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세계종교사상사2]24장 힌두교의 종합 : 마하바라타와 바가바드기타 발제
제24장 힌두교의 종합 : 마하바라타와 바가바드기타
삶을 긍정하는 구제법 – 행위의 포기와 헌신의 길
191. 18일 동안의 전쟁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중심 주제는 바라타족의 두 가문, 쿠루가(쿠루가의 왕자 100명)와 팡두가(팡두가의 왕자 5명) 사이의 갈등이다. 팡두 가의 다섯 왕자 유디슈티라, 아르주나, 비마, 나쿨라와 사하데바(쌍둥이)는 각각 다르마, 바유, 인드라, 쌍둥이 신 아슈빈의 아들이기도 하다. 팡두 왕이 죽게 되자 그의 형 드리타라슈트라(시각장애인)는 팡두의 장남(유디슈티라)이 성장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드리타라슈트라의 장남 두료다나(마신 칼리의 화신)는 왕의 지위를 내놓지 않기 위해 계략을 사용해 팡두가 형제들을 함정에 빠트려서 재산과 왕국을 빼앗았다. 마지막 승부 주사위 게임에서 진 쪽이 12년간 숲속에 살고, 13년째는 신분을 숨긴 채 살기로 약속한다. 주사위 게임에서 진 팡두가의 다섯 형제와 그들의 아내인 드라우파디 공주는 추방되었다. 13년이 지나 약속을 지킨 다섯 형제는 왕국을 되찾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쿠르크세트라 전쟁, 『바가바드기타』의 내용)을 한다. 결국 전쟁에서 이겼지만 너무 많은 희생을 목격하고 슬픔에 잠긴 유디슈티라는 왕위를 포기하고 은자의 삶을 살려고 했지만 형제들이 설득한다. 왕국을 36년 동안 통치하다가 늙어가는 것을 감지한 유디슈티라는 권력을 어린 조카 파리크쉬트에게 물려주고 동생들과 드라우파디와 개 한마리를 데리고 히말라야 산을 향해 떠난다. 여행 도중에 동행자들은 모두 죽고 개(다르마 신)와 함께 지옥에 잠시 들른 다음 천국에 올라간다.
192. 종말론적 전쟁과 세계의 종말
이 파괴적인 전쟁은 그치지 않는 인구 증가로 인해 몸살을 앓는 대지를 구하기 위해 브라흐마 신이 일으킨 것이다. 『마하바라타』에는 세계의 종말과 유디슈티라 혹은 파리크쉬트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의 출현이 묘사되고 있다. 이 종말론적인 구조는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 사이의 대전쟁, 불과 물에 의한 전 세계의 파괴, 파리크쉬트의 기적적인 부활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출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세계의 종말에 관한 신화는 조로아스터교의 전승과 고대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서도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이므로 고대 아리아인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마하바라타』의 장대한 종합은 신학적 발전과 혁신이다. 아바타라avatara(화신)를 ‘구세주’라고 보는 관점이 강력하게 서술되기 시작했는데 크리슈나는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서 아르주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비슈누의 현현은 ‘이 세계의 종말’을 예고한다. 『마하바라타』의 극적인 사건들 배후에 비슈누(크리슈나) 신과 시바 신의 대립과 상보성이 동시에 확인된다. 시바 신의 ‘파괴적인’ 기능은 비슈누(크리슈나) 신의 ‘창조적인’ 역할에 의해 균형을 유지한다. 지고의 존재인 비슈누 신은 궁극적 실재로 세계의 창조는 물론 파괴까지도 지배하는 존재이고, 선과 악을 초월하고 있다.
시바–비슈누 신의 상보성은 대립하는 여러 기능(창조성/파괴성 등)의 상보성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신성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계시와 상응하는 것이며, 구원을 얻기 위해 따라야 하는 모델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하바라타』는 한편으로는 선과 악의 갈등, 다르마와 아다르마의 투쟁을 강조하며 묘사하고 있지만, 이 투쟁은 우주적 생명, 사회, 그리고 개인의 생존을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규범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서사시는 궁극적 실재(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아트만)가 다르마/아다르마라는 대립은 물론 그 이외의 모든 형태의 대립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르게 말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실재의 두 가지 “양태”, 즉 역사에 의해 한정되는 직접적인 실재와 (역사의 한정을 넘어서는) 궁극적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마하바라타』는 (비슈누파의) 유신론적인 체험에 근거한 우파니샤드 철학의 일원론이 다시 긍정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경전의 전통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구원론이라도 수용되고 있다.
193. 크리슈나의 계시
『마하바라타』의 대립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경향의 중대한 결과를 보자. (1) 베단타(우파니샤드의 교의), 상키야 그리고 요가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2) 의례적 행위, 형이상학적 지식, 요가적 실천에 의해 수행되는 세 개의 “길”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확립하고, (3) 시간 속에서의 존재 양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즉 인간적 조건의 역사성을 가정하며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4) 구제를 위한 네 번째 “길”의 우월성, 즉 비슈누(크리슈나) 신에 대한 헌신(박티요가)을 강조하고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구제를 위한 세 가지 “길(방법)”의 동일성을 엄밀한 형태로 증명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실존적 위기’에서 시작하여 인간적 조건과 구제의 ‘길’을 보여주는 범례가 되는 계시로 끝을 맺는다. 전쟁에서 친구나 사촌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절망에 빠진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는 업에 사로잡히지 않고 크샤트리아로서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크리슈나에 의해 계시된 교리의 본질은 ‘나를 믿어라, 그리고 나를 모방하라!’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역사적 생명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고 크리슈나의 존재와 행위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행위를 모방하여 자기의 수동성(무행위:전쟁의 거부)으로 인해 ‘우주의 혼란’이 초래되지 않기 위해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크리슈나가 활동하는 것처럼” 스스로도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신성의 본질과 그것의 현현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크리슈나는 스스로를 계시하고, 인간은 신을 앎으로써 모방해야 할 모델을 알게 된다. 세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신의 존재 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인간은 어떻게 하면 그와 같아질 수 있을지 배운다.
