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학은 일상과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석기에서 살아가려면 먼 곳에서도 물을 구할 천리안, 웬만한 도구는 만들 수 있는 손, 간단한 도구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무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빠르게 자기 역할을 찾는 맥락 파악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군림받거나 군림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자연학적 지식, 기술, 사회적 지능이 뛰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돈 벌기가 싶냐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 말고도 다른 옵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다른 가능성, 이를테면 효율, 이익과 무관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그저 친구들과 아무런 이해나 계산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죠.
[이븐 바투타 여행기(2)] 순례, 성숙한 삶을 위한 수행의 과정
해양 인류학, 『이븐 바투타 여행기』 에세이, 보나
보나
인문세 해양 인류학팀은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기존의 상식이 흔들리는 경험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상식이 흔들리는 이러한 관점을 해양인류학적 관점, 이러한 관점으로 세상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다 인류라고 부르고 있다. 3분기에 만난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이븐 바투타가 이슬람교 종교 의무의 하나인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약 30년에 걸쳐 여정을 이어간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생활상과 기사이적(奇事異蹟)을 기록한 여행기다.
낯선 세계의 생경한 문화를 접하며 겪는 이븐 바투타의 고군분투와 각 지역의 비현실적인 전설과 에피소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기행문이 전개될수록 이 여정이 그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이어진 것인지 궁금해졌다. 목적의 달성 자체를 목표로 삼는 현대인의 사고로는 메카 성지순례는 초반부에 끝마쳤으니 이제 집으로 귀향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븐 바투타 또한 어떠한 미션과 목적지가 있었지만, 변화하는 상황과 더불어 그의 여정 또한 변주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이븐 바투타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일상에 녹아있는 오래된 의례와 관행을 수행하며 자신의 상식 밖 넓은 세계를 주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여정이 각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과 선배 무슬림들의 노력, 알라의 자비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많은 인연의 고리로 얽혀 있는지 깨닫고 일상의 한 부분을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매일 의례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순례기라고 말할 수 있다. 순례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궁리하는 성숙한 삶을 위한 수행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랜 여행을 통해 마치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통해 순례의 의미와 그 방식을 좀 더 고찰해 보자.
순례자와 대상 일행(알-와시티(al-Wasiti)가 바그다드에서 제작한 13세기 책 삽화)
수동적 순례
이븐 바투타 여행기가 순례기라고 생각한 이유는 몇 가지 특색있는 방식 때문이다. 이븐 바투타의 순례 방식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꼽아볼 수 있다. 첫째, 여정이 수동적이라는 데 있다. 처음에 이븐 바투타는 메카 성지순례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지며 22세에 혈혈단신으로 부모와 고향과 석별하며 여로에 올랐다. 이븐 바투타의 이러한 옹골찬 의지와 의도는 갑자기 변하는 날씨와 병으로 인한 동행의 죽음, 본인의 열병 등 수많은 변수를 마주하며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이븐 바투타는 그의 모든 여정이 자신의 의지와 의도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이 준 희사와 시주물, 선지자들의 은총과 알라의 자비에 기대어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수동적이라 하면 시켜서 억지로 하게 되는 강제성에 초점이 맞춰져 부정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존재의 생사(生死) 자체를 포함하여 삼라만상에 과연 수동적이지 않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잠시나마 수동과 능동의 경계가 흐려지게 되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는 이러한 수동성이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온다. 이븐 바투타는 여행 초기에 인도나 중국에 가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에서 체류할 때 만난 이맘 부르한 딘이 인도와 중국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인사를 전해달라는 말에 흥미를 느껴 여로가 변경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게 된 연유도 인도 쑬퇀에 의해 중국 사절로 파견된 까닭이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고향 마그리브로 귀향한 후에 안달루쓰와 아프리카 쑤단을 방문했을 때도, 성도로 귀환하라는 마그리브 주공의 어명장에 의해 마그리브의 수도 파쓰에 종착(終着)하게 된다. 복잡하게 얽혀 벌어지는 세상사가 그러하듯 그의 여정 전체를 살펴보면 사실 온전히 능동, 수동을 구분 짓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여정을 수동적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단편적 사건이 다른 조건들과 얽히고설켜 복합적으로 변주된 상황을 받아들이는 이븐 바투타의 태도 때문이다. 우리는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 인과의 구분은커녕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조차 하기 힘든 일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이븐 바투타는 주어진 상황에 맞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여정을 조금씩 수정해 나아갔다.
