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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세계종교사상사]에세이-제의와 의례의 진화사

작성자
윤정임
작성일
2025-07-01 22:13
조회
14

제의와 의례의 진화사(進化史)

 

종교 인류학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보왕삼매론을 낭송한다. 세미나를 하는 공간은 성소이고, 성스러운 간식을 준비하고, 성스러움을 더하는 복장으로 참여한다. 뭐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뭔지도 모르고 일단 참여하였다. 수업을 들으며 그것이 의례를 만드는 것이라 걸 알게 되었다. 왜 이런 의례를 만드는 것일까?

인간 존재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종교적인 행위(미르치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1, 이학사, 6)라 한다.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종교사는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보면 우리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분명해 보인다. 인류는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엘리아데는 인류가 의미로 가득한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같은 책, 5)을 통해 성스러움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종교에서 성스러움은 제의(rite)와 의례(ritual)를 통해서 경험된다. 의례는 정결, 단식, 기도, 제의(같은 책, 92)를 포함하는 형식이나 절차를 말한다.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는 은퇴한 신이다. 신도 은퇴한다는 생각이 재밌다. 처음에는 강력한 신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등장한 젊고 힘 있는 신들에게 밀려나면 데우스 오티오수스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몇천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신들의 역할과 지위도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제의나 의례도 시대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형식도 의미도 변화하였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베다의 통과의례

인도의 베다 의례는 가정 제의와 공식 제의로 나뉜다. 가정 제의는 개인적 의례로 성별 의례(samskāra)’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인도 전통의 생애주기별 통과의례(rite of passage)이다. 아이를 수태했을 때(Garbhadhana), 출산했을 때(Namakarana), 소년이 브라만 스승을 따라 입문(출가) 할 때(Upanayana), 결혼식(Vivaha), 장례식(Antyeshti) 등의 중요한 순간에 의례를 행한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삶의 중요한 순간에 의례를 치른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우파나야나(Upanayana)는 인도의 생애주기(Ashrama)의 첫 단계인 학생기에 스승에게 배우러 가는 입문 의례이다. 우파나야나를 경험한 자를 다시 태어난 자라 부르는데 이는 의례적인 죽음과 정신적 차원에서의 재탄생(2의 탄생)을 거치기 때문이다.

공적 제의는 아그니호트라(불에 대한 봉헌), 신년 의례, 계절 의례, 수확 의례 등 다양하다. 공적 제의에서는 행해지는 희생 제의는 우주의 질서(rta)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례가 남아 있다. 아이가 태어나서 백일, 돌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인다. 입학식, 졸업식, 성년식, 결혼식, 장례식 등은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명절도 의례의 변형이다. 신년 의례라 할 수 있는 설날에 우리는 세배하고 떡국을 먹고 새해의 일출을 보며 새롭게 태어남을 기린다. 수확 의례에 해당하는 추석에는 가을에 수확한 과일과 음식을 상에 올리고 차례를 지내며 조상에게 감사한다. 이것이 모두 의례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희생제의에서 고행으로

베다의 우주 창조의 신 프라자파티(생명체의 주인)는 고행(타파스, 열기裂起)을 통해 자기를 극한에 이를 정도로 뜨겁게 만들고’. 그 열을 방사해서 세계를 창조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해체된 그의 시체로 우주를 창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생 제물을 신에게 바쳐야 재앙이나 혼돈에서 우주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고 풍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 새로운 사유 방식이 등장한다. “희생 제의는 프라자파티를 재건하고 세계의 영속을 보증할 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파괴되지 않은 존재인 자아’, 즉 아트만(ātman)을 창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같은 책, 350) 희생 제의를 통해 신들이 브라흐만을 획득하고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처럼, 제의 집행자 역시 자신의 아트만을 회복하고 불사를 획득한다. 이제 아트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와 함께 희생 제의는 타파스(tapas, 고행)와 동일시되면서 제의의 형식에 변화가 생겼다. ‘희생의 내재화라는 변증법적 사유가 일어났다. 이제 사람들은 아트만을 회복하기 위해 신에게 바치는 외적인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을 제물로 바쳤다. 호흡이나 생리적 기능이 제의의 공물이나 도구를 대신했다. 인도에 대한 영상에서 손톱이나 머리를 자르지 않고 계속 기르거나, 한쪽 팔을 계속 위로 올리는 고행을 신에게 바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지혜를 통해 해탈로

우파니샤드의 저자들은 희생 제의의 가치를 부정하며 아트만에 대한 명상 없이는 희생 제의의 체계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라 말한다. “프라자파티가 희생 제의를 통해 그의 자기(ātman)’를 재건하고 회복했듯, 희생 제의 집행자는 의례적 행위(karman)를 통해 심리생리적 기능을 통일시키고’, 아트만을 구축할 수 있다.“(같은 책, 364) 브라흐마나에서는 카르만karman’이라는 단어가 의례적 행위와 그것의 유익한 결과를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적인 인과관계를 인식하게 되자 제의의 효과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올바른 의례적 행위의 보상으로 얻어지는 사후의 행복에 대한 관념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전 생애에 걸쳐 행한 모든 행위(karman)는 다음 생의 원인을 구성한다. 모든 행위는 생과 사가 반복되는 윤회의 법칙, 삼사라(samsara)를 영속시킨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형이상학적 차원의 무지아드비야(avldya, 無明)에 의해 살아가면, 자기 행위의 결과를 모르고 계속 윤회 속에 살게 된다. 지혜에 의해 이 순환의 지옥으로부터 해탈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지식(jnana, )은 존재론적 인식 즉 존재의 변형을 일으키는 인식이다.

아트만(Atman)-브라흐만(Brahman)의 동일성에 대한 명상은 추론의 연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수행을 구성하는 것이다. 해탈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신비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일단 전체/일자의 역설적 현현을 이해하고 나면, 수행자는 우주적 과정의 작동 기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즉 윤회로부터의 해탈(moksa)이다.

외적인 희생 제의가 희생의 내재화인 고행으로, 외적인 제의로 추구되었던 사후의 행복은 지혜를 통한 해탈로 진화하였다.

일상을 신성하게

인류는 변화하는 시대와 정신에 대응하여 위기의 순간에 제의와 의례를 변화시키면서 신성함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 많은 것을 밝혀낼수록 자연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감은 잃어버렸고 또 잊고 살아간다. ‘탈 자연화되고 탈 신성화된 자리에 화폐 신이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신성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의례를 만들어 보았다. 책장의 한쪽에 붓다의 얼굴이 표지인 책을 세워놓고 아침엔 물을, 식사 전에 밥을 공양 올린 후에 마시고 먹는다. 일상의 한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반복하는 행동으로 형식을 만든다. 이것을 의례라 할 수 있다. 두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습관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에 특별한 시공간이 만들어지고 성스러움을 경험한다.

이렇게 만든 의례도 어느 순간 습관이 되어버린다. 모든 익숙한 것들은 감흥을 일으키기 어렵다. 의례가 습관이 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것도 능력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감사한 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능력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려면 재 자연화시키고 재 신성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일상에 대한 신성함을 경험하는 순간이 전체/일자의 역설적 현현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종교 인류학 수업 시간에 의례를 만드는 것은 저 베다 시대의 외적인 제의로 회귀인가? 아니다. 지금의 시대에 맞게 의례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탈 신성화된 시대에 다시 의미로 가득한 실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일상의 의례가 없어도 성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면 의례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성스러움을 잃어버린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례가 필요할 뿐이다.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능력자가 되기 위해 종교 인류학 수업 의례에서, 일상의 의례에서 전체/일자의 역설적 현현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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