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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기말에세이 수정] 아줌마의 몸에 드러나는 신성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5-07-01 20:06
조회
22

종교인류학 『세계종교사상사』1 기말 에세이(수정) 2025-7-1 김유리

 

아줌마의 몸에 드러나는 신성

“차탈 회위크의 앉아 있는 여인상”에 이끌려

 

 

1. 시작은 죽은 사람과의 대화로부터

 

미르치아 엘리아데(1907~1986)의 1976년 작 『세계종교사상사』는 선사시대부터 엘리아데 당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많은 성스러움의 현현을 망라하고자 하는 책이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다양하게 드러나는가를 살피는 한편으로 그 모든 현현이 근본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며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성스러움이 드러나는 현상은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일어난다. 주변에 흔한 물과 불, 흙과 날씨, 나무, 동물, 의식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범속한 일상에서 돌출하는 성스러움과 마주치는 것이 신비한 종교 체험이라고 말한다.

성과 속은 분리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지극한 “탈성화”는 “성스러움의 완전한 위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세계종교사상사 1』, 10쪽). 이와 같은 성과 속의 변증법적 관계를 나카자와 신이치는 “뫼비우스의 띠”의 위상학과 “대칭성” 개념으로의 표현한 바 있다. 성과 속은 연속되며 서로에게 이르는 신비한 통로가 된다.

성스러움이 현현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체험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사로잡히게 된다. 강렬한 종교 체험은 신비로운 것 앞에서 지극히 고양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험이다. 뜻이 드러나 이해에 이를 때 그것을 계시라고 부른다.

성스러움이 계시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엘리아데에 의하면, 무의미하고 혼돈으로 가득하며, 덧없이 흘러가는 순간들이 파편처럼 흩어지던 일상이 갑자기 의미로 가득해진다(5). 계시를 받은 자는 의미 깊음으로 충만해지고 일거에 모든 것이 이해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계시가 착란과 다른 점은, 그것이 “실재”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력하고 풍요로운 자질을 가지고 경험자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그 때 체험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종교 용어로는 “눈 뜸”(자각)이라고 하는 것 같다.

엘리아데는 죽었다. 그러니까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나는 종교인류학 세미나에 참여하며 죽은 스승과 대화하는 가운데 성스러움의 현현에 대해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엘리아데가 전하려고 한 것에 조금이라도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세미나에서 내가 겪은 일을 써보겠다.

2. 이상한 이미지에 붙들리다

 

찰나에 스쳐지나가는 이미지인데 유독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차탈 회위크의 앉아 있는 여인상”이 그랬다. 튀르키예의 신석기 유적에서 나온,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여성의 좌상이다. 두툼한 살집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앉은 채 옥좌에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다. 양편에 암사자이거나 표범이거나 흑표범이라고 하는, 고양이 과의 맹수를 거느리고 있다. 분명 중년 아줌마의 몸인데 다리 사이로 뭔가를 출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토상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상당히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을 빼앗겼다. 성스러운 물건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라 여겨져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었다. 이런 것이 종교적 행위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차원과 소통하고 힘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의례 행위들 말이다.

 

종교적 연속성

신석기 시대의 작은 여인상들 중에서 동물을 동반한 여인상은 조금 특별하다. 이후 시대의 지모신 계열의 여신상에서 그 전통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류 종교사에서 신은 뒤늦게 출현하므로 신석기의 여인상들이 여신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물을 동반한 후대의 여신상을 살펴서 어떤 상징적 의미들이 선사시대부터 연속되고 있는지 추려볼 수 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적 연속성과 형태적 다양성에 주목한다. 엘리아데는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그 형태적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한 종교적 연속성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신석기 “차탈 회위크의 앉아 있는 여인상”, 철기 히타이트의 여신 헤파트, 그리스 고전기의 키벨레 여신 사이에 “결정적 단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216). 이들은 동일하게 암사자, 표범, 흑표범 등을 거느린 중후한 여성 형태로 표현된다. 소아시아만이 아니다. 크레테 섬의 선사 유적에서 양손에 뱀을 쥐고 두 팔을 들거나, 사자를 이끌거나, 양이나 사슴을 안거나, 동물 사이에 서 있는 여성 도상이 발견되었다(205~6). 맹수를 거느린 “에페소의 아르테미스”는 호메로스 시대에 올림포스의 여신의 하나인, 사냥과 야생동물의 수호신 아르테미스로 재탄생한다(424).

선사 이래 같은 모티브가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연속되는 한편, 모두 다른 형태로 출현하는 현상이 흥미롭다. 엘리아데는 그리스 이전의 종교 구조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장에서 “원초적 시대의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한다는 표현을 한다(213). “기원”과 “토착”이 “경이로운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213). 이때의 기원이란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동안 없었던 형태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나는, 질료와 에너지의 원초적 바다라고 할 만한 근원성을 뜻한다.

