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아시아 Asia
[일본철학답사 – 탐구생활] DAY 4_ 내 안을 울리는 것들
권수현, 이기헌
나라에서의 아침. 기상이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침 식사 전에 가볍게 동네 한 바퀴 뛰고 올 요량으로 호텔 밖으로 나섰다. 어제 이세에서 맞은 아침은 옥현 선생님, 준상 선생님과 함께 달리기하며, 늘 빠지지 않는 육아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마을 언덕 중간에 빨간색 턱받이를 한 일곱 불상이 입구를 지키는 공동묘지, 신석기 집터, 작은 신당 등 뜻밖의 발견을 하기도 했었다. 오늘은 혼자 가야한다는 생각에 약간 겁도 나고, 이 마을은 무엇을 보여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벌써 답사가 3일이나 지났다니, 하루하루가 정말 밀도 있게 흐르고 있구나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달리다보니 호텔이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갑자기 비가 마구 쏟아져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호텔 방향으로 달려 간신히 출동 준비를 마쳤다.
답사 4일 차, 교토로 가는 날이다. 출발하기 전 호텔 로비에 모였다. 허남린 선생님께서는 언제나처럼 오늘의 일정을 간략히 설명해주셨고, 방문지와 전화번호가 적힌 작은 쪽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쪽지에 담긴 것이 단순한 정보 그 이상이라는 것을. 쪽지는 일행을 위해 거듭 확인하시고 정리하셨을 스승님을 떠오르게 했다. 쪽지를 사진으로 찍어, 단톡방에 공유하면 떠날 준비 완료다. 쪽지는 오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오늘 여행하게 될 교토는 어떤 곳인가? 인문세에서 공부하는 이종은 선생님은 나에게 교토는 도시 곳곳에서 오랜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서, 100년 된 온천을 추천해주었다. 선생님의 말대로 이곳은 헤이안 시대(794)부터 메이지 유신(1868) 때까지, 1075년간 일본의 수도였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가치가 수많은 사찰과 신사에 남아있다. 그야말로 일본 문화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시가 되겠다.
나는 첫날 고야산 자존원(高野山 慈尊院)부터 참배하는 나 자신이 몹시 어색했다. 남들은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 같은데, 나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두 손을 모으는 것조차 어색하고, 믿지도 않았던 신께 갑자기 무엇을 해달라고 기도해도 되는지 양심상 마음에 걸렸다.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는데, 왠지 모르게 날이 지날수록 기도하는 일은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흔들림은 있었다. 교토에서는 신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떠나 교토로 출발했다.
(1) 비와 소리 그리고 빛 :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 延暦寺)
제법 많이 내리는 빗속에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히에이산 엔랴쿠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동탑(東塔) 지역 버스 정류장. 여러 대의 버스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바로 옆엔 제법 큰 기념품 가게가 눈에 띄었다. 기념품 가게 안에서 허남린 선생님의 설명을 듣던 중 반가운 권수현 선생님이 답사에 합류했다. 인문세에서 토토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선생님은 현재 일본에 거주중이고, 직장 업무로 주말에 합류하게 되었다.
엔랴쿠지 매표소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여행 중 비는 여러모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날의 비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성스러운 곳에 들어섰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히에이산에서 내리는 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씻어내는 것 같아, 몸도 마음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좀 솔직하게 기도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한 사이 입장권을 구입하러 간 진진 선생님이 돌아왔다.
우리는 우산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대강당(大講堂)을 향해 걸었다. 길을 따라 사이초(最澄, 767~822)를 소개하는 패널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이초는 천태종의 창시자로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귀국 후 엔랴쿠지를 창건한 인물이다. 『일본 사상을 만나다,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임태홍, 유페이퍼)에 따르면 사이초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함께 해탈의 경지에 오르고 신묘한 깨달음을 같이 하기를 바랬다고 한다. 그가 천태종을 개창한 명분이 바로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는 불교’였다. 그는 간무(桓武; 737-806, 재위 781-806) 천황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사찰을 세우고 뜻을 펼쳤다.
