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아시아 Asia
[일본철학답사 – 탐구생활] DAY 5_ 영성 답사로 정화(淨化)의 의미를 생각하다
이기헌
(1) 신앙 :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
답사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작년 일본 답사 일정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날이 정말 올까 싶었는데, 어느새 정신없이 여정의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오전 답사 장소를 다녀오면 답사 전체 일정이 끝나기 때문에, 짐을 싸서 호텔 프론트에 맡기고 근처 히가시 혼간지로 향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아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답사에서 방문한 사찰들은 모두 그 규모가 대단했는데, 히가시 혼간지도 그 웅장함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진한 갈색의 나무 기둥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입구는 첫인상부터 압도적이었다. 이곳은 정토진종의 본산으로, 신란(親鸞; 1173~1263)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신란은 인간의 힘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던 사람이다. 아미타불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통한 것이었다. 힘없는 민중들이 천태종이나 진언종에 대척하는 종교로 혼간지를 많이 선택했다고 한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혼간지를 지키고, 애쓰며 각자의 소임을 다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종교가 민중들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종교의 종류는 선택할 수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신성한 힘에 의지해야 했던가보다.
어마어마한 히가시 혼간지 아미다도(阿弥陀堂) 안으로 들어갔다. 답사 내내 만난 모든 사찰은 입구에 동전함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이연숙 선생님을 따라 동전을 넣고, 기도를 드렸다. 이전의 기도는 복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다면, 답사의 마지막 장소에서는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혼자만의 의지로 된 일이 아니라, 답사팀 모두와 하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기도의 내용 때문인지, 횟수 때문인지, 곧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전보다 더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미다도 내부는 천장이 높고, 건물을 둘러싼 모든 기둥들이 육중하고 견고해 보였다. 보통 사찰의 제단은 가운데에 마련되어 있다면, 이곳은 한쪽 벽면 전체가 화려한 금색으로 치장되어 있고, 그 안에 신란의 목조상, 초상화 등을 모시고 있었다. 이어 복도를 통해 들어간 옆 건물 고에이도(御影堂)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화려하다는 표현을 넘어, 공간 전체가 금색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불당 내부의 화려함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정토진종의 신앙에서는 아미타불의 세계인 ‘극락’이 찬란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묘사되는데, 본당 내부의 금빛 장식과 정교한 조각들은 바로 그 이상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부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의자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 사이로 승려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허남린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시기 전까지는 전혀 승려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의외의 차림새였다. 머리카락을 기르고, 마치 가운처럼 보이는 의복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사찰에서 승려에게 주택을 제공하기 때문에 승려가 결혼 상대로 인기가 많은 직업이라고 하셨다. 여승들 대부분 결혼을 한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승려의 결혼이 불가능하고 엄격한 계율을 따르는 만큼, 일본 승려들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미다도와 고에이도를 잇는 그 중간 지점에는 특별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머리카락 밧줄(髪縄)로, 일본 불교 역사에서 신앙과 헌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1895년 사찰의 대규모 재건축 당시, 무거운 목재 기둥을 들어 올릴 튼튼한 밧줄이 필요했지만, 적절한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사찰의 여성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것을 엮어 강한 밧줄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 히가시 혼간지가 다시 보였다. 헌신이 보여주는 성스러움이 바로 히가시 혼간지였던 것이다. 밧줄 안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기도하는 마음, 공동체를 향한 마음, 그리고 불법(佛法)에 대한 깊은 믿음이 얽혀 있었다. 나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만드는 힘이 신앙이라면, 머리카락 밧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
◎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
주소 :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 가라스마도리
히가시 혼간지는 정토진종 오타니파(真宗大谷派)의 본산으로, 정식 명칭은 “진종 본묘(真宗本廟)”이다. 1602년, 에도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존 ‘혼간지(本願寺)’ 세력을 분할하여, 히가시 혼간지(동본원사)와 니시 혼간지(서본원사)로 나누면서 설립되었다.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658년부터이며, 이후로 정토진종의 중심 사찰로서 그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은 정토진종의 창시자인 신란(親鸞; 1173~1263)의 유골이 봉안된 영묘(御影堂)를 중심으로 신앙과 의례가 이루어진다. 신란이 입적한 뒤 그의 유골은 1272년 교토 히가시야마의 오토코야마(男山) 근처에 처음 안치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이장을 거쳐 지금의 히가시 혼간지 경내로 이관되었다. 이 영묘는 신도들에게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신란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정신적 중심지이자 순례의 성지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참배와 기도를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이 사찰은 웅대한 목조건축물로도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미에이도(御影堂)는 세계 최대급 규모의 나무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거대한 건물을 건축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재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특히 무거운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된 특별한 ‘머리카락 밧줄(毛綱)’이 유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건축 현장에서 일반 밧줄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끊어지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지켜본 여성 신도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바치며 밧줄을 엮었다고 한다. 이 머리카락 밧줄은 신도들의 헌신과 신앙심을 상징하는 유물로서 지금도 경내에 전시되어 있으며, 히가시 혼간지의 정신적 유산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물은 단순한 공사 도구가 아니라, 신심(信心)이 만들어낸 공동체적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2) 답사를 마치며
우리는 히가시 혼간지를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이제 답사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 호텔 로비에서 김문용 선생님께서 선물하신 맛있는 크렘브륄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번 답사로 처음 알게 된 아이스크림인데 맛이 있어도 너무 맛있다. 동시에 우리는 돌아가면서 답사에 대한 인상을 나누었는데, 모든 이야기가 달달한 이유는 아마 아이스크림 당 충전 덕분일 것이다.
공항으로 떠날 시간. 렌트카를 반납하고 간사이 공항에 들어서니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다. 배는 고픈데 공항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진진 선생님과 박준상 선생님은 밥버거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최옥현 선생님은 선물을 사러 쇼핑에 나섰다. 김문용 선생님은 다른 비행기를 예약하셔서 출국 심사 후, 곧 우리가 있는 게이트로 오시기로 했다. 시간은 별로 없는데, 밥도 먹어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하고, 만나야 하고 등등 마지막 까지도 느슨할 틈이 없었다. 오선민 선생님이 특히 그런 것 같았는데, 노트북을 켜고 무얼 하시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답사기 계획을 정리하셔서 단톡방에 보내셨다. 번개처럼 빠른 선생님의 실행력은 어디서나 빛을 발한다. 다행히 밥버거는 차질없이 소화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의 답사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했다. 불교에서 수행자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계율을 지키며 말과 행동을 다듬고, 명상으로 마음을 정돈하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려는 정화(淨化)의 작업이라고 여긴다. 나는 문득 우리의 영성 답사도 정화 의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를 준비하고, 길을 걷고, 부딪히고, 사유하며 우리는 고요하고 성스러운 곳을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던 기도도, 반복될수록 그 어색함은 서서히 옅어지고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답사는 성스러움에 한발 다가가는 시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