처음에 메카 성지순례가 목적이었던 이븐 바투타는 인도와 중국에 가볼 생각이 없었지만, 이맘 부르한 딘의 말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나일강 강안의 파와(현(現) 푸아(Fua)) 시 부근에 은거한 샤이흐 아부 압둘라 알 무르쉬디는 이븐 바투타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가 메카뿐만 아니라 예멘과 이라크, 터키, 인도까지 돌아보며 선지자들을 만날 것이며 인도에서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달샤드’란 인도인이 그를 구제해 줄 거라는 예언을 한다. 놀랍게도 이러한 예언은 이루어진다. 이븐 바투타가 델리에서 중국으로 이동하는 중에 잘랄리에서 이교도와의 전투가 벌어진다. 그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으나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망치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달샤드가 나타나 도와줌으로써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의 정크선에 탑승하려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븐 바투타만 탑승하지 못했는데, 앞서 출발했던 사람들과 예물을 실은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신시 예배를 위해 육지에 남았던 그는 목숨을 구했고, 그의 여로는 지바툴 마할제도로 바뀌게 된다. 인도 남부의 마아바르 지방에서 치명적 열병에 걸려 죽을 뻔했을 땐 특정 약을 먹으라는 알라의 계시를 받고 병이 치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의 여정이 단순히 개인의 의지와 결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느껴지게 한다.
수행적 순례
둘째, 여정의 방식이 수행적이다. 이는 이븐 바투타가 여행하던 14세기(여행 기간: 1325.6.14.~1354.1)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 14세기 이슬람 세계는 동방의 일한국, 서방의 맘루크조, 이베리아반도의 나스르조를 비롯해 다중심적 다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8세기 초 우마위야조에 성행하던 사치풍조의 반동으로 출현한 ‘수피즘’은 기독교와 인도 사상,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수행과 숙관, 포교활동의 거점인 자위야를 통해 확장하고 있었다. 수피즘은 통일된 교단과 교리를 가지지 않고 개인의 독경과 암송, 명상, 고행과 금욕을 통해 참회하고, 은둔과 독서, 청빈과 금욕, 마음과의 싸움, 알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 단계를 거쳐 신과의 일체감을 얻는 방식이다. 이슬람교에서 수행(修行)은 샤이흐의 지도하에 독경과 암송, 명상. 예배 등의 도정 과정을 끊임없이 밟아나가며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구현 방도이자 지침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이러한 수행을 통해 세속의 때를 벗고 잠시나마 일상을 성스럽게 만들어 알라와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노력은 매일 아침, 정오, 신시, 저녁, 밤 5번에 걸쳐 근행되는 예배와 신앙고백, 자선, 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금식(라마돤), 성지순례의 5대 의무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들에게 매일 근행되는 예배를 비롯해 종교의식을 거행할 때 사전에 몸을 정결히 하는 세정(洗淨)과 성지순례의 첫 의식인 수계(受戒)는 중요한 종교의식 중 하나다. 세정을 하고 수계의를 걸치고 수계배 2배를 올린 다음 알라의 부름을 받고 왔다는 응소사(應召詞) 경문을 송독하는 수계의식과 의식이 거행되는 수계참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메카에서 2마일쯤 떨어진 탄임으로 가는 길가 양옆에는 자히르 우물이 있다. 이 우물가 양쪽에는 물주머니와 부분세정용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고 우물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는 모두 이곳에 온 수행자들이 순례자들이 씻고 마시고 부분세정하는 데 편리하도록 봉사한 결과이다. 또한 탄임은 수계참이 있는 성소로 사람들은 순례자들 중에 맨발인 사람들을 배려하여 매일같이 길을 청소한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는 알라와의 합일을 위한 이러한 모든 의례와 의식, 행위들이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신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자비, 은총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고, 그의 모든 여정 또한 이러한 은총으로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해상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합적으로 형성된 이슬람문화는 바람과 조류에 의해 이리저리 뒤섞이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바다의 모습을 닮아 있다. 세 개의 대륙을 거쳐 다양한 세계를 접하며 30년간 이어져 온 이븐 바투타의 여정이 끊임없이 감사함을 깨닫고, 이러한 감사함에 응대하기 위한 수행적 방식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의 고정된 기준에 따라 사람과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자문하게 된다. 또한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순례의 의미
