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학교 없는 사회] 자유 교육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 가기 (최종 과제 수정)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07-22 15:32
조회
169

이반 일리치 『학교 없는 사회』 최종 과제 수정2차 2024-7-21 김유리

 

자유 교육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 가기

 

이반 일리치는 교육의 오래된 이상인 ‘자유 교육’ 전통의 방식에 따라 『학교 없는 사회』를 썼다. 이 책에 담겨 있을 탈학교화의 희망의 불씨가 살아날 것인지는 독자들의 행보에 달려 있다. 독자들이 책을 만나 자유 교육의 전통을 이을 수 있을까? 아니면 학교 교육 제도의 방식에 머물게 될까?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읽기의 과정이 탈학교 사회로 가는 희망에 찬 여정이었는지 이 글에서 돌아보고자 한다.

 

자유인들의 공동 ‘책낳이’

『학교 없는 사회』는 문제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연결망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산출한 결과물이다. 이반 일리치는 1958년 에버렛 라이머와 처음 만나기 전까지는 공교육 확대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의무적 학교교육의 시행이 오히려 배움의 기회들을 꺼뜨린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67년부터 ‘탈학교’를 주제로 공동 연구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쓴 글이 모이자 70년 봄부터 여름까지 수요일 아침마다 그들의 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비평을 듣는 자리를 열었다. 일리치가 재직한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 운영자를 포함하여 일생 동안 각자의 분야에서 교육의 대안을 모색해 온 파울로 프레이리(브라질의 교육자, 교육사상가, 빈민 교육 운동가), 존 홀트(미국 교육학자, 대안교육의 선구자), 폴 굿맨(아나키스트 교육학자. 관리사회에서의 청소년 소외 연구) 등의 평자들이 이 자리에 참석해 글을 읽어주고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제공하며 토론과 연구에 기여했다. 일리치와 라이머는 공동 연구 결과를 각자의 관점에 담아 책을 한 권씩 출판했다.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와 우리가 읽은 『학교 없는 사회』가 그 결과물이다. 이러한 책 생산 과정은 자유 교육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자유 교육의 전통: 정의와 방법

자유 교육(liberal education)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내려오는 교육의 이상이다. 자유 교육이란, 노예나 직업인과 달리 자유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더 좋은 상태로 이끌어나가는 배움의 활동이다. 이러한 탐구의 실천은 자유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기에 그들은 여가(schole) 상태를 교육에 적절한 조건으로 유지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공교육 제도에서 특정 연령대를 의무적으로 징집하여 정해진 교과 과정을 수행하도록 강제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직업을 배분하는 것은 자유 교육과 거리가 멀다.

학교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은, (1)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문제에서 출발해 (2) 같은 관심사를 가진 동료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방법과 환경의 조성에서 출발한다. 일리치는 뉴욕에서 탈학교제도적인 모임을 여는 간단한 방법을 제안하면서, 마오쩌둥, 폴 굿맨, 프로이트 같은 사람이 쓴 책을 서로 도와 이해하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자유 교육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가는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책 제목에 대한 관심만으로 모인 사람들이 모임 시간과 장소를 직접 정하고 서로가 맞게 읽는지 확인해주면서 진행하는 공동 독서의 과정에서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배움의 연결망이 직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배움의 연결망이 탈학교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사용할 배움의 도구가 된다.

이와 같이, 진정한 교육이 가능하려면 첫째, 누구나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 문제를 위해 모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같은 용어나 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하는 동료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창의적인 탐구과 학습은 주어진 교과과정이라는 구속의 틀을 벗어나 자기 관심사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자기와 연구 주제를 공유하는 자유인들을 만나 상호 연결될 수 있다. 이들이 만나는 곳이라면 어디나 자유 교육의 현장이 된다.

