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기말에세이 수정] 신들은 왜 싸웠는가
수요 인문공간세종 대중지성 / 2학기 「세계종교사상사 1」 에세이 / 2025.06.25.(수) / 이성근
신들은 왜 싸웠는가
(순환의 질서로 우주의 이로움을 창조하라)
시대 (시간) | 장소 (공간 지리적 환경) | 누가 싸웠나 (싸움 과정) | 왜 싸웠니 | 결과 |
수메르 BC 5000~ 2000 | 메소포타미아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개방적: 사방이 열려 있어, 다양한 문화가 섞임) | 수메르인 달(난나–수엔) 태양(우투) 금성(이난나:사랑과 전쟁/생명과 죽음 관장) 이난나vs지하세계 언니
| 지하세계에 권력을 차지,죽음 정복/파괴(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죽음을 극복하고자했던 인간의 의지) | 패배 후 남편(인간)두무지의 지하세게 죽음, 모든 창조/생식에는 죽음이 필사적으로 뒤따름 |
아카드 제국 BC 2350~ 2193 | 아카드인(셈족)이 메소포타미아 북쪽에서 내려와 남쪽의 수메로 정복 | 우주창조의 시(에누마 엘리쉬) 티아마트(바다:여성) + 압수(땅을 받치는 민물)의 아들:하늘의 신(에아) 손자: 에아(全知신) 압수 vs 에아 아누+에아+마르둑 vs티아마트 | 아버지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구세대에 반발, 새로운 시대 염원 | 마르둑(창조/현재/지혜) 승리 티아마트(악마/혼돈/원초성) 유해로 하늘과 땅을 만듬, 세계는 이 둘의 혼합물 인간은 악마신 킹쿠의 피로 만들어짐 |
이집트 BC 3000~ 332 | 북아프리카 나일강 (폐쇄적: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임) | 라신(마아트)의 화신 파라오 vs 혼돈/암흑의 뱀(아포피스) | 혼돈에 맞서 질서(ma’at=우주적 생명의 리듬=천체운행, 사계순환, 강의 간조/만조)를 세워 황금시대 완전성 회복 | 파라오 승리 매일 아침 뱀 ‘아포피스’ 내쫓음 완전한 정복은 불가능 |
공정/활력의 오시리스왕 vs 동생 아들 호루스 vs 숙부 | 혼돈/사막/폭풍신 세트의 질투와 권력욕 | 살해 후 부활(환생) 재생, 영속의 힘, 죽음의 정복, 죽은후 인간의 변용이 성취됨 | ||
히타 이트 BC 1700~ 1200 | 오늘날 터키 아시아 최서단 반도 아리아인의 침략으로 제국 형성
판테온(만신전=다신교)
| 폭풍신vs이루얀카(용/뱀)
세대간 갈등 알랄루vs아누(봉사신) 9년후 아누vs쿠마르비(봉사신) 9년후 쿠마르비vs 아누의 子 테슈프 | 용(가뭄, 정지, 죽음)의 지배가 생명 근원은 위협
우주의 지배권 다툼 | 첫대결 패배 이나라 여신과 후파시야 인간의 도움
기존세대의 거센 반발속에 세대교체가 이뤄짐
자녀 세대를 활용하여 복수, 새로운 세대 아이디어 중요! |
이스 라엘 BC 1700~ 586 | 중동, 지중해 동남방 연안,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 | 일방적인 싸움 믿는자(아벨, 욥등등) vs믿음이 약한자/(카인) 복종하지 않으면 벌 받음 | 불족종,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서 | 무조건적인 야훼의 승리 승리하면 할수록 더욱 권한과 무적 |
베다 시대 BC1500-500 | 인도–아리아인이 북인도에 정착 | 숲으로 자신과의 싸움 | 카르마로부터 해방 절대적 자유 | 협력과 위계적 (서로 다른 역할을 맞음) 질서vs비질서 |
그리스 BC1100-146 | 지중해, 해상무역으로 번성, 개방적 | 우라노스vs코로노스(부자) 크로노스vs제우스(부자) 제우스vs프로메테우스 | 기존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지키자vs바꾸자 | 점점 제우스의 중재 로 안정화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원죄> 여성의 카오스 >혼돈속에서 무한한 창조력 구가 |
고대 인류의 신화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끊임없이 치고받고 싸운다. 싸우지 않는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고대의 이야기는 투쟁과 복수와 전투로 점철되어 있다. 신화는 인간이 지어낸, 인간이 믿고 싶어 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이다. 그러한 신화는 다양한 이야기로 전승되고, 오늘날까지 TV 드라마로 각색되어 우리의 말초신경을 달콤하게 자극하고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직접 써나가고, 천하에 알리고 싶은 욕구가 숨어있다. 그것은 수많은 경쟁과 결투의 예술과 스포츠 경연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는 작은 스마트기기를 통해 틈만 나면 우리는 게임을 하며, 우리의 ‘싸움’ 본능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오늘날에 이르기를 ‘싸움’이 왜 필요했을까?