무슬림들에게 성지순례는 일생에 꼭 한 번은 경험해야 할 중요한 종교 의무의 하나다. 일상의 모든 가치판단의 근거를 『꾸란』의 교리와 규범에 두고 있는 샤이흐이자 법관인 이븐 바투타는 여행 중에 메카 성지순례를 4번이나 할 만큼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아프리카 대륙의 모로코가 고향인 그에게 동방의 이슬람문명의 발원지는 선망과 탐구의 대상이었다. 이븐 바투타는 여행기에 이슬람의 성소와 명소, 명인들을 찾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술했고, 선지자들의 묘소도 빠짐없이 들러 그들에게 알라의 자비와 영총을 빌며 독실한 무슬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현세까지 이어진 알라와 선지자들의 은총에 경의를 표하며 이슬람의 근원에 다가가려 했던 이븐 바투타에게 순례란 어떤 의미였을까?
선민샘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순례란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한다. 공간적으로 종교적 발원지 혹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자 라마단처럼 시간적으로 ‘성(聖)’을 부여해서 성과 속이 따로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며 근원에 다가가는 여정을 의미한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란 무얼까? 금욕과 수행을 통해 잠시나마 신과의 합일을 느끼며 성과 속, 자타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존재 자체로 전지전능한 유일신 알라를 믿으며 신의 계시인 『꾸란』을 삶의 기본 원리로 삼아 살아왔다. 그들은 꾸란을 단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의 일부가 되는 방식을 구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형식화하고, 엄격하게 의무화한 의례를 수행하며 신과의 합일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왔다. 신과의 합일을 위한 이러한 수행의 과정인 순례는 일상에 녹아있는 의례와 관행의 수행을 통해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얼마나 많은 인연의 고리로 얽혀 있는지 다시금 깨닫고 감사함을 되새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순례란 편협한 아집을 내려놓고 각양각색의 타자들과 더불어 살아갈 방식을 모색하며 일상을 좀 더 성숙한 태도로 살아가기 위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꾸란(https://islamicknowledge.co.uk)
자타(自他)의 경계를 넘나드는 깨달음의 여정
이븐 바투타는 메카, 메디나 등의 성지를 찾아가 참배하는 여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을까? 무슬림으로서 의무를 완수했구나! 라고 안도했을까? 여정에서 만난 명인, 선지자들의 행적을 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모색했을까? 그는 여정에서 만난 각 지역의 다양한 생활상과 길상의 현현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수많은 기사이적(奇事異蹟), 선조들의 노력과 분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명소들, 선지자들이 알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법을 직접 보고 듣고 배우며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이어간 것 같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신을 향한 그의 수행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아도 순례기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여행기 곳곳에 다른 언어와 종교,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과 각 지역의 샤이흐와 현인, 수행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이븐 바투타는 여행지의 다양한 모습을 주시하면서도 여정의 모든 곳에서 알라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매일 꾸란의 독경과 암송, 예배를 근행하며 자타의 구분과 성과 속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가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매일 선현들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고, 주어진 상황에 불평하기보다 그에 맞춘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기 때문이었다.
수동적이며 수행적 방식으로 여정을 이어간 이븐 바투타는 기존의 상식이 흔들리는 관점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고민했다. 자신보다 더 넓은 세계를 주시하며 자신의 편협함을 넘어 삶의 지평을 넓혀간 이븐 바투타를 보며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고민해보게 된다.
메카, 카바 주변을 도는 순례자들(세계 디지털 도서관,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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