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쿠노 카츠미] 벽과 연결통로—애니미즘을 둘러싼 두 가지 태도(3/3)
일본어 강독팀에서 읽은 오쿠노 카츠미의 『モノも石も死者も生きている世界の民から人類學者が敎わったこと』(『물건도 돌도 죽은 자도 살아 있는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인류학자가 배운 것』)을 연재합니다. 이한정 선생님의 지도 아래 오선민 선생님, 김미향 선생님, 조혜영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애니미즘 연결통로에서의 무한루프
이키리라는 이름의 소년은 곰을 기르며 사는 투문치 일족이었다. 투문치는 자신들이 강하기 때문에 곰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아이누가 하는 것처럼 곰보내기를 하지 않았다. 새끼곰은 사육해 길렀지만 남은 음식만을 줘서 괴롭히고 크면 잡아먹을 뿐이었다.
어느 날 이키리는 숙부를 따라 곰 사냥을 갔다가 어미곰에게 곰 동굴로 안내된다. 거기에는 두 마리의 새끼곰이 있어서 형제가 되어 함께 산다. 모두 함께 노는 동안 상처에서 기인하여 검은 털이 생기고 이키리는 곰이 된다. 산에서 산으로 뛰어노는 동안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기 전에 동면하고, 봄이 되자 이키리는 어미곰으로부터 쫓겨나서 독립한다.
어느 날 이키리인 곰은 인간과 맞닥뜨린다. 화살에 맞아서 본래 인간인 이키리로 돌아온다. 투문치 마을에 돌아와 이키리는 어미곰과 형제들에 관한 것을 모두에게 들려주고, 사냥을 한다면 곰 영혼이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곰보내기를 하도록 부탁한다. 그러나 투문치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아이누 같은 일은 할 수 없다고 계속 버티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곰을 잡을 뿐 결코 곰보내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슬퍼진 이키리는 높은 벼랑에서 몸을 던지고 그 영혼은 바른 자들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난다(이케자와 2003).
이케자와는 에도시대 말기에 홋카이도에 들어왔던 선조와 아이누와의 교류를 문학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이케자와 2003)에서 얻은 아이누의 곰보내기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하여 이 창작신화를 자아냈던 것이다. 상처를 내는 것은 아이누에게 있어서 ‘죽음’을 의미하고 영혼이 그릇 등의 물건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재촉하는 관습이라고 여겨진다(나카가와中川 2019: 145). 『곰이 된 소년』에서는 곰과 놀고 있는 동안 상처를 입음으로써 이키리가 곰이 되고 화살의 상처에 의해 곰이 이키리로 돌아온다고 하는 두 번의 ‘변신’을 통해 사람→곰(신)→사람이라는 루프가 완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키리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보내는 것으로 바른 자들의 나라, 즉 신의 세계로 떠났던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다시 루프의 다음 국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사람→곰(신)→사람→곰(신)이다. 이것은 어쩌면 다음 국면으로 재진입하는 것을 더욱 예감하게 만든다.
사람→곰(신)→사람→곰(신)→사람……
사람과 곰(신)의 연결통로는 걷고 있는 동안에, 모르는 사이에 다른 세계로 깊게 들어가고 다른 것이 된다고 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될 수 있겠다. 『곰이 된 소년』에서는 사람과 곰(신)이 <뫼비우스의 띠>의 연결통로 상에서 무한의 왕래를 반복한다.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존재자는 곰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다시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존재자로 돌아오거나 한다. 그 루프에 끝은 없다.
무한하게 왕복 운동하는 루프는 아이누 사람들 자신에 의해서도 연구자에 의해서도 다양한 이형(variant)으로 말해진다. 인류학자인 야마다 타카코(山田孝子)는 다른 관점에서 그에 관해 말하고 있다.