 

스승을 찾아서

교실에 앉아 누군가 미리 정해둔 교육과정을 배우고 싶어하도록 교사에게 설득되는 학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때부터 일어나는 것은 스승을 찾는 절실한 심정이다. 일리치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한다면, 그 주제에 대해 평생 연구하고 경험을 쌓아온 연장자를 찾아 나서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험난한 배움의 여정을 가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 길을 안내해줄 살아 있는 안내자와 죽은 스승을 찾는 데 힘을 아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개인들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상호 연결된 배움의 장을 조직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가 축적해온 기억에 접근하는’ 문을 여는 일로 이어진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열쇠는 무엇인지, 그 열쇠를 지닌 자는 누구인지, 그 문에 어떤 문턱이 있는지가 모두 학교 탈출의 구간마다 풀어야 할 과제들이다.

자유 교육의 방식은 공통의 질문을 품고 공동의 힘으로 옛 스승의 말을 계속해서 살려내는 와중에 각자의 고유한 탐색로를 지속적으로 열어 간다는 기본 구조를 갖는다. 그러니까 자유 교육의 전통을 계승하는 자라면 고전을 계속해서 읽고 있는 상태를 이어간다. 근대 이전의 대학이 바로 그러한 현장의 예이다. 교수와 학생은 오래 전에 죽은 교수의 책을 읽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으며, 그들을 통해 옛 스승의 말과 관점이 살아나서 현 시점의 오류들을 조감하게 해주었다. 과거에 대학 사회는 당대의 기조로부터 보호받는 성역이었고, 불온한 사상들이 생성되는 온상이자 해방구였다. 중세의 학자들이 했던 일도 같은 맥락이다. 중세에 학자가 된다는 것은 거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득과 사회적 위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자유 시간에 스승의 말을 되살리는 행위를 이어가다 보니 그의 신념에 찬 행위는 주변의 멸시와 존경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곤 했다.

일리치는 학교 제도의 틀을 벗어났을 때 벌어질 법한 미지의 사태들을 예감하는 데 있어서 자유 교육이라는 개념을 과거로부터 불러와 우리의 시야를 확보해준다. 제도의 사슬에서 풀려난 자유인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동료와 힘을 합치고 연장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의 형상이 우리의 시야 속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의무적 학교 교육 제도 하의 학생들의 무력한 처지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학교 없는 사회』와 함께 한 여섯 주

이 책을 읽는 나 자신은 두 가지 대조적인 학습자인 ‘자유인’과 ‘학생’ 사이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오갔는지 흥미롭게 돌아보게 된다. 처음에 도대체 이반 일리치라는 분이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나 한번 들어나 보자 하고 출발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평소 흠모하던 분이 우리 지역에 온다니 안 가볼 수 없지 하는 지역민의 팬심 같은 것이기도 하다. 세미나에 참석할 때는 모임 선배들이 어떤 식으로 공부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눈치를 살폈다. 과제나 발표에서 초심자 티가 너무 나나 신경이 쓰였다. 돌아보면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인문세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해하는 염탐꾼이거나 새로 이사 온 사람이거나 ‘신입생’같이 굴었던 것 같다. 신입생이라니! 정말 학교화된 사회에서 배움은 언제나 학교의 틀을 계속해서 소환한다. 탈학교사회는 개인의 탈학생화로 시작된다.