대강당이 가까워질수록 승려들의 불경 독송인지 혹은 노래인 듯한 소리가 종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이곳은 승려들이 학문과 수행을 하는 시설이라 법회나 의식이 자주 열린다고 한다. 우리는 보라색 천으로 입구가 가려져 있는 대강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의식을 지켜보았다. 스무 명이 넘는 듯한 승려들이 불단(佛壇) 앞에서 문까지 두 줄로 서서 마주보고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그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모든 것을 한 곳으로 모으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 우리는 대강당 바로 앞 ‘개운의 종’이라고 불리는 종 앞에 줄을 섰다. 재미있게도 종 아래에 ‘1타 100엔’이라고 팻말에 가격이 적혀 있었다. 50엔을 넣고 치면 개운이 되다 마는 것일까? 이연숙 선생님께서 타종의 의미를 알려주시면서, 꼭 쳐보라고 하셨는데 지나쳤다는 것은 아직까지 좀 아쉽다. 운이 좀 더 트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종을 치니 소리와 함께 그 울림이 사방으로 퍼졌다. 촉촉하게 젖은 땅에게도, 초록의 나무에게도, 사찰의 사람들과 아마 신에게까지.
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 우리는 콘폰추도(根本中堂)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제로도 건물 외벽과 지붕은 여전히 보수 중이었다. 흰색 조립식 외벽이 사찰을 감싸고 있었고, 그 위에 큼직하게 ‘根本中堂’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조립식 건물을 통과해 어둑한 불당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답사를 떠나기 전, 엔랴쿠지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불멸의 법등이었다. 사이초가 직접 밝힌 등불로 1200년 동안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등불 모습이야 특색이 있을리는 없겠지만, 나는 수행자들의 번뇌를 태워내는 정진의 불꽃을 직접 보고 싶었다. 천 년 넘게 타오른 그 불을 마주하면, 왠지 어떤 기운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했다.
공사로 어수선한 바깥과는 달리 불당 내부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좌정한 승려가 불 앞에서 의식 중이었다. 이곳에서 승려들은 교대하며 24시간 불의 상태를 살피고, 기도하며 조심스럽게 수행한다. 나는 빛을 지켜온 세월의 깊이에만 주목했는데, 현장에서 보니 빛과 함께 발산되는 열이야말로 수행에 있어 쉽지 않은 인내의 대상이었을 것 같았다. 브로셔에서 보았던 작고 소박해 보이는 등잔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수행을 이어온 승려들이 조용한 울림을 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살리는 빛은 사이초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여름에는 많이 무더울 텐데, 무더위 속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의 노하우가 궁금했다.
———————————————————–
◎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 延暦寺)
주소 : 시가현 오쓰시 사카모토 혼마치 4220
히에이산(比叡山)은 시가현과 교토부의 경계에 우뚝 솟은 산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고 웅장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약 16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최고봉은 해발 848m에 달한다. 이 최고봉을 중심으로 약 100km²에 걸쳐 펼쳐져 있어, 말 그대로 산 전체가 하나의 사찰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히에이산은 ‘일본 불교의 어머니산(日本仏教の母山)’이라 불리며, 산자락 곳곳에는 불교 사찰, 탑, 암자, 수행처, 순례길이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다.
히에이산에 자리한 엔랴쿠지(延暦寺)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으로, 고승 사이초(最澄)에 의해 788년에 창건되었다. 이곳은 일본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법연(法然), 신란(親鸞),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등 일본 불교 각 종파의 창시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엔랴쿠지는 일본 불교의 뿌리이자 수많은 불교 사상의 원류가 된 수행처인 셈이다.
사찰 경내는 100여 채가 넘는 크고 작은 불전과 건축물이 산속 곳곳에 흩어져 있다. 전체 구역은 크게 ‘동탑(東塔)’, ‘서탑(西塔)’, ‘요카와(横川)’라는 세 주요 구역으로 나뉘며, 각 구역에는 중심 법당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탑 구역에 위치한 ‘콘폰추도(根本中堂)’는 엔랴쿠지의 중심이 되는 본당으로, 천태종의 신앙 중심지로서 높은 위상을 지닌다.
