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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모든 것의 새벽(4)] 후기 – 자연을 설득하는 길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25-06-26 01:17
조회
84

모든 것의 새벽(4)_6장 아도니스의 정원후기 2025.06.26

김지영


자연을 설득하는 길


6장의 제목은 ‘아도니스의 정원’이다. 아도니스 정원에는 쓸모 없는 것들이 길러진다. 축제 때 잠깐 쓰였다가 버려질 작물들 같은 것 말이다. 이 정원 안에서 길러지는 것은 재배용이 아니다. 그레이버는 신석기 시대에 농사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주장하며, 그 상징으로 아도니스 정원을 가져온다. 신석기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정착 생활을 했지만, 그들이 정착한 땅을 논이나 밭으로 이용하지 않고 텃밭으로 사용했다. 이 장에서 저자는 신석기 시대의 ‘재배’의 이미지를 바꾸고자 한다.


“그들은 밭을 고정적으로 정해두기보다는 호숫가와 샘물가의 충적토를 이용했는데, 그 장소는 매년 달랐다. 그들은 나무를 베고, 밭을 갈고, 물을 길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노동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을 위해 해주도록 자연을 ‘설득하는’ 길을 찾았다. 그들의 방법은 지배와 계급 분류의 과학이 아니라, 굽히고, 달래고, 보살피고, 어르는 과학이다.” (『모든 것의 새벽』, 337쪽, 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 김병화 옮김, 김영사)


농사는 식물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제멋대로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어떤 형태의 지배나 통제’를 가하게 된다. 땅에 박힌 돌을 걸러내고, 물길을 내어주며, 잡초를 제거해줘야 한다. 재배 뒤에도 탈곡과 키질을 해줘야 한다. 도토리가 널려있고, 얕은 강가에 연어가 가득한 환경에서 그들이 굳이 힘들게 자연을 길들일 이유가 있었을까? “수많은 일을 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들은 길들임 대신에 자연을 설득하는 길을 택했다. 자연이 알아서 쟁기질을 해주고, 대신하여 토양을 갈아주는 땅을 찾는다. 자연을 타이르는 관리자는 자연스레 크게 할 일이 없어진다.

자연을 길들이는 농부와 설득하는 텃밭지기 각각 떠올려보자. 통제하고 억지로 따르게 하는 농부는 농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불안해질 것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거나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자연을 통제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자연에 종속되어진다. 자연을 설득하는 텃밭지기의 이미지는 어떤가. 본인이 하는 일보다 자연이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자연에게 그 일들을 해달라고 달래는 모습이 떠오른다. 텃밭지기의 농법은 매우 부담이 적다. 오히려 자연과 평등하게 관계를 맺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평등함 속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텃밭을 설득한 자는 누구였을까? 저자는 재배뿐만 아니라 건축, 수학, 종교 등에서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선민샘은 그레이버가 ‘권력자로서의 여성’의 이미지를 ‘연구자이며 과학자로서의 여성’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힘과 통제로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선민샘의 용어를 빌리면 ‘가장 많은 이해’를 품고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후기를 쓰다 보니 권력자는 길들이는 농부와 비슷하고, 과학자는 설득하는 텃밭지기와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인류학 공부를 통해 ‘단어’들을 곱씹어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길들인다’와 ‘설득한다’는 표현을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거 같다. 설령 있더라도 ‘사람’에게만 쓰던 말을 ‘자연’으로 넓혀보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즐거웠다. 자연을 설득한다는 말, 참 멋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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