300만 년 전 최초의 구석기 인류가 출연했던 때로 돌아가 보자. 우리 선조들은 처음엔 먹기 쉬운 과일과 열매들을 채취하며 먹었다. 하지만 단백질 부족을 느껴서일까. 인구가 늘면서 더 이상 따먹을 과일이 없었을까. 하여튼 고기 맛을 들인 후에는 본격적으로 동물과 생존이 걸린 혈투를 치렀다. 불이 없었을 때, 인류는 너무나 무력했다. 사자가 남긴 동물 사체를, 하이에나가 싹 다 맛있는 살코기를 발라 먹고 난 후에야 사체의 골수를 먹으며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인간의 약한 전투력은 강한 동물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를 빈번하게 초래했다.
그 후 인류는 특유의 전일적인 사운드로 협력할 수 있었고, 집단 지성을 활용하여 점점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특히 네안데르탈인은 전문화된 인식 능력을 갖추었고, 그들만의 ‘Hmmmmmm’의 노래를 부르며 초월적인 힘을 갖추었다. 사피엔스는 그것마저 뛰어넘어 각기 파트별로 분리된 인식 능력을 통합해서 활용하는 지혜를 터득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몸짓도 크고, 근육이 발달하고 더 멋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피엔스 특유의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맺는 능력’에 밀려 결국 싸우다 멸종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피엔스는 더욱더 잘 싸우게 되었고, 훌륭한 전사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그 수백만 년 전의 DNA가 아직도 우리 인류에게 전해져서일까. 현대 아프리카 오지에서 그들은 거의 사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전사’의 후예가 되고자 한다. 우리 본능에는 야생 늑대의 공격성이 있다.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그런데 안 싸우고 태평 태세를 구가할 수는 없었을까? 보라! 대지에서 풍요롭게 익어가는 곡물을! 식물들은 사이좋게 옹기종기 저마다 자기 열매를 평화롭게 품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과연 그럴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들은 햇빛과 물이 없으면 생존과 번식이 불가능하다. 끝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태양에 가까이하려 한다. 그마저 불가능하면 자신의 기둥을 90도로 구부려서라도 햇빛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심심찮게 누워있는 소나무를 보곤 한다. 그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하물며 물을 향한 뿌리의 경쟁은 어떨까. 동물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포식자를 피하고 먹이를 찾아 끝없이 진화를 해왔다.
신석기에 이르러 길고 긴 농업혁명이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인구가 늘고, 많아진 인구가 먹고 살려다 보니, 점점 사냥보다 곡물을 키우는 것이 중요해졌다. 식물 성장의 핵심 조건 3가지는 빛과 물과 공기의 흐름이다. 한 해 농사의 풍작은 1년 사계절의 흐름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구석기시대 인류가 3일 내로 동물과의 단기간 싸웠다면, 이제 인류의 싸움은 식물을 키워 거둘 때까지 1년의 장기간의 흐름을 간파하는 ‘전략싸움’으로 변모했다. 식물이 요구하는 빛과 물과 공기 흐름의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무려 365일 동안! 천문과 지리를 파악하고 동물과 곤충의 방해 공작을 물리쳐야 한다.
육체적인 싸움이든 정신적인 전략싸움이든, 싸움에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요소가 숨겨져 있다. 어디에? 바로 하늘이다! 하늘의 날씨는 우주왕복선을 쏘아 보내는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2주일 앞의 날씨 예보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 하물며 고대에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인류는 신화를 만들어 내고 후손들에게 자연의 이치와 신의 섭리를 전승했다. 또한 각종 우주 자연을 담당하는 여러 신들에게 의례를 지냈다. 간절히 희생 제의를 하고 경건하게 풍요와 다산 증식을 기원했다. 그들은 복잡 다변한 하늘의 뜻이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존과 번영, 증식을 위해 우리 인류는 안 싸울 수 없었다.