행동하도록 운명 지어진-‘행위는 무행위 보다 탁월하기’ 때문에–인간은 특정한 ‘의무’를 실행해야 한다. 인간은 구나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얽혀 있는 필연성에 따라 행위하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즉 자신이 처한 조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194. “자기 행위의 결과를 포기하라”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구제하고” 세속적인 활동 모두를 “정당화하려고”하는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행위의 “결과”를 더 이상 향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희생으로, 즉 우주의 질서 유지를 위해 공헌하는 초인간적인 역동성으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가 주장하는 것처럼 희생을 바치는 행위만이 인간을 구속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프라자파티의 희생처럼’ 인간 역시 모든 행위에 의해 신적 업무의 완성에 협력할 수 있다.
세속적인 활동을 의례로 변용시키는 것은 요가에 의해 가능해진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행위하는 자”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 즉 세상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계속해서 행위함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와 그것의 결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 행위의 결과를 포기하는 것”, 비인격적으로 행동하는 것, 열정이나 욕망을 가지지 않고, 마치 다른 사람의 대리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가바드기타』의 위대한 독창성은 “행위의 결과”를 부정함으로 달성되는 “행위의 요가”를 강조하는 점이다. 이 독창성은 『바가바드기타』가 인도 종교사상사에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 후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고, 가정을 가지고, 이해관계를 만들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전쟁에서 적을 죽여야 했던 아르주나처럼)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라도, 행위의 결과를 포기함으로써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요가의 기법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바가바드기타』의 웅대한 종합의 노력이 보여주는 특징이며, 금욕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또는 이 세상의 행위에 바쳐진 것이든 모든 종류의 종교적 활동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요가는 금욕보다 더 뛰어나고, 지혜보다 더 우수하며, 희생보다도 더욱 효가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요가 실천의 승리인 동시에 신비적인 헌신을 최상의 “길”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역사성을 강조함으로써 대단히 포괄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시간 속에 있지만, 즉 역사적 존재로서 운명 지어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간성과 역사성에 의해 소진되어버리는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 안에서 초역사적이고 비시간적인 지평에 이르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이중적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앞에서 크리슈나가 제시한 해결법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로부터 아무런 욕망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우주 전체가 크리슈나(비슈누)에 의해 창조된 것, 즉 그 신의 현현인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이 세상의 구조에 참여하는 것이 “악한 행위”가 될 수 없다. “악한 행위”는 세계, 시간 그리고 역사가 그 자체로 독립된 실재성을 갖는다고, 즉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시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한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195. “분리”와 “통합”
인도 종교사에서 『바가바드기타』가 수행했던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상키야학파, 요가학파, 그리고 불교에 의해 제시된 해결법과 비교해 보자. 이러한 학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이탈하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명을 부정할 것을 요구했다. “보편적 고난”과 윤회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이론의 발견은 구원의 추구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했다. 즉 해탈은 생명의 충동과 사회적 규범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해야 했다. 따라서 은둔과 금욕의 실천이 필수적인 전재가 되었다. 다른 한편 지식에 의한 구제는 “눈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벗겨보려는 것” 등에 비유되고 있었다. 요컨대 구제는 단절의 행위, 즉 고난의 장소이며 노예로 넘쳐나는 감옥인 세상과의 관계 단절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현세의 종교적 가치 박탈은 상키야–요가학파와 붓다에 의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종교가 지닌 모든 지향성을, 나아가서는 공동체와 사회적 책무의 방기를 포함하는 금욕적 실천을 하나의 대담한 원리로 통합하는 것에 성공했다. 특히 우주, 보편적 생명 그리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재성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되고 있으므로 우주적 생명의, 개인적 실존의, 역사의 “부정적 측면”은 종교적 의미를 획득한다. 세계는 전능한 인격적 신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저절로 만들어진 우주라고 하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가 아니다. 신은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우주의 물질적 구조에서부터 인간의 의식에까지 이르는 모든 지평에서 활동을 계속한다.
『바가바드기타』의 메시지는 모든 종류의 인간에게 열려 있었으며, 모든 종교적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인격적인 동시에 비인격적이며,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이며, 육신으로 현현한 동시에 초월적인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해 얻어지는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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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의 신(비슈누–크리슈나)은 세계의 창조주이며 역사의 지배자로서, 예언자들이 이해했던 그 야훼 신과 유사한 존재라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구세주로서의 신을 믿고 헌신함으로써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달라 보였던 인도와 유대의 종교가 여기서 교차하는 것이 재미있다.
고통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는 사문들이 늘어나자, 위기를 느낀 브라만교의 혁신이 『마하바라타』와 『바가바드기타』의 장대한 종합으로의 힌두교라고 한다. 숲으로 들어가는 사문들에게 역사적인 삶을 지속하지 않으면 우주가 존재하기를 멈춘다고 설득한다. 실제로 모두가 숲으로 들어가면 사회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세속의 삶을 살면서도 행위의 결과를 포기하고, 의무를 다하며, 신에게 헌신함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길– 까르마 요가와 박티 요가–이 인도 종교에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