그리고 맨 앞에 달님이 있다. 학교 제도는 선생님을 앞에 둔 학생의 구도를 유지한다. 나도 모르게 학생처럼 행동하면서, 달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은 키워드들을 캐치하려고 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더 풍요롭게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학생이 하는 일 아니고 뭔가 싶지만, 차이가 있다면 나의 자발적인 행위라는 사실이다. 나는 감금된 곳에서 나가려고 창살 너머로 보이는 열쇠를 향해 팔을 뻗는 동화나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여서 그것을 향해 달려드는 까마귀처럼 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달님이 알려준 방법대로 방향을 잃지 않게 도와줄 열쇠를 꼭 붙잡고서 텍스트를 ‘읽는 것’에서 ‘읽어 내는 것’으로 이행해야 했다. 그 과정은 글쓰기와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해석과 쓰기는 내 머리와 입과 손으로 하는 것이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 한계 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속이 울렁거리고 되게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일리치의 안개 속에서 오선민 선생님의 목소리가 꿈결에 듣는 듯 계속해서 들려왔다. “여러분, 집중해야 됩니다. 체력을 키우세요. 방향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진도가 나가야 됩니다. 제 자리에서 맴돌면 안 됩니다. 더 알고 싶다는 느낌으로, 탐구 주제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어야 합니다. 잘 쓰려 하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 더 멀리, 더 자주 뛰세요.” 읽어 내는 것, 생각을 말하는 것, 그것을 쓰는 것은 정말 막막한 과업이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글에 대해서 지적을 하실 땐 눈에 별이 보이게 정신이 없고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이 펄쩍 뛰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강인한 여자들이구나!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냐 싶었다.

 

안개 속의 노 젓기

일리치를 읽는 과정은 선명함과는 거리가 먼 안개 속 헤매기였다. 일리치는 현대 공교육의 문제를 말하는 자리에서 옛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분이다. 그리스 고전기 신화를 그보다 더 원시의 버전과 겹쳐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전 세계인이 아폴로 우주선의 달 탐사를 목격하는 시대에 태양신 아폴론이 가이아의 꿈이 생성되는 동굴을 빼앗고, 미지의 세계로부터 유래하는 힘을 상징하는 판의 피리 연주 선율을 억압하는 신화를 들려준다. 일리치는 미소 양국의 달 탐사 경쟁이라는 ‘다수의 신화’ 아래로 결코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흐르는 ‘소수의 신화’와, 그러한 소수의 신화를 공유하는 듯 별과 우정에 관해 노래하는 반체제 소련 시인의 시를 들려준다. 현대를 과거의 시점에 비추어 보고, 과학에 신화를, 이데올로기에 시를 소환하는 등 갈래갈래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초심자는 홀린 듯 멈추어 서곤 한다. 다시, 달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기 질문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는 자기 질문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요. 거기에 다 던진 스승들이 있고 그들의 궤적을 보세요. 두려움 없이 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는 용기를 내세요. 절실함이 있으면 바람결에 떠오르는 것이 희망입니다.” 나는 일리치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부피감을 더해가는 걸 홀린 듯 바라보았고, 달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명한 언어란 눈물겹게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이야기와 내 언어는 아니다.

중층적이고 연속적으로 발생되는 의미들을 발견하고 음미하려다 보면 내 위치를 벗어나 나 자신의 문제를 깜박하기 십상이었다. 이번 주의 글감을 찾다가 앞의 맥락을 까먹기도 했다. 문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기는커녕, 문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거였다는 사실이 마지막에 기억이 났다. 이번 세미나는 내게 절실한 문제를 들고 배움의 현장을 주파한 것이 아니라, 도착점에서 와서야 출발점에 뭘 놓쳤는지 알게 된 여정이었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나 자신이 되는 법이나, 내 위치를 분명히 확보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왔다는 뼈아픈 인정이기도 하다. 나는 늘 앞에 누군가를 두고 있었던 학생으로 살아왔던 걸까? 애쓰지 않고 겪지 않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초연한 노예였던 것일까? 이런 자각을 나의 도달 지점이라고 섣불리 여기에 밝혀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

다시, 자유 교육의 전통으로 돌아가서 이 세미나에 참가한 나의 독서 과정은 옛 스승의 말을 얼마나 살아나게 한 것인지 돌아보자. 내가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로운 연구자로서의 출발 지점을 드디어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보하고 싶다,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진짜 잘 모르겠다. 달님한테 묻고 싶은 욕망을 너무나 느낀다. 하지만, 조언이 아닌 정답을 구하는 것은 자유인으로서는 금기다. 나는 이번 과정을 통해 그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끝)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