쿠 태자의 『십칠조헌법』 이후 7세기에서 8세기까지는 사상적 발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배움의 장, 특히 수도인 나라의 불교 연구의 중심 시설들은 창조적인 사상을 위해 원전 자료들을 습득하면서, 이후 9세기 초반 구카이(空海, 774~835), 사이초(最澄, 767~822)를 통해 일본 불교 사상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될 때까지 그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784년에 간무 천황은 수도를 야마시로국의 나가오카쿄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794년에는 또다시 헤이안쿄로 이전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 794~1185)가 시작되었다. 나라의 사원들은 정치적인 수도를 옮긴 후에도 강력한 힘을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나라는 헤이조쿄의 남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난토(南都)로 불렸다. 이 시기는 중국의 문화적, 철학적, 종교적 전통 들을 일본 고유의 문화적 표현에 동화시키고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후대의 대다수 일본사상가들은 헤이안 시대를 일본의 독창적인 지적, 미학적 활동이 꽃피웠던 시대로 회상하게 된다. 조정과 정부의 제도나 불교사원과 승가제도 등은 여전히 중국적 양식의 큰 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상가들은 일본의 토착적인 감성에 조화를 이루는 관념과 가치들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의 혁신, 가령 이전 세대에서 무시되었던 고대 애니미즘적인 요소들의 의식적인 복원과 같은 노력에 보다 관대해지고 있었다. 헤이안시대의 불교도들은 당시 가미 숭배로 특징적인 일본 고유의 애니미즘적인 신앙, 즉 나중에 결국 신도의 핵심적 요소로 발전하게 되는 전통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애니미즘적인 경향이 아직도 자연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반면, 거기에는 뚜렷하게 신도(神道)라고 칭할 만한 교학과 지적인 발전이 결여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의 진언과 천태는 주로 밀교적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애니미즘적인 정서나 가미 관련 제의들을 심오한 불교적 진실상의 표면적 현현이라는 이해와 함께 상당부분 포용했다. 이로써 17세기 혹은 18세기까지 지속된 불교와 신도 간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 동안 신도의 사상도 어렴풋하게나마, 불교적 분석에 기대어 그것을 신도식으로 변형시키면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이소노카미 신궁」(Japan Tourism Agency) 이소노카미 신궁 공식 홈페이지(https://web.archive.org/web/20160301021240/http://www.isonokami.jp/) |
(4) 종교,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천리시(天理市) 천리교(天理敎))
이소노카미 신궁을 답사한 후, 가까운 곳의 천리교에 가보자는 답사 일행 김문용 선생님의 제안으로 우리는 천리시 천리교의 본거지를 찾았다. 종교의 이름을 시의 명칭으로 그대로 사용할 만큼 천리교의 본부는 아주 넓었는데, 차를 타고 다녀야 곳곳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이곳이 마치 명문 대학의 캠퍼스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기와지붕에 건축 양식이 동양적이어서 그렇지 건물들의 모습은 꼭 단과대학과 기숙사 같이 보였다. 천리교가 어떤 종교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들어섰음에도, 천리교를 방문한 느낌은 처음부터 매우 강렬했다.
