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활기찬 모험 농사 (에세이 수정)
동화인류학 에세이 2025-5-31 김유리
산호섬 경작지의 주술 속으로
(펜대를 움켜쥐고 소리지르며 활기차게 달려든다)
모험의 시작
: 올해에 우리는 더욱 훌륭하게
산호섬의 경작지에서 두 개의 차원이 열리는 계절이 오면, 농부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모험 속으로 뛰어든다. 브로니슬로 말리노프스키의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경작법과 농경 의례에 관한 연구)』(유기쁨 옮김, 아카넷, 2012)에서 경작이 모험이 되는 비밀을 탐구해보자.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땅을 향하는, 땅속 깊은 곳을 향하는,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견고하게, 견고한 정박지를 향하는 길을 보여주소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제1권, 243쪽)
산호섬 농부들은 농사일에만 매달리는 직업 농부가 아니다. 농사의 계절은 축제의 계절과 맞물리며 교대로 돌아간다. 카누 여행, 춤 축제, 사교와 구애, 장례식, 의례적 싸움 등의 활동을 영위하다보면 문득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농사철이 다가온다. 이때를 상상해보자. 마을에 화톳불이 커다랗게 지펴지고 주민들이 와서 앉는다. 야자나무들이 수십미터 높이의 기둥처럼 서서 마을을 굽어본다. 최근에 공동으로 개축한 족장의 얌 창고가 중앙광장을 에워싼 여러 얌 창고 중에서 돋보인다. 족장과 주술사가 존재감 있게 앉아 있다. 젊은 후계 그룹과 함께 파렴치한 적대자도 보인다. 경작지 주술사 바기도우가 일어나 농사철이 왔음을 큰 소리로 선언한다. “좋다! 경작을 시작할 시간이 왔도다.”(1권, 227쪽) 그는 작년에 농작물은 훌륭했고, 얌 창고를 채웠고, 음식을 먹었고, 분배를 수행했고, 모든 마을에 풍성한 식량을 주었다고 자평한다. “올해에도 얌 창고들은 채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올해에 우리는 더욱 훌륭하게 경작지를 일굴 것이니라.” 경작 주기를 개시하는 연설이다. 때가 왔는지 바기도우는 어떻게 알까? 산호섬에는 달력도 없고, 일기예보도 없는데. 나는 무슨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경작지 주술 체계가 농사 달력이고, 바기도우는 경험이 풍부하고 훌륭한 기상학자인데 말이다. 건조한 무역풍과 몬순 우기가 교대하는 리듬을 타고 산호섬의 경작 주기가 돌아간다. 경작을 개시하는 복잡한 준비 의례를 마치면 농부들은 길게 끄는 소리를 외치면서, 저마다의 ‘치료된’(주술을 걸었다는 의미) 농기구를 움켜쥐고 자신의 밭으로 달려나간다.
트로브리안드 섬의 농기구는 단 네 가지다. 그곳의 농부들은 끝을 뾰족하게 깎은 긴 막대기로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파종할 구멍을 판다. 뾰족한 돌도끼와 납작한 까뀌는 덤불을 치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앞에 말한 막대기 끝을 깎는 데 쓴다. 네 번째 도구는 손이다. 이 손으로 얌의 덩굴손을 유인할 뿐 아니라 잡풀을 뜯고 화전 잔해를 치운다. 농사 도구가 이게 다냐고? 다다. 얼마나 통쾌한가! 트로브리안드에서는 ‘장비빨’로 미숙한 실력을 보완하지 않는다. 쇼핑으로 빠져나가는 관심과 에너지를 오롯이 나의 정원과 실력 함양에 쏟아 부을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질지 모른다.
경작지의 영적 차원
이곳 농부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래, 더 세심하게 작업하고 더 많이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농사 선진 지역 오마라카나에서 지내는 동안 족장의 밭에서 농사를 배웠다. 족장은 매일 경작지에서 일했다. 말리노프스키는 족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따라하면서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고 다정하고 세심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족장이 일하는 태도는 작물과 경작지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다. 말리노프스키가 얌의 품종명을 조사할 때의 일화도 인상적이다. 그는 “수많은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수많은 이름들을 빗발치듯 쏟아내며 내 질문에 답하는 바람에 질겁”(3권, 232쪽)한다. 그들은 경작을 좋아하고 그들이 가꾸는 작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분야에 몰두하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들의 노동에는 소외가 없다.