◎ 대강당(大講堂)
대강당은 엔랴쿠지에서 승려들이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수행하며 강론을 펼치는 중심 공간으로, 천태종의 교학 전통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원래는 824년, 엔랴쿠지를 창건한 사이초의 뜻을 계승한 제자들이 건립하였으며, 화재와 전란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해 왔다. 현재의 건물은 1963년에 복원된 목조건축물로, 전통적인 일본 사찰 건축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강당 내부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본존불로 모셔져 있으며, 이 밖에도 일본 불교 여러 종파의 창시자인 법연(法然), 신란(親鸞),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등의 존상(坐像)이 안치되어 있어, 엔랴쿠지가 일본 불교의 공동 발원지임을 상징한다. 또한,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불과 더불어 천태종과 관련된 고승들의 초상화(祖師像)도 함께 봉안되어 있어, 이곳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일본 불교 전체의 뿌리를 기리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 콘폰추도(根本中堂)
콘폰추도(根本中堂)는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정신적 중심이자 상징적인 본당으로, 사찰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엔랴쿠 7년(788년),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가 엔랴쿠지를 창건하면서 처음 세운 것으로, 이후 수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42년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후원으로 재건된 것으로,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콘폰추도 내부에는 사이초가 직접 봉헌한 약사여래(薬師如来)가 본존불로 모셔져 있으며, 이 여래불은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자비의 부처로 신앙되고 있다. 약사여래 앞에는 엔랴쿠지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 중 하나인 ‘불멸의 법등(不滅の法燈)’이 타오르고 있다. 이 등불은 사이초의 서원(誓願)에 따라 1200년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밝혀져 왔으며, 지금도 매일 아침 승려들이 직접 등유를 보충하며 지키고 있다. 이 불은 현세가 말법(末法)의 시대로 접어들지라도, 미래에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는 그날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이라 전해진다. 따라서 콘폰추도는 단순한 법당을 넘어, 일본 불교의 신앙적 정체성과 불멸의 수행 정신이 깃든 장소로 숭배받고 있다.
현재 콘폰추도는 노후화된 기와 지붕을 교체하고 내부 목조 구조를 보강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비와(檜皮) 지붕의 방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전통 기법과 현대적 보존 기술을 접목하여 수리를 시행하고 있으며, 공사 기간 동안에도 법당 내부에는 출입을 허용해 불교 수행과 참배가 계속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
(2) 성소와 문 : 남선사(南禅寺)
남선사는 교토 히가시야마(東山) 언덕 기슭에 위치한 대표적인 선종(禪宗) 사찰로, 일본 선종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로 꼽힌다. 절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삼문(三門)이 먼저 우리를 맞이했다. 웅장한 화강암 기둥과 단단한 기와지붕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삼문에 사용된 화강암 기둥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독특한 멋을 낸 것이 특징인데, 기둥에서 풍기는 묵직함과 무게감이 삼문의 위용을 한층 더하는 것 같았다.
수행자들에게 삼문은 영적인 깨달음으로 향하는 입구로 여겨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번 답사에서 수많은 문을 통과했었다. 생각해보면 성소로 들어가며 매번 깨달음이나 수행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경계를 통과하며 마음이 차분해지고 집중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삼문 2층으로 올라서면 근방을 넓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정상 곧장 절 안으로 향했다.
허남린 선생님 말씀을 리마인드하자면, 무로마치 막부(1336~1573)가 성립된 이후, 정신적 지주로서 이 일대에 다섯 개의 주요 사찰(五山)을 세우고, 그 아래 10개의 중급 사찰, 또 그 아래 수많은 말사(末寺)들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남선사와 오산 사찰은 국가의 중심으로 활용되었던 곳인데 그중에서도 남선사는 최고의 위상을 지닌 사찰이었다. 일본의 해외 무역이 활발했던 당시, 남선사 승려들은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며 경제적으로 부유해졌고, 이 큰 사찰을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교 사찰이 신앙의 장소를 넘어 국가 운영의 중심축이 되었던 시대, 그 공간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
◎ 남선사(南禅寺)
주소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후쿠치초
이 사찰은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역사와 문화, 정원이 조화를 이루는 교토의 상징적인 명소다. 남선사의 기원은 13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64년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 1249~1305)은 이곳에 자신의 별궁을 세우고, 정치적 압력으로 퇴위한 뒤 아들과 함께 은둔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그는 세속의 권력을 내려놓고 1289년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선종 승려인 무신 다이민 고쿠시(無関大明 国師)의 제자가 되었다. 깊은 신앙과 수행의 뜻을 품은 가메야마 천황은 1291년, 자신의 궁전과 부지를 희사하여 대규모의 선종 사찰 건립을 시작했고 이로써 남선사가 창건되었다.