시즈나이(靜內)에 사는 한 원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카무이는 사람이며 사람은 카무이이다”. 카무이는 카무이 모시리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살고, 아이누 모시리를 방문하는 때에만 신격화된 카무이가 되어 등장하는 것이다. 역으로 인간은 아이누 모시리에 있어서만 ‘사람’이며 죽은 뒤에 즉 카무이 모시리를 방문함으로써 사람은 카무이로 변태하는 것이다. (야마다 1994: 107-108)
모시리란 대지, 세계, 사는 장소를 말한다. 야마다에 의하면 신들의 세계에서는 신은 사람이지만, 사람의 세계에서는 신이 되어 나타난다. 사람도 사후에 신들의 세계에서 신이 된다. 아이누에게는 신이 사람이고, 사람이 신인 것 같은 세계가 있다. 거기에서 곰은 신과 인간의 무한한 루프에서 하나의 표현 양태이다.
신의 미앙게(선물)―원래 ‘몸을 바친다의 뜻(우메하라 1995: 38)―인 곰의 고기는 사람에게 먹여 사람의 생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은 늙어 죽음으로 시체가 흙으로 다시 돌아감과 동시에 사람의 영혼은 신들의 세계로 향한다. 그래서 사람은 신이 된다. 신은 다시 곰이 되어 미앙게를 들고 사람의 세계로 내려온다. 사람과 곰(신)의 무한 루프 구조는 아이누 사람들의 생명 현상을 향한 직관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그 루프에는 뒤틀림이 들어있다. 그것은 통이나 링과 같이 속과 겉이 구분되는 고리 모양이 아니다. 고리 위를 걸어가는 한, 겉에서 속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속과 겉이 없기 때문에 이편에서 나가려고 하면 모르는 사이에 저편을 통과하여 어느샌가 이편으로 되돌아온다.
겉과 속의 구별이 없이 하나의 연속된 면으로 이루어진 <뫼비우스의 띠> 상에서 이키리가 곰이 되고 곰이 이키리가 되었던 것처럼, 번갈아 가며 사람은 신이 되고 신은 사람이 된다. 신은 사람 앞에서는 곰이 되어 나타난다. 벽에 의해 차단되어 있지 않은 이유로 사람의 세계와 신들의 세계 사이는 겉과 속의 구별이 없는 연결통로로 이어져 있고,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채 남겨진 것이다.
우리는 애니미즘을 막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데 곰을 신으로 삼는, 베링 해협의 동서에 걸친 지역에 사는 선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을 다룬 저서 『곰에서 왕으로』 에서 나카자와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연속적 관계를 상정하는 ‘대칭성 사고’ 확장의 남쪽 한계는 아이누의 세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남하해 가면 인간이 동물에 대해 우위에 서는 ‘비대칭성 사고’가 지배적이 된다고 말한다.
대신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생물권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만은 식물 연쇄의 고리로부터 초월한 존재라고 굳게 믿어 동물들을 자유롭게 가축으로 삼거나, 동물원에 가두거나, 스포츠가 된 사냥으로 동물들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적어도 그러한 점에 의심을 하지 않는 인간이 됩니다. (나카자와 2002: 28)
『곰이 된 소년』에서 아이누보다 남쪽 땅에 살고 있는 것은 두문치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그것은 야마토(大和) 민족일 것이다.
이케자와가 그리는 두문치는 인간의 힘, 자신의 힘만을 믿어 의심치 않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결코 곰보내기를 하는 일이 없고 애니미즘의 연결통로를 벽으로 막고 있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아이누 사람들은 클라크의 SF 소설 「어둠의 장벽」에서 위험시되어 봉인되었던 애니미즘적 세계와 <뫼비우스의 띠>의 연결통로를 통해 교류하고 교환함으로써 애니미즘을 하나의 양식으로까지 고양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애니미즘은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 그사이에 무시(無時)라는 불가사의한 시간이 끼어 있다’(이와타岩田 1993: 144). 애니미즘의 연결과 교환은 무시(無時) 내지는 ‘동시(同時)’에 이루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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