그 넓은 곳 중 우리는 천리교의 본당을 방문했다. 일본의 여느 신사나 우리나라의 절처럼 본당은 여러 개의 돌계단 위에 올라서 있었다. 신발을 벗고 본당에 들어서니 곳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들 중 몇몇은 방향을 조금씩 바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본당의 사방이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원은 입구 맞은편에 제단이 있어 뒤는 막혀 있거나, 오픈되어 있다고 해도 그 뒤에는 섬기는 신의 상징물 같은 것이 모셔져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가 들어선 문의 맞은편에도 마찬가지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있었고, 이런 문은 네 방향으로 비슷했고 모두 열려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자리에서 일어나 본당 안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본당의 가운데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중심이 아래층까지 내려가 있고 한쪽 면이 약 30~50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정방형으로 보였다. 당시는 그곳이 비어져 있었지만, 중요한 때에 어떤 의례나 의식 같은 것이 열리는 곳 같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 있기도 하고 어두워서 그때는 뭔가 으스스한 느낌도 들었는데, 그곳에서 의례가 치러질 모습을 상상해보니 제단이 위로 올라가 있는 것보다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천리교의 본거지 안에는 초, 중, 고, 대학과 대학원, 병원 등이 갖춰져 있고,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이 안에서 배우고 서로 돕고 생활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실제로도 이곳을 방문했을 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스포츠백 같이 생긴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은 활기가 있어 보였다. 하나의 마을 안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육과 제반의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곳이라니, 이곳이 세상의 시작이자 끝이라면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이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까지가 아무런 정보 없이 천리교를 방문하고 든 느낌이라면, 답사에서 돌아와 천리교에 대한 자료와 기사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내용은 사뭇 달랐다. 대부분의 신흥종교들이 그렇듯이 천리교 또한 사이비나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고, 나 또한 생각해 보니 길을 가다 그들의 포교활동을 눈살을 찌푸리며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실제로 천리교가 어떤 종교인가는 내 앎의 수준으로는 판단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둘째로 하고, 먼저 드는 생각은 19세기라는 근대에 한 여성이 신내림을 받은 일로 시작된 종교가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었을까였다. 덴리시에서 봤던 천리교의 본거지는 여느 종교의 회당 못지않게 컸고, 평화로운 마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천리교가 이단이냐 아니냐도 그 기준은 기존의 종교에 있다. 지금은 세계의 보편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도 처음에는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자의 모습으로 시작된 걸 생각하면, 천리교에 대해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근시안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판단을 뒤로 미루어두고서, 나는 천리교를 보며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종교에 이끌릴까 질문해보게 되었다. 천리교 홈페이지를 통해 내가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천리교가 강조하고 있는 교리는 ‘즐거운 삶’을 위해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였다. 천리교는 신체는 신의 것으로 인간의 임시 거처라고 했고, 오직 마음만이 자신의 것이라고 했다. 그 마음의 욕심을 끊임없이 제거하고 형제애로 타인을 위하면, 천리교의 신이 말하는 즐거운 삶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이븐 바투타 지음, 정수일 역주, 창작과 비평사)의 한 주석에 의하면, 불교는 자비를, 기독교는 박애를,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종교적 이념으로 삼는다고 했다. 바투타의 순례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교에서는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환대로 맞이하며 자기의 것을 선뜻 내주었다. 반면, 불교에서는 윤회의 삶에서 공덕을 쌓아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은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한다. 하루하루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비루하고 구차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종교는 그 속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삶의 지표 같은 것이 아닐까. 구원, 깨달음, 즐거운 삶처럼 삶의 목표는 다를지 몰라도,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얻는 것은 고달픈 이 생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고귀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 천리시(天理市)의 천리교(天理敎) 본당 주소 : 271 Mishina, Tenri city, Nara pref.
1. 천리교(天理教) 1838년 10월 일본인 나카야마 미키(中山美喜)가 창시한 신도(神道) 계열의 신흥 종교이다. 천리교는 에도 시대인 1838년 나라 현(奈良県)의 농민 여성인 나카야마 미키에게 천리왕명(天理王命)이 내려 츠키히노야시(텐리교 교조의 별칭)로 화하여 이후 포교에 힘쓰게 되었다. 신토의 일종으로 자리매김하는 의견도 있으나, 교리나 신앙생활에 있어 차이가 크다(사실상 불교에 가깝다고 보는 입장이 많다). 전 세계에 약 200만 명가량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그중 일본 내에 150만 명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1893년 이래로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7만여 명의 신자가 있다. 또한 천리교의 특징은 1838년을 원년으로 삼는, 릿쿄(입교, 立敎)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어버이신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생명을 주시고 수호해 주시는 신으로, 기원을 할 때에는 “천리왕님“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어버이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월일(月日)’, ‘어버이’ 등이 있다. 