싸움의 진정한 목적, ‘순환의 질서’ 속에서 ‘우주의 이로움을 창조하라“
그렇게 인류는 싸움을 통해, 육체와 정신의 성장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가장 넘어서기 힘든 놈(?)이 있었다. 바로 ‘죽음’이다. 생명과 대립하는 죽음은 인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찬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구축했던 수메르인의 신화를 살펴보면,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던 재밌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사랑과 전쟁’, ‘생명과 죽음’을 관장했던 여신 이난나는 남편 두무지(인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그녀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암흑의 지하 세계의 권력을 탐낸다. 그래서 죽음을 파괴하고 정복하겠다고 지하 세계를 담당하는 언니와 싸우지만, 패배한다. 결국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려면, 자신 대신에 지하 세계에 데려갈 누군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 지상에 와보니, 편안하게 자기가 없어도 잘 지내는 남편의 모습에 분노하고, 남편을 죽음의 세계로 보낸다. 그렇게 남편의 희생으로 사랑과 풍요의 여신은 새롭게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 신화에서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죽어야 세상이 새롭게 창조됨을 알 수 있다. 「세계종교사상사1, 110p」
또 하나의 거대한 문명을 이뤄낸 이집트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봤을까? 사방이 트여서 다양한 문화가 섞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달리 이집트는 사막과 바다로 꽉 막힌 폐쇄적인 지역에서 3000년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농경의 주기적인 리듬을 알아냈고, 여기에 완벽한 질서를 부여했다. 그래서 우주 생명에 필수 불가결한 천체의 운행과 사계의 순환, 나일강의 간조와 만조 등의 자연의 법칙에 신성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그러한 우주 자연의 질서를 ma’at(마아트)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아트에 반하는 혼돈과 싸웠다. 이집트 신화를 살펴보면, 신의 화신인 파라오는 매일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 ‘아포피스’ 뱀을 내쫓는다. 이러한 승리는 계속된다. 그러나 완전히 영원히 내쫓을 수는 없다. 수메르 여신 이난나가 죽음 정복에 실패한 것처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신 죽음을 ‘인간의 변용(變用)’이 성취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죽은 자는 단지 모습이 바뀐 영혼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죽음으로 무력한 망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갖추고 비의(비밀스런 종교의식)를 전수 받은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세계종교사상사1, 159p」 이렇게 이집트인들은 죽었더라도 사후세계에서 영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다른 문명의 축인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인도–아리아계 유목민이 북인도로 이주하면서 ‘베다 시대’를 연다. 베다는 인도의 가장 오래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경전으로 추후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뿌리가 된다. 그들의 신화중 가장 인기 있는 신은 ‘인드라’이다. 그는 조물주로 생명과 에너지, 날씨의 신이다. 그 또한 이집트의 경우처럼 뱀과의 전투를 통해 혼돈을 새로운 질서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혼돈의 저항을 이기는 ‘폭력’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중대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세계종교사상사1, 317p」
이렇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베다 시대의 세 가지 사례를 종합하면,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 우주의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핵심 생존 음식인 식물의 순환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얻어낸 고대인들의 위대한 지혜이다. 식물은 가을에 풍성한 음식으로 인간에 먹힌다. 그 달콤한 열매의 씨앗에는 봄–여름–가을 동안의 성장 경험이 응축돼 있다. 그렇게 인간과 동물에 먹히면서 배설물을 통해, 씨앗은 다음 해에 싹 틔울 환경을 만난다. 그리고 그 씨앗은 인간과 동물의 사체에 담긴 영양분을 먹고 더 나은 새로운 창조를 열어간다. 이렇게 모든 생물이 서로 먹고, 먹히며 싸움과 협력을 통해 자신의 창조 드라마를 만든다.
순환은 삶과 죽음을 ‘연결’로 본다. 현생의 삶이 죽음 이후 다음 생의 지복에 영향을 미친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종족과 국가, 나아가 온 우주의 생존과 질서, 창조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잘 싸워야 한다. 나의 성장과 창조의 즐거움은 우주의 이로움과 이어져 있으니까.
그런데 순환에는 악순환도 있다. 타자와 사회의 이로움은 살피지 않고 개인의 욕망만 채울 때, 악순환은 시작된다. 그렇게 사리사욕을 채울 때, 쾌락은 증가하고 마음은 무거워진다. 점점 비슷한 사람만 남게 되고, 결국 더욱 욕망을 탐하다 모든 사람이 떠나거나 배신을 한다. 고대 역사 속에 수많은 왕이 탐욕을 꾀하다 단명하고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즉, 악순환의 원은 점점 고립되고 단절된다. 원이 물결처럼 퍼지지 못하고, 계속 고인다. 고이고 고이면 더욱 무거워진다. 마치 무거워진 별이 수명을 다해 폭발 후 극도로 강한 중력으로 뭉쳐서 블랙홀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고대 베다시대 현인들은 자신의 안 좋은 욕망을 살피기 위해서 숲으로 들어갔다. 당시 철기가 보편화되면서 잉여생산물이 늘고, 무지막지한 전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현자들은 그 원인을 명상과 요가를 통해 그 악습을 끊어내려 했다. 그렇게 욕망의 원인을 분석하고 파고들어, 악순환을 근절하고, 카르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 순환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우리의 마음이 악순환과 선순환을 만든다.