사찰의 경내에는 1890년부터 차례로 지어진 12개의 탑두(塔頭, 하위 사찰)가 그늘진 숲과 비와호 수로(琵琶湖疏水)를 따라 늘어서 있다. 특히 경내를 가로지르는 수로각(水路閣)은 고풍스러운 벽돌 아치 형태의 수로교로, 일본 전통 사찰 경관 안에 서양식 구조물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 삼문(三門)
남선사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정문은 ‘삼문(三門)’이라 불린다. 삼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지나야 할 세 가지 관문, 즉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의미하는 삼해탈문(三解脱門)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영적인 입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삼문은 1628년, 에도 시대 초기 도도 타카토라(藤堂高虎)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 높이 약 22미터에 2층 누각 구조를 갖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다. 도도는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에서 전사한 무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문을 헌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삼문은 위령의 의미 또한 함께 지니게 되었다.
이 삼문은 ‘텐카류몬(天下竜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용문을 통과한 자가 용이 된다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이 문을 오르면 한층 더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2층 누각에 오르면 교토 시내와 히가시야마의 산세가 한눈에 펼쳐지며, 선종 사찰 특유의 경건하면서도 개방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
(3) 조선의 미감((美感)과 일본의 다도, 고려다완으로 만나다 : 노무라 미술관(野村美術館)
난젠지에서 긴가쿠지로 가는 길은 철학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세월의 이야기가 가득 배어있을 것만 같은 그 길의 초입에 살포시 숨어 있는 작은 미술관이 있다. 노무라 미술관(野村美術館)이다.
이곳은 일본 굴지의 금융기업인 노무라 증권과 구 다이와 은행을 창업한 노무라 도쿠시치(野村徳七)의 컬랙션을 중심으로 1984년에 개관하였다. 노무라가 모은 고문서, 회화, 도자기, 차도구, 능면能面 등 1900점의 소장품 중에는 중요문화재도 7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고려다완(高麗茶碗)이었다. 이 미술관의 타니(谷)관장님은 고려다완 연구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고 하신다. 한국에 가마터 조사를 위해 자주 방문하셨고, 한국 학자들과 교류도 활발하게 하신다고 하셨다.
처음 고려다완을 봤을 때는 생각보다 소박한 모습에 무엇이 그토록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려청자처럼 화려하거나 특별한 기술로 만든 것 같지도 않고, 조선백자처럼 절제되고 단순하며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투박하고 무심하며 소박하고 불완전하게 보였다. 타니 관장님께서 다완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처음에는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본 도공들이 고려다완을 만들기 위해 조선에 있는 왜관의 가마터에서 다완을 만들었지만, 조선의 도공들이 만든 다완과는 달랐다고 했다. 같은 흙과 불을 이용했으며 기술도 좋은 도공들을 보냈지만 번번히 실패였다고 했다.
이 고려다완을 후세에서 재현해 보기 위해, 실제 고려다완을 보여주고 일본인 작가와 한국인 작가가 각각 재현을 한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 결과 한국 작가들의 작품의 훨씬 뛰어났다고 했다. 이 고려다완에는 한국적인 어떤 센스가 들어가야만 진짜 고려다완이 완성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또한 다완에 대한 평가는 다완에 차를 담아 직접 들고 마시면서 그 다완의 무게와 입술과 다완이 닿는 감촉을 모두 함께 느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수레 가득 은을 싣고 와도 구하기가 힘들었다는 고려다완. 일본인을 열광시킨 그 한국적인 센스가 무엇이었을까? 관장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어려워지는 수수께끼 같았다. 설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허남린 교수님께서 고급스러운 어휘를 쓰시며 최대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통역해 주셨다. 나는 관장님의 설명과 교수님의 통역을 동시에 들으면서, 그 수수께끼의 힌트를 하나씩 얻어가는 기분이었다. 고려다완과 그것을 빚어낸 무명의 도공들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타니 관장님의 말과 표정 그리고 몸짓 속에도 스며 있었고, 허남린 교수님은 그 말 사이의 쉼표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담담하고도 정제된 어조로 정성을 다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스승의 공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분은 한평생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를 무심한 듯 이야기하시고, 다른 한 분은 그 이야기를 애틋하고 섬세하게 다시 살려내 우리에게 정성스레 건네주시는 모습. 나는 문득 고려다완도 이렇게 탄생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지적 호기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런데 옆에서 함께 듣던 선생님들은 어느새 조금 지루해 보였다. 졸음과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고 계셨다. 나는 혼자만 이 이상한 수수께끼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쩍 웃음이 났다.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미술관을 나왔다.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철학의 길로 향했다. 고려다완과 철학의 길이라… 통하는 지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철학의 길을 걸으면서 고려다완을 철학해 보자. 논리는 잠시 넣어두고, 상상력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부터 떠올려 본다. 예나 지금이나 그 시간은 일상의 쉼표와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요와 여유를 느끼며 생각과 감정을 맑게 걸러주는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비움’의 시간. 그 비움을 통해서 나를 채우는, 불완전한 상태를 통해 완전함에 다가가려는 그런 시간이 차를 마시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와비사비侘び寂び의 세계관을 아직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소박하고 투박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고려다완을 통해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균형 잡히지 않은 형태, 투박하게 발린 유약, 정제되지 않은 빛바랜 색감이 일본 다도와 만난 지점에서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고 그들은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걸작이 탄생했구나! 기가 막히게 성공적인 협업이었다. 철학의 길에서 수백 년 전의 고려다완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안내해 주는 것 같았다.
