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종교의 풍경들] 기도, 기도하는 마음
<종교의 풍경들>을 올리며 제 근황을 전하게 되는군요. 오늘의 사진은 제가 새로 입학한 학교의 한 풍경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학기가 시작하기 전, 학교의 전통에 따라 3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물론 쉬는 시간과 밥시간이 있습니다) 하나의 기도문을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이 사진이 기도회의 한 장면입니다. 가운데에는 어린 학생 스님들이 앉아있고, 그 뒤에 어린 대학생 친구들이 주루룩 앉아있습니다. 저같은 외국인 어학생들은 맨 바깥줄에 앉고요.
하루 종일 외는 기도문은 ‘돌마 찬탄문’입니다. ‘돌마(혹은 타라)’는 인도티벳불교에서 자비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여성보살입니다. ‘돌마’는 보통명사로, 무슨 돌마, 무슨 돌마.. 각종 돌마가 계십니다. 그 ‘돌마’의 능력 등에 대한 찬탄을 하는 것이 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스님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스님이 마이크에 대고 기도문을 읊으면, 학생들이 속도에 맞춰 함께 기도합니다. 학생들은 떠들기도 하고, 핸드폰도 보고, 게임도 합니다만, 기도문을 몸으로 외우고 있어 언제든 중간에서 다시 시작해도 놓치지 않고 기도문을 따라가더라고요.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3일이라는 시간을 기도에 할애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기도를 통해 일 년 동안 있을 수 있는 공부의 장애를 물리친다고 생각하고, 또 나뿐 아니라 동기들, 학교 친구들, 나아가서 만물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냅니다.
이것은 다람살라 달라이라마 존자님 오피스에서 받은 ‘진럽’입니다. 진럽은 우리말로는 ‘가피’라고 옮기는데요. 저 노란 종이 안에는 ‘옴마니받메훔’ 만트라를 쉬지 않고 며칠 간 (며칠이었는지 까먹었어요. 보름 정도였던 것 같기도하고요.) 읊어준 환이 들어있습니다. 빨간실 역시 그런 기도가 담겨있는 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환에 들어있는 가피로 인해, 티벳 사람들은 이 환을 만병통치약처럼 쓰기도 하고, 명상등을 하기 전 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역시 장애를 없애주는 역할을 합니다.
3일동안 입학준비를 하면서 틈틈이 기도회에 참석했는데요. 기도문을 음미할 시간은 전혀 없었고(왜냐하면 거의 랩을 하는 수준으로 빠르기 때문에), 따라 읽느라 진땀을 뺐지만, 기도란 뭘까.. 를 종종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이렇게 저렇게 정의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다 읽지 않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기도하는 두 손을 자르라고 한 사사키 아타루의 책 제목이 생각나네요. 또 타인-되기가 기도라는 리 호이나키의 아름다운 정의도 떠오릅니다.)
기도란 일단 무언가 바라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듯 합니다. 내가 해낼 수 없거나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니까요. 공부의 장애를 없앤다든지, 모두의 행복과 건강을 바란다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는 기도가 필요 없겠지요, 그냥 하면 됩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그저 바라는 마음을 냅니다. 바라는 마음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의 ‘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요. 이것은 나 이외의 존재를 감각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미 종교적이네요. 둘째는 효과를 부차적인 것으로 놓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좋은 것 등등, ‘나’를 넘어선 범위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영웅이 되어 모든 걸 해결하진 못해도, 기도하고 바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이 역시 종교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