악순환과 선순환의 사이에서
선순환은 나의 이로움과 타자의 이로움, 나아가 우주의 이로움과 연결되어 있다. 악순환의 원인은 무지(無知)에 있다. 세상의 질서와 창조의 원리를 앎으로써 우리는 무지에서 점점 벗어난다. 안다는 것은 ”좋음“과 ”좋지 않음“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다. 중(中)은 평균이 아니다. 물러날 때는 물러나고, 싸울 땐 강력히 싸울 수 있는 고무줄처럼 탄력적인 마음이다. 그래서 순환 속에서 방향을 바꿔야 할 때와 공간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것이 ”사이“ 이고, ”중(中)“ 이다. 인간은 왜 인간(人間)인가. 間은 ‘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라는 뜻이다. 즉 자신과 타자 사이의 관계를 잘 맺을 때, 우리는 빛과 같은 지혜를 얻는다.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지혜 ”순환의 원리”를 알려주었다. 낮과 밤, 혼돈과 질서, 생명과 죽음, 봄여름과 가을·겨울 등등.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때론 갈등하고 싸우고, 때론 화해하고 협력한다. 이 ”사이”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그래야 버리고 비우고 희생할지, 먹고 채우고 획득할지 옳은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 움직일지 멈출지, 가까이할지 멀리할지 그 ”사이”를 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그사이를 알고 깨우치도록 신은 우리 모두에게 각기 다른 재능을 주었다. 그래서 타자와 끊임없이 부딪히며 싸우며 우주의 이로움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그것이 내 스타일이고 나만의 창조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과 타자의 개성과 섞여서, 싸움과 협력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양식을 낳을 것이고, 그렇게 우주 만물은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옳은 선택일 수는 없다. 누구나 실수하고 하물며 신들도 무수한 실수를 한다. 때론 앞날이 예측이 안 되고, 붙어봐야 거의 99% 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도 뭔가 마음속에서 싸우고 붙어봐야 할 때가 있다. 나와 전혀 다른 타자와 낯선 환경과 계급장 떼고 붙어봐야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싸워야 할 땐 싸워라
나는 20대 초반 너무도 순진하고 어린 마음에 첫 짝사랑에 실패했다. 그녀에게 고백조차 못 하고, 친구 관계가 끝났다. 6개월을 매일 같이 슬픈 음악과 우울한 감정에 젖어 인생을 낭비했다. 그때는 인연이 아니었음을 알지 못했다. 무조건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해병대 재수를 해서 입대한다. ‘인간 개조의 용광로’ 해병대. 결론부터 말하면 나같이 순진무구한 놈하고 전혀 맞지 않았다. 1년 내내 처맞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짝사랑의 기억은 완전히 기억 밖으로 사라졌다. 당장 생존 싸움이 우선이었다. 선임한테야 맞는 게 당연하다 쳐도, 후임이 실수해서 내가 맞았을 때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래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후임을 때렸다가 난 충격을 받았다. 어렸을 적 장난치다 만만한 남동생을 때린 적이 있을 때는 잘 몰랐다. “때렸는데, 싸워서 이겼는데 왜 마음이 찜찜하고 미안하지?” 그 이후로 난 맞을 때마다 그대로 후임들에게 되갚는 것을 자제했다. 길고 긴 군 생활을 겨우겨우 이겨내고 만기제대 했다. 후임들은 나를 ‘가장 많이 얻어맞은 해병’으로 기억했고, ‘끝까지 살아남은 해병’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수없이 쥐여 터지고, 고문을 당하고, 매번 싸움에서 졌지만, 난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난 굉장한 맷집을 얻었고, 이후 험난한 사회생활이 있을 때마다 그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이것쯤이야’ 어렵지 않게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겨도 찜찜할 때가 있고, 졌는데도 흡족할 때가 있다. 졌는데, 박수받는 싸움이 있고, 이겨도 소외되는 싸움이 있다. 인생은 선순환 속에서 갑작스레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사이’가 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때 멈춰서 심호흡을 한번 깊게 내쉬자.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우웁” 그리고 몸으로 부딪치고, 마음으로 갈등하자. 나의 이로움과 우주의 이로움이 만나는 현실을 꿈꾸며! 그때 우리는 신과 합일되는 충만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