———————————————————–
◎ 노무라 미술관(野村美術館)
주소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 시모카와라초 61
노무라 미술관은 1984년 일본의 금융 재벌이자 노무라 증권 창립자인 노무라 토쿠시치 2세(野村徳七)의 예술품 컬렉션을 바탕으로 개관하였다. 이 미술관은 일본 전통문화의 미(美)를 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약 1,700점에 달하는 유물과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소장품은 다도구(茶道具), 노가면과 노의상(能面・能装束), 회화, 서예, 불교 미술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7점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9점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세손 슈케이(雪村周継)의 「폭풍우」, 「삼십육가선도(三十六歌仙絵巻)」 등 일본 미술사에 큰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 건물은 전통적인 스키야(数寄屋) 양식을 기반으로 지어졌으며, 실내에는 정갈한 다실이 마련되어 있어 일본 다도문화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미술관을 둘러싼 정원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예술 감상과 더불어 교토 특유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
(4) 걷기 : 철학의 길(哲学の道)
교토에 위치한 철학의 길은 약 2km 정도 이어지는 산책로다. 남선사(南禅寺)에서 시작해 은각사(銀閣寺)까지, 잔잔히 흐르는 비와호 수로(琵琶湖疏水)를 따라 걷게 된다. 이 길은 봄이면 벚꽃이 만개해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들었지만, 우리가 찾았을 때는 초록의 나무들이 길을 푸르게 덮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곳에서 일본 철학 세미나를 함께했던 송연옥 선생님이 합류하셨다. 온라인에서 뵙던 그대로 인자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를 지닌 분이셨다.
철학의 길은 작고 아담한 느낌을 준다.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 비온 뒤라 진한 초록의 나뭇잎이 내내 우리와 함께 걷는다. 많은 사람들 사이로 느긋해 보이는 고양이들을 만나고, 수로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들을 만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몸과 마음을 정돈하는 일인 것 같다. 발바닥으로 땅과 만나고, 호흡으로 이곳의 공기와 만나며 신체와 공간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철학의 길에 온 만큼, 풍경 속에서 나의 걸음과 호흡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가방이 엄청 무거웠다. 아까 박준상 선생님이 가방 들어주신다고 했을 때 그러자고 할 걸 그랬다. 진진 선생님 가방의 표정이 안 좋아서 그쪽으로 도움을 양보했는데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정말로 가방에 표정이 있었다. 뭉크의 ‘절규’를 닮은 그 표정) 시간이 빡빡해서 걷는 동안 만나는 상점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다.
뒤쳐져 걷고 있었는데, 내 뒤 멀리서 이연숙 선생님과 송연옥 선생님이 다정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산책을 시작할 때부터 나란히 걷는 두 분의 모습은 흐르는 물이나 생기로운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고 이 길의 풍경의 일부처럼 보였다. 풍경이 완성되는 이유는 잘 설명이 안 되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어느새 산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주차장까지 다시 걷기에는 꽤 먼 거리까지 왔다. 허남린 선생님, 진진 선생님, 박준상 선생님이 택시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이곳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잠깐의 여유가 얼마나 고맙던지. 남은 일행 몇 명은 바로 앞에 보이는 아담한 과자 가게에서 번개처럼 간식 쇼핑을 했다.