 

동물의 주인

양손에 한 마리씩 동물을 잡은 형상은 선사 이래 “동물의 주인(masters of animals)”을 표현하는 원형적  전통이다. 그런데 동물의 주인이란 무엇인가? 동물의 주인이란 수렵 문화에 흔한 개념으로서, 야생 동물을 수호하고, 예속하는 초자연적 존재들을 뜻한다. 동물의 주인은 거대한 동물 자체로 표현되기도 하고, 남성형과 여성형의 인간을 닮은 형태이기도 하다. 사냥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은 주인에게 돌아간다. 동물의 영혼은 “수호령”의 품에서 그의 힘으로 재생된다. 인간들은 사냥감에 의식주를 의존하면서 동물의 주인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동물의 주인 개념은 야생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 인류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수렵민은 동물을 죽여서 먹든지, 아니면 애완 동물처럼 돌볼 뿐, 먹기 위하여 가축화하지 않는다. 동물의 번식은 초자연적 주인의 역할이므로 인간은 뒤로 물러나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할은 야생의 서식지를 관리하는 생태적 지식과 기술을 보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으로, 야생 동물을 예속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야생 동물은 “동물의 주인”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에 속하는 것은 신성한 것이어서 인간이 함부로 “소유”할 수 없다. 동물에게 죽음을 주거나 되살리는 것은 동물의 주인이 하는 일이고, 인간은 오로지 주인의 허락 하에서 한정된 생명만을 취할 수 있다.

 

포트니아 테론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여성형 “동물의 주인”이라는 한정된 분야다. 동물과 여성 신체가 병치될 때 발생하는 상징적 의미들이 궁금했다. 동물의 여주인은 “포트니아 테론(Potnia Theron, 또는 mistress of the wild animals)”으로 불린다(424). 이 이름은 호메로스가 아르테미스를 부를 때 쓴 이래로 지금까지 동물을 거느린 전능한 여성 형상에 붙이는 용어다. 포트니아란 여성에 대한 경칭이다.

포트니아 테론 모티브에서 여성 신체를 기호로 사용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우선, 여성의 몸은 남성과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의미값들을 갖는다. 음문은 창조의 힘을, 자궁은 매장하고 재생하는 장소를 뜻한다. 부풀어 오른 유방은 황소의 뿔과 등가의 기호로서 생명을 상징한다(82). 올림포스 아르테미스 여신의 원형인 “에페소의 아르테미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 말, 벌 같은 형상들을 촘촘히 매달고, 수십 개의 젖가슴을 내놓은 충격적인 형태로 생명력과 자양하는 능력을 과시한다. 한편, 자세도 의미를 갖는다. 펑퍼짐한 몸매로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자세는 대지와의 인접성과 유사성을 표시한다(83). 여성 간의 차이도 의미값을 갖는다. 젊은 여자, 출산하는 여자, 노파라는 세 가지 존재 양상은 자연(달, 계절 등)의 주기성을 표현한다. 끝으로, “무서운 악마적 형상(81)”일 경우 벽사의 효험을 기대하는 종교 표현일 것 같다. 특히, 신석기 작은 여인상들은 주술-종교적 효력을 갖는 휴대용 우상으로 필요한 지점에 얹거나 넣어 놓을 수 있다.

표현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동물의 여주인의 전능하고 초자연적인 힘은 조형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선, 상대적인 크기로 표현할 수 있다. 동물의 여주인은 맹수를 한 손에 하나씩 들 만큼 크고 강하다. 차탈 회위크의 여인상의 두툼한 살집도 관련해서 해석할 수 있다. 그 살들은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두터움이고, 흔들 수 없는 안정감이다. 이길 수도 파괴할 수도 없는 무적의 힘이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상은 다산한 몸으로 여전히 출산중이다. 이는 불가사의한 창조력과 회복력을 함께 표현한다.

 

3. 나가며

 

멀고도 가까운

8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상한 이미지에 붙들려 유사한 모티브의 연속성과 다양성을 탐구하는 시간을 보냈다. 스쳐가는 사물들 가운데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에 이끌리는 순간이 중요하다. 이 사물과의 만남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헤아려보는 것은 보이는 것 너머에서 전해오는 메시지를 들어보려고 집중하는 일이다. 단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거라고 여기며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다.

그래도 궁금하다. 왜 하필 차탈 회위크의 앉아 있는 여인상이 눈길을 끌었을까? 자꾸 보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갱년기 나잇살을 고민하는 나의 초상일까? 어릴 적 목욕탕에서 본 어머님들의 몸일까? 가물가물 피어오르던 기억이 마침내 선명해졌다. 아뿔싸, 초등학생을 위한 판타지 스릴러 소설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의 여주인과 똑같이 생겼구나! 작년부터 달님이 언급한 아동 소설의 삽화 속 이미지였던 것이다. 틀림없다. 둥근 머리에 커다란 몸집을 하고 아득한 세월을 거쳐 온 여성이 고양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다. 신비한 효력을 가진 과자들을 엄청나게 다양하게 창조해내는 공간의 주인, 미숙한 손님들에게 통과 의례적인 특별한 시련을 겪게 만드는 존재, 바로 그 베니코 상의 모습이 포트니아 테론 모티브에서 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나를 성스러움의 경험과 종교적 계시로 이끌 것만 같았던 선사의 유물 이미지는 최근에 어디선가 보았던 이미지와 겹쳐 보여서 의미심장했던 것이었다. 글을 수정하다가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다. 신비로움이 걷히고 나니 그동안 동물의 여주인 모티브에 담긴 의미들을 헤아리며 고양감과 존경까지 느꼈던 시간들이 무엇인가에 홀렸던 것처럼 느껴진다.

 

 

참고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용주 옮김, 『세계종교사상사』(1권, 이학사, 2005)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데이비드 웬그로우, 김병화 옮김, “자유의 생태학,” 『모든 것의 새벽』(김영사, 2025)에서 “동물의 주인” 개념 참조

  정진홍, 『M. 엘리아데-종교와 신화』(살림, 2003)에서 엘리아데의 이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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