일의 세계는 영혼과 사물이 관계되는 신비로운 현장이다. 일하는 인간의 영혼은 창조하는 힘에 떠밀리는 듯이 사물들과 연결된다(나카자와 신이치, “모노에 대하여,” 혜원 옮김). 일의 “창조적 힘”이 그를 통과해 흘러가는 사이에 그의 조심스러운 손끝이나 유심히 관찰하는 눈앞에 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 있다. 개체들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이 가득 차오르며 많고 다양한 몸들이 이 세상에 새로 생겨난다. 그는 이제 새로 나온 것들로 다시 짜여진 조금 다른 세상으로 옮겨져 있다. 그 세계 안에서 그 자신도 이미 다른 사람, 이를테면 농부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다.
산호섬에서 경작은 영적인 차원을 지닌다. 경작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중요한 일련의 주술과 결합”된다(163쪽). 주술과 실제적인 농작업은 토착민의 생각 속에서 분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혼동되지도 않는다. 경작지 주술과 경작 작업이라는 두 개의 차원이 “하나로 엮인 일련의 꾸준한 노력”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합쳐져서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말리노프스키는 주술과 작업이 한 이야기 속의 복수의 테마라고 설명한다(176-77쪽).
농사일이 도구를 다루어 자연에 개입해 들어가는 기술이라면, 주술은 기술에 대한 제어 기술이다. 그렇다. 주술도 기술이다. 주술은 영혼에 개입해 들어가는 기술이다. 주술은 기술을 사람다움과 부합되는 방식으로 길들이는 메타-기술이다. 경작의 계절에 경작지에는 물질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이 동시에 열린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주민들은 용감하고 노련한 모험가처럼 경작의 세계로 뛰어든다. 주술사가 이 모험에 동행한다. 깊은 땅속으로부터 헤치고 나오는 비옥하게 하는 힘에 휩쓸려 너무 멀리까지 떠내려가 돌아오지 못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주술은 영혼의 길잡이 기능을 한다.
길을 잃을 위험
: 욕심과 피로가 자기를 채울 때
일을 할 때 우리는 한결같지 않다. 조건과 상태에 따라 일하는 중에 우리는 무수한 경로로 접어들 수 있다. 주술을 일에 촘촘히 엮는다는 것은, 인간이 일을 하는 경험 속에서 집단적으로 발견한 최선의 경로가 있고, 그 경로를 안내할 길잡이와 함께 모험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풍요의 힘을 풀어내는 데 쓰이는 기술에는 이면이 있다. 기술을 휘두르다보면 더 얻어내고 싶은 욕심에 영혼이 팔릴 위험이 있다. 경작의 성과가 자기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하는 오만에 빠질 수 있다.
산호섬에서 인간의 됨됨이는 사적 욕망, 즉 ‘악’에서 멀어지는 것과 관계있다. 토착민들은 백인들이 고구마를 들여오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고구마는 안정적인 수확을 가능하게 하는 작물이므로, 기근의 위험도를 크게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신화도 없고 주술도 없는 고구마가 어떤 영력의 휘하에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경작지에 태만과 부주의와 같은 해로운 기운을 불어 넣을지도 모른다. 농사가 부진한 해에 여자들은 마을숲에서 먹을거리를 채집해 온다. 고구마의 도입은 그러한 생태적 지식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토착민들은 고구마 재배법을 배워 알아 놓기는 하지만, 수확물은 돼지에게 먹으라고 던져준다. 또한, 토착민들이 축제용 코코넛 열매를 모으기 위해 나무에 금식 터부를 거는 것을 본 백인 정부가 (선의에서) 매년 백 그루씩 추가 식재하라는 규칙을 부과했다. 이 규칙은 토착민들이 공동 금식 기간에 집단적 절제를 배울 기회와, 금식이 풀려서 코코넛 야자를 실컷 먹는 풍요를 경험할 기회를 앗아간다.
한편, 주술은 과로한 몸과 마음을 치유해 활기를 되찾아준다. 농부라면 누구나 풍요를 바라지만, 기나긴 농사의 과정에는 언제나 포기하고 싶게 하는 장애와 해도 안 될 것 같은 의기소침이 따라붙는다. 무더위에 지치고, 가시에 찔린다. 작물이 병들거나 짐승이 들어와 밭을 망쳤다면 낙심할 것이다. 그러나 농부들이 좌절하고 녹초가 된 경작지에 언제나 주술사가 함께 있다. 그는 전체 경작 과정에서 어려움을 예상하고, 희망찬 미래를 앞당겨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주술 문구는 지시적인 말도 반성하는 말도 아니다. 주술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확언함으로써 모두를 이끌어 갈 방향을 설정한다. 주술의 언어에는 성취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 경작지 주술은 당대의 농부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선배 농부들처럼 농사의 계절을 완주하도록 돕는다.