———————————————————–
◎ 철학의 길(哲学の道)
주소 :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조도지이시바시–냐쿠오지바시
철학의 길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책길로, 난젠지(南禅寺) 근처에서 시작해 긴카쿠지(銀閣寺)까지 약 2km에 걸쳐 이어진다. 비와호 수로(琵琶湖疏水)를 따라 조성된 이 길은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 사계절 내내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수로 옆으로는 정갈한 길이 이어지고, 양옆에는 아기자기한 찻집, 전통 상점, 갤러리 등이 늘어서 있어 교토 특유의 정취를 더해준다.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은 일본 근대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에서 유래했다. 그는 교토대학에 재직하던 시절 이 길을 따라 매일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다고 전해지며, 그의 철학이 길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이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 길을 사랑하며, 지금은 교토의 정신문화와 예술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책길 남쪽에는 웅장한 삼문(三門)과 고요한 정원이 아름다운 난젠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에이칸도(永観堂), 한적한 선종 사찰 호넨인(法然院)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 끝에는 은각사로 널리 알려진 긴카쿠지가 있어, 산책의 여정을 더욱 뜻깊게 마무리할 수 있다.
———————————————————-

(5) 동료와 만찬 : 교토역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 이날의 저녁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이번 답사의 마지막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남린 선생님께서 예약해두신 교토역 안의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복잡한 교토역에서 허남린 선생님의 걸음이 아마 가장 빨라 보였다. 선생님의 보폭은 허기진 우리를 살펴주시는 마음만큼 컸다. 나는 사실 배가 고파서 어디를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앞서는 선생님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마음으론 어서 식당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식당으로 이동하며 선명하게 남는 한 장면이 있다. 바로 박준상 선생님과 송연옥 선생님의 모습이다.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식당으로 가는 내내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답사 첫날 진진 선생님은 친절하고 똑똑한 박준상 선생님이 모범적인 사윗감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바 있다. 딸 가진 엄마들은 맞는 말이라며 동조했는데, 이날 보니 송연옥 선생님도 그에 못지않은 친화력을 보여주셨다. 오늘 처음 만났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울 만큼, 두 분의 케미가 참 잘 맞아 보였다. 우리는 전부터 알던 사이 아니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다. 길게 연결된 테이블에 일행이 둘러앉고, 마침내 만찬이 차려진 것 같았다. 말 육사시미와 이름 모를 전골 요리가 눈앞에 놓였다. 전골은 풍미가 진한 육수에 부드러운 고기와 두부, 양배추, 부추가 어우러진 건강식 같기도 하고, 술안주로도 좋을 것 같은 메뉴였다. 답사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모츠나베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음식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단체사진을 남겨야 할 것 같아, 직원분께 부탁드려 기념사진도 남겼다.
우리는 답사 마지막 날인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연숙 선생님께서는 자리를 바꿔가며 앉자고 제안하셨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러셨던 것 같다. <일본철학사상> 세미나에서도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공간을 함께 채우기를 바라셨다. 선생님의 제안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끝나는 게 아쉬운 시간이었다.
식사 후 우리는 교토역을 잠깐 둘러보았다. 어디가 어딘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이 건물 자체가 어마무시하게 크고 길이 어떻게 통하는지 복잡해보였다. 멀리 교토타워도 보였다. 교토는 나에게 극적으로 다가온다. 어디는 압도적으로 크고, 어느 곳은 굉장히 소박하다. 우리가 다녀온 사찰에서 경험했듯이 현대와 과거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같은 지역에서 여러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점은 흥미로웠다.
이제 이곳에서 송연옥 선생님은 댁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했다. 모두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선생님은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오늘 하루 동료로 함께 했던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언제 또 뵐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아있는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또 언제 같은 마음으로 모여 답사를 할 수 있을까하고. 만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시작하는 날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잘 수습되었고 모든 일행 덕분에 답사가 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못다 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다른 일행들은 어쩐지 시간만 있었다면 밤이라도 새울 것 같았다. 나는 이 밤의 끝을 잡아보고 싶었지만 피곤함에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