어버이신(이하 ‘신’)은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함께 즐기고 싶다”는 의도에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였으며, 세상의 물, 불, 바람의 섭리, 사람 몸에서는 온기, 윤기, 호흡의 수호 등, 온 세상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섭리와 그 균형을 수호하며, 이 수호를 ‘십전의 수호’라고 한다.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님을 통해서 세계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하강했다고 선언, 이때 천리교는 시작되었다. 천리교는 만물과 인간의 창조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마음 이외에 육체를 비롯한 모든 것을 신(천리왕명)에게 빌렸으나 사욕 때문에 온갖 불행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이 마음의 티끌을 제거하고 형제애로서 남을 위하면, 신이 의도한 즐겁고 풍요로운 세상이 온다고 설명한다. 원죄(原罪)나 업(業)과 같은 가르침은 없으며, 먼지처럼 눈에 띄기 어려운 마음속의 조그만 잘못을 나날이 털어내는 것이야말로 구제받는 근본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천리교에서 인간의 몸은 신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것이며, 마음만이 각자의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행복도 불행도 나타나게 된다. 마음을 제멋대로 쓰면, 신 수호를 충분히 받을 수 없게 되며, 끝내는 몸의 장애로 나타나거나, 사정의 원인이 된다. 제 몸, 제 가정의 이익만이 아니라, 남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씀으로써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즐거움이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 가려는 신앙이다. 즐거운 삶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질병이나 괴로움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를 계기로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남을 구제하는 마음으로 바뀌기만 하면, 누구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천리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사는 ‘즐거운 삶’의 세계를 강조한다. ‘즐거운 삶’이란 신의 수호에 감사하고, 그 수호로 살고 있는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우리 인간들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도우면서 사는 삶이다. 즐거운 삶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근행(천리교 예배의식)’과 ‘수훈’을 강조한다. 근행은 천리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의로, 매월 26일에는 ‘신악근행’을 올리고, 매일 해가 뜨는 시간에는 아침근행, 해가 지는 시간에는 저녁근행을 올린다. ‘신악근행’이란 10명의 근행인원이 각각 다른 손짓으로 태초 인간세계 창조의 신의 섭리의 모습을 춤으로 나타 내서, 인간 세계 창조의 진기한 수호를 현대에 재현하는 근행이다. 수훈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회복의 수호를 기원하는 것이다. 별석(터전에서 듣는 신의 말씀)을 아홉 번 듣고, 사람을 구제하고 싶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출원함으로써 ‘수훈의 리’를 받을 수 있다.
2. 덴리시(天理市) 일본 나라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6만 5천 명이다. 1954년에 나라현에서 4번째로 시로 승격되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종교 단체의 명칭을 자치단체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 시의 중심부에는 천리교 관련 시설이 집중하는 등 종교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도시의 인구 절반 이상이 천리교 신자라고 한다. 천리교 신자들이 히노키신(천리교에서 종교적인 목적으로 행하는 포교 및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매일 덴리역 광장을 청소한다. 도시 내에 천리교단 소속 시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시 입장에서도 천리교단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하다고 한다. 일본은 종교 시설에 대해 재산세를 부과할 수 없다. 그래서 덴리시는 세수가 적은 편인데, 그 대신에 천리교단이 덴리시 지방세 수입에 맞먹는 막대한 금액을 시에 기부하여 재정을 꾸린다. 이 기부금은 일본 법률에 따라 사용처에 제한이 있는 ‘지정 기부‘이기 때문에, 덴리시에서 이를 사용할 때 천리교단과의 협의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종교와 지방정치의 유착이라며 문제시하는 의견이 없지는 않다. 일단 천리교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고자 덴리시 지방선거(시장 선거, 시의회 선거)에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천리교단은 덴리시에서 서기로 1의 자리가 6으로 끝나는 해마다 ‘교조(敎祖) 〇〇〇년제‘를 거행한다. 천리교 교조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가 1887년에 사망했는데, 그 해를 1년으로 삼아 10년째 되는 해마다 큰 행사를 벌인다. 2016년에 교조 130년제가 있었다. 이렇게 10년마다 열리는 행사 때면 천리교 신자들이 너도나도 덴리시로 몰리기 때문에 시의 재정도 풍족해진다고 한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나무위키(https://namu.wiki/), https://www.tenrikyo.or.jp/ |
(5) 장소가 품은 이야기와 시간
일본 고대의 신성을 품은 이소노카미 신궁과 이세 신궁에서부터, 19세기 신의 계시를 받아 한 도시의 주 세력이 된 신흥종교 천리교까지, 3일째의 답사는 수천 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여행이었다. 앞의 두 장소와 마지막의 천리교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이소노카미 신궁과 이세 신궁에서 우리를 먼저 맞이한 것은 고요하고 울창한 자연이었다. 그 깊은 곳에 있는 두 신궁은 긴 시간의 흔적과 신화 때문인지 절로 경건하고 신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려놓거나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인지 행동은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고, 베일에 싸인 듯한 분위기도 감돌았다. 반면 천리교는 대부분의 장소가 개방되어 있고, 잘 계획된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리교의 시간성이 근대적이었다면, 이소노카미 신궁과 이세 신궁은 확실히 오랜 역사가 주는 무게감이 있었다. 신성과 종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지, 실제로 영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의 차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의 답사지를 떠올리며 신성이 어디에서 오는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