주술은 욕심과 실망감을 비워낸 ‘마음 밭’을 풍요의 힘찬 흐름으로 채운다. 자기 밭 상황에 울고 웃는 와중에도 농부들은, 주술사가 밭 네 귀퉁이에 세운 주술 기둥에 몸을 붙이고 오래오래 주문을 읊는 장면을 항상 보고 있다. 경작지 주술은 농부를 밭에 혼자 두지 않고, 침묵 속에 방치하지도 않는다. 주술은 개별 농부들 안에 농사 정신을 불러일으키고 모두의 신화적 근원인 땅과 연결한다. 이러한 위력은 태곳적에 땅에서 유래했다는 경작지 주술이 살아 있는 인간의 음성을 통해 현재 발화되기 때문에 발휘된다. 작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자연의 일인 데 비해, 주술은 인간에게 속하는 일이다. 경작지는 자연과 주술의 공동 작업장이다. 주술의 소리 파장 안에서 경작지에 관계된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살아나 결부된다.
훌륭한 농부에서 게으른 농부까지
훌륭한 농부는 기술에 능숙하고 주술을 깊이 이해한다. 그의 마음은 비워지고 활기로 채워진다. 그는 조짐에 귀기울이면서 적시에 적절하게 행동한다. 경작은 물질 차원과 영적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두 차원을 동시에 보는 농부는 도구를 다루는 실력, 시련을 감당하는 용기, 욕심과 오만의 절제라는 미덕을 갖춘 사람이다. 움켜쥔 막대기는 신체의 연장이면서 신체 바깥과 연결되는 사물이다. 경작지에서 농사용 막대기와 주술 지팡이를 들고 땅을 두드리면 땅의 풍요의 신비로 이어질 길이 열린다. 이 길을 어떻게 통과해낼 것인지는 수준별로 다르다. 가장 탁월한 농부(“경작지에서 휘두르는 자”)로부터 게으른 농부(“경작지에서 녹초가 된 자”)까지 빠짐없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공적 주술의 임무다. 농부들이 농사 주술을 깊이 안다는 것은 자기가 이끌려 갈 소리를 안으로 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탁월한 농부는 경작의 두 차원을 깊이 알고 훌륭하게 겪는다.
산호섬의 경작지 주술은 완전히 공개적이며 공공의 것이다. 경작지 주술사는 마을 소속의 세습 공무직이다. 농사의 계절이 마감될 때까지 그는 한 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주술사는 올해 농사도 무탈하게 잘 되기를 바라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빠진 곳 없이 주문을 외어 기운을 불어넣고 약초 배합 재료를 문질러 넣고 주술 지팡이를 휘둘러야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주술사를 보고 있다. 모두가 주문 소리를 듣고 있다. 주술사는 한 사람이지만, 어린 아이들까지 주술 의례의 순서와 내용을 잘 안다. 경작지 주술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고, 일부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특권적 요소는 없다.
산호섬의 경작은 금욕적인가?
: 예술의 길
산호섬에서 농사는 잘 지어야 하고, 농사를 잘 짓는 것은 “올바르고 자랑스럽고 바람직한 일”(211쪽)이다. 농사를 잘 지으면 수확이 많고, 정원이 아름답게 변한다. 덩굴이 ‘돌고래가 노는 것처럼’ 휘감아 뻗어가고 크고 둥근 잎들이 ‘거미줄을 친 것처럼’ 무성하게 밭을 뒤덮을 때 농부들은 물질적인 전망에서만이 아니라 심미적인 것에서도 큰 기쁨을 맛본다. 경작지들은 일종의 예술 작품이다. 그들은 예술가의 기쁨을 느끼고, 공동체는 그러한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주술의 영향 아래 활기차게 불러일으켜진 경작 정신은 농부들을 고양시킨다. 끓어오른 에너지에 방향을 지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산호섬에서는 규모를 늘리는 것에도, 농작물을 사적으로 축적하는 것에도 제약이 있다. 이 사회는 경작의 심미적 영역에서 개인의 욕망을 마음껏 전개하도록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오선민 선생님). 우리가 화폐 가치를 중시하듯이 그들은 심미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산호섬 농부들은 순전히 심미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경작지를 깨끗하게 치우고 멋지고 아름답게 가꾸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기술적인 근거에서 엄밀하게 요구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작업한다. 작업을 완수하면 상당한 즐거움을 맛본다. 토착민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형태성’의 완성도는 자연과의 공감력, 관계력, 시의적절성으로 달성된다. 여기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E. F. 슈마허의 통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분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자가 자기 작업장을 쾌적하고 훌륭하게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낭비이고 사치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산호섬의 경작은 식량의 ‘생산’에 국한되지 않은 전일한 인간 활동이 되는 것이며, 말리노프스키가 산호섬 경작 활동을 ‘농업(agriculture)’이 아니라 ‘가드닝(gardening)’이라고 부른 것은 적절하다.
