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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생각>에서는 만물이 하나임을 통찰하는 오강남 선생님의 ‘아하’ 체험을 매월 게재합니다. 비교종교학자이신 선생님께서는 종교란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연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하’ 체험이 가능하도록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요. 오강남 선생님은 캐나자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로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저서로는 『예수는 없다』,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세계 종교 둘러보기』, 『종교란 무엇인가』,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등이 있습니다.

속담으로 보는 세상 <품안에 있어야 자식>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5-08-31 23:45
조회
22

속담으로 보는 세상 <품안에 있어야 자식>

 자녀들의 독립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 오강남




옛날 사람들도 십대의 반항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을까? 그런 말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품안에 있어야 자식이라는 이 속담이 그 비슷한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식도 부모의 품안에 있어야 자식이지, 머리가 굵어 부모 품안을 떠나면 자식이라 할 수 없다니, 품안에 있을 때 자식 같은 자식과 품안을 떠났을 때의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어릴 때 자식 같은 자식은 부모가 없으면 한시라도 못살 것 같이 따르고 고분고분하고 귀엽기 그지없었는데, 이제 키도 훌쩍 커지고 목소리도 변할 때 쯤 되니까 오히려 어디 같이 가자고 해도 마다하고, 말도 전에처럼 잘 안 듣고, 부모가 상관하는 것을 싫어하고, 뭐든지 자기 고집대로 하려 해서 도무지 어릴 때의 그 자식과 같은 자식이란 생각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심한 경우에는 부모에 반항하거나 대항하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어릴 때의 자식 같던 자식으로서의 자식은 사라지고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이 새로 생긴 기분이 든 모양이다.


옛날에는 품안을 떠나는 것이 언제쯤이라고 생각했을까? 모르긴 해도 지금 서양에서 말하는 틴에이지(teen-age), 그러니까 만 열세 살 정도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통들을 보면 대개 그 정도의 나이에 부모에게서 떠나 하나의 독립된 인격을 갖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대교의 성인(成人)식인 바르 미쯔바’(남자), ‘밧 미츠바’(여자)라 하는 것도 아이들이 열세 살 때 행해진다.

그런데 왜 그때 부모의 품을 떠나려는 마음, 심지어 반항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진화심리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성인으로서 짝을 찾아야 할 나이인데, 만약 부모와 마냥 좋은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대로 자기 살던 곳에 눌러앉아 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족내혼(族內婚, endogamy)이 성사되어 훌륭한 종족 보존에 지장이 올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생리적이랄까 유전학적으로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어느 때가 되면 저절로 부모와 불편한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한 관계 때문에 자연히 딴 곳으로 옮겨 가게 되고, 거기서 족외혼(族外婚, exogamy)이 가능하게 되도록 짜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동물들, 예를 들어 원숭이들도 새끼 원숭이가 생식이 가능해지는 나이가 되면 부모와 사이가 나빠져 집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이론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식이 크면 부모의 할 일은 자식을 어릴 때 자식처럼 붙들어 매어 놓고 계속 부모의 그늘 아래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의 독립적 인격으로 인정하고 스스로 자립하게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이제 어머니로부터 제2의 탯줄, 정신적인 탯줄을 끊고 완전히 홀로 서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자식들이 이렇게 부모의 영향에서 독립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고 있었다. 많은 전통사회에서 통과의례(rites of passages)의 하나로 성인식을 했는데,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일정 기간 고립상태에서 심한 고역을 겪게 함으로 어릴 때의 의존심이나 의타심을 버리고 독립적인 개체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을 종교적으로 의식화 한 것이다.

유럽 같은 데서는 아이들이 십대 초반이 되면 도제제도(徒弟制度)를 통해 딴 사람들의 도제가 된다든지, 군대에 가든지. 귀족의 경우 학교 기숙사에 가든지, 아무튼 부모가 아닌 다른 형태의 권위 밑에서 십대를 보내도록 되어 있어서 부모와 직접 충돌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한국 같은 데서도 십대에 일찌감치 부모를 떠나 장가를 가서딴 살림을 차리므로 부모의 직접적인 그늘 밑에서 벗어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태가 바뀌어 서양이나 한국이나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고우나 미우나 부모와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멀어져 독립하려는 마음과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괴리 때문에 아이들이 더욱 뻣뻣해지고, 그래서 요즘은 옛날 보다 부모자식 간의 갈등이 그만큼 불가피하다고 풀이하는 심리학자도 있다.

아무튼 자식도 일단 품안을 벗어났으면 더 이상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길이요, 어느 면에서는 이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위한 참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탕자의 비유라는 것이 나온다. 이 이야기에 보면 한 부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는 집을 나갈 터이니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미리 달라고 했다. 이렇게 자기 못을 챙겨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알거지가 되었다. 남의 집 돼지 치는 일을 거들다가 아버지 집이 생각나서 일어나 아버지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아들을 다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그 못난 짓을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그대로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 보다는 아들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렇게 하도록 해준 너그러운 마음, 멀리 보는 마음,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들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이놈아, 내가 세상을 살아도 너보다는 더 살았고, 내가 세상 물정을 알아도 너보다는 더 안다. 네가 나가겠다니 어디를 간단 말이냐. 가 봐야 돈만 탕진하고 죽어라 고생만 하다가 빈 털털이가 되어 들어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그저 잔말 말고 가만히 있도록 하라고 강제로 붙들어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으면 평생 불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아들도 불행하고, 그런 아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아버지도 불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당장에는 뼈를 깎는 아픔을 맛보는 경우라도 그것을 참으면서 아들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하도록 했다. 이렇게 했을 때 아들은 자기의 인생실험을 끝내고 아버지의 진가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것처럼 새로워진 아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부모자식 간에 새로운 관계, 서로 완전한 독립적 인격체로 다시 만나는 관계를, ‘자식 같은 자식’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의 단계를 거쳐 이제 자식이 정말로 다시 자식 같은 자식으로 넘어가는 제3의 단계로 볼 수 없을까? 인류학에서는 처음 떠나는 단계를 고립(segregation)’의 단계라 하고 이렇게 다시 새로운 관계로 합해지는 단계를 결합(aggregation)’의 단계라고 한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잉그리드 샤퍼(Ingrid Schafer)라는 여자 신학자는 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버지에게 무죄한 아들을 죽이는 일처럼 끔찍한 짓을 강요하는 그런 하느님은 히틀러와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맥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들리는 해석은 정신과 의사 스캇 펙(Scott Peck)의 해석이다. 그도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아들을 죽이라고 한 하느님도 돌았고, 그렇게 하겠다고 한 아브라함도 돌았고, 번제단 위에서 죽기를 멍청히 기다리는 이삭도 돌았음에 틀림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언젠가 자식들을 놓아줘야 할 때가 온다.”는 심오한 진리라고 했다. “자식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우리가 보관하도록 되었지만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시점이 지났는데도 계속 그들을 붙들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지극히 파괴적인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물을 되돌려 주고, 우리의 자식들을 하느님께 다시 맡길 줄을 알아야 한다. 자식들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품안에 있어야 자식이란 말은 결국 품안에서 떠난 자식은 하느님의 자식이란 말인 셈이다. 섭섭해 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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