여담 : 동기부여라는 신비로운 힘
산호섬에서 경작지를 훌륭하고 보기 좋게 가꾸는 것은 누구라도 자존심을 걸고 도전할 만한 일이다. 산호섬에서는 농사라는 일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실하다. 소년들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농사에 도전한다. 오마라카나 마을에서 말리노프스키의 천막에 자주 오는 브워이사브워이세라는 꼬마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말리노프스키가 보기에 아주 작아 보였고 아마 여섯 살이 채 안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는 비스킷 깡통 위에 앉아 말리노프스키의 천막 안에서 진행되는 일을 즐겁게 지켜보곤 했다. 아이들이란 다른 이들을 유심히 보기를 좋아하는 존재들인 것 같다. 언젠가 말리노프스키는 경작지를 지나가다가 브워이사브워이세의 밭을 지나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소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 믿게 된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자기 밭을 자기 손으로 일구는 데 진지하게 몰두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그마한 경작 도구를 갖추고 많은 시간 일을 하며, 수확물을 보관할 미니어처 얌 창고까지 있다. 이곳 아이들에게 경작은 가벼운 놀이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강렬한 야심의 문제”(173쪽)다. 생각해보면 놀이와 일을 왜 분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놀이는 기술을 익히는 왕도다. 도구를 다루는 감각과 함께 연관된 정확한 말 사용법도 익힌다. 자기 밭을 일구며 다른 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주의를 기울일 줄 알게 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흙과 작물과 날씨와 계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농사를 중요한 일로 여기고 중요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길러진다. 농사를 통해 길러지는 것은 작물만이 아닌 것이다.
모험의 끝은 보물 잔치
수확물 전시와 창고 채우기 의례를 끝으로 농사의 계절이 마감된다. 이제 주술사는 휴식한다. 축제의 계절이 시작된다. 경작지에서 쏟아져 나온 보물로 잔치가 열린다. 어떤 보물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왔나? 풍성한 수확물, 조상들에게 바칠 새 음식, 더욱 예리해진 주술, 부쩍 자라난 아이들, 마을의 떠들썩함과 다툼까지도……. 삶을 살아갈 만하게 만들어주는 이 모든 것이 값지다. 풍요가 마을에 흐른다.
농사를 왜 짓느냐고 묻는 것은 모험을 왜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농사가 짜릿한 모험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고, 나는 잊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어떻게 그들은 잊지 않을 수 있었을까? 철마다 반복되는 주술 문구의 연행(演行) 때문이다. 경작지 주술이 고전이라면, 주술 의례는 연례 공개 낭송이다. 주술사는 경작지를 누비며 여봐란듯이 주문 문구를 읊는다. 뜻 모를 소리들을 단조롭게 중얼거리는데 이 소리가 경계를 뚫고 들어가고 일의 세계를 물들인다. 일의 세계에는 소리가 있다. 말없이 하는 일은 사적인 창고를 채우는 일처럼 혼자 하는 일이다. 소리가 끊어진 곳은 혼자 하는 일들의 세계다. 연결하는 길들이 끊기고, 차원들이 닫히고, 통로들이 막히고 저마다 자기를 채우기에 급급해진다. 산호섬의 경작지 주술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인 길을 여는 주문을 외우며 글을 마무리 한다.
바투비 바투비 바투비 바투비 비투마가 이-마가
바투비 바투비 바투비 바투비 비툴롤라 이-롤라.
(분명하고 곡조가 있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3권, 471쪽과 5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