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류학 만물 사전
인간(persons)
◎ 인류학 만물 사전_인간
인류학이니, ‘인류’에 대한 정의도 필요하다. ‘인류’는 ‘직립 보행’과 ‘문화 구성 능력의 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람들이 신 중심적 세계관을 탈피하고,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세계와 우주를 해석하게 되었다. 이때 ‘인간’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 나온 것은 근대인데, ‘인류학’은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전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백인–남성–지식이 삼위일체가 된 서양 사람을 ‘인류’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비서양–식민지 인간들은 인간이 덜 된 존재, 낯설고 열등한 인류라고 폄하되기도 했다.
∙ 데르수 우잘라의 사람다움
‘인문공간세종’에서는 연결의 애니미즘이라는 키워드로 공부를 하고 있다.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20세기 초 연해주 지역, 타이가 숲의 사냥꾼이었던 데르수 우잘라에 대해 쓴 보고서를 읽게 되었다. 저자는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활달한 지질학자였는데, 극동지역 탐사 과정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를 만나 그 어떤 자연보다도 심오하고 아름다운 그의 영혼에 대한 글을 남겼다. 어찌나 생생하게 데르수 우잘라를 소개했는지, 『데르수 우잘라』를 읽고 당대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가 감탄했다고 한다. 일본의 영화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도 아르세니예프의 글에 감탄하며 《데르수 우잘라》(1975)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아르세니예프가 만난 데르수 우잘라는 소위 문명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때문에 함께 탐험을 하는 군인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기도 한다. 특히 데르수는 모닥불도 안개도 돌도 나뭇가지도 물고기도 호랑이도 전부 ‘사람’으로 대했다.
데르수는 두 가지 기준에서 사람과 사람 아닌 존재를 구별한다. 첫째,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둘째, 윤리적이어야 한다. 다음 두 장면에서 그의 인격론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우선, 곰이 꿀을 찾아 벌통을 마구 뒤지는 장면에서다. 데르수는 벌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허겁지겁 꿀통을 헤집고 있는 곰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야단을 친다. 동물이란 먹고 싶을 때 먹고 눕고 싶을 때 눕는, 자연적 본능에 충실한 존재라고들 생각할 수 있지만 데르수에게는 동물이라는 예외가 없다. 누구라도, 심지어 모닥불이나 바람도 주변을 살피며 배려심 있게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자제하고 남을 생각하며 살아야 ‘사람’인 것이다.
한편 데르수는 상대가 곰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잘못을 했다면 말로 경고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탐험했던 러시아 병사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들어도 다르게 으르렁거리는 곰도 실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다고 데르수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데르수는 타닥거리는 모닥불의 말도 들을 수 있었고,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존재는 악령이었다. 사람의 말만이 아니라 숲속의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떠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것이다. 상대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와 내가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데르수는 언어의 달인이었다.
이런 데르수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사건이 있었다. 우연히, 호랑이를 의도치 않게 총으로 쏘게 된 것이다. 숲길에서 만난 호랑이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데르수는 호랑이를 말로 설득해서 쫓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는 호랑이를 쏘고 만 것이다. 데르수는 자신이 호랑이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으며, 거기에 응당한 댓가를 치루게 되리라고 걱정했다. 그때부터는 어두운 숲을 혼자 걷지 못했다. 보지도 않고 총을 쏘아 새를 잡을 수 있었던 데르수는 그때부터 자신의 사냥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데르수는 사냥꾼으로서의 자기 능력을 총쏘기에서 찾지 않고, 동물과의 대화 능력에서 찾았던 것이다. 대화의 실패, 윤리적 과오, 데르수는 아마 속으로 자신이 ‘사람도 아니’라며 괴려워했으리라.
데르수는 사냥꾼이기 때문에 대화 가능한 존재들이라고는 하지만 숲속에서 사슴이나 담비를 잡을 수 있었다. 아르세니예프가 숲속에서 뭐하고 지내느냐고 물었을 때 데르수는 하루종일 사냥을 했다고까지 말했다. 물론 이 말이 해가 떠 있는 동안 끝도 없이 총알을 쏴대며 포대에 죽은 짐승을 막 담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 데르수는 사슴이나 담비를 끊임없이 설득하면서 네가 목숨을 내어놓을 만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혹은 벌통 앞의 곰처럼 인간성을 잃은 동물만 잡지 않았을까?
∙ 동부 핀란드 옛사람들의 사람다움
직립 보행자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도처의 동식물, 심지어 광물에게까지 사람다움을 보는 사고는 데르수에게만 있지 않다. 최근에 애니미즘이라고 해서 동식물에 깃든 영혼의 문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이 많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에게도 욕망과 감정이 있고, 때문에 그들의 자유의지, 행위주체성이 지구별의 공생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매튜 홀은 특히 식물에게서 행위주체성을 읽는 경우를 찾아 소개한다. 나는 그의 책 『식물 사람–철학적 식물학』에서 핀란드의 옛이야기에 나타난 대화–애니미즘을 보고 데르수가 떠올랐다.
동부 핀란드 신화집 『칼레발라』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식물이 나온다고 한다. 영웅 레민케이넨의 어머니가 지하 세계에서 죽은 아들을 찾기 위해 숲속 나무들에게 자식의 행방을 물었다.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한 나무가 말했다. 전나무는 한숨을 쉬었다.
참나무가 현명하게 대답했다.
“나 자신을 걱정하느라
당신 아들에 대해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오”
전나무에게는 그 자신의 고유한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 걱정할 겨를이 없다는 말이다. 이 전나무가 겪고 있을 걱정과 두려움 상처와 회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전나무도 나도 하루가 똑같이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
『칼레발라』에는 밭을 갈기 위해 숲을 파괴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영웅 베이네뫼이넨은 나무배를 만들어야만 했다. 베이네뫼이넨이 참나무에게 다가가자, 나무가 자신은 구멍이 많고 바닥이 비었다며 베기에 적절하지 않을 거라고 교활하게 대답했다. 베이네뫼이넨은 방향을 돌려 전나무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전나무도 자신은 옹이가 많아서 별로일 거라고 대답했다. 결국 늙은 참나무에게 가서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참나무가 의외로 자신을 베면 정말 큰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너그럽게 벌목을 허락했다(매튜 홀,「6장 이교도, 식물, 그리고 사람다움」,『식물 사람』참고). 핀란드 숲의 나무들은 살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의 허락 없이 베이네뫼이넨은 벌목을 할 수 없다. 여기에서 나무를 베기란 살해나 다름없는 일이다.
타이가 숲의 데르수도 핀란드 숲의 베이네뫼이넨도 대화하는 사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 그렇게 함께인 존재들만을 ‘사람’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상대편에 의해 ‘사람됨’의 자격을 얻는다.
※ 참고문헌 ※
*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김욱 옮김,『데르수 우잘라』, 갈라파고스
* 매튜 홀, 유기쁨 옮김,『식물 사람–철학적 식물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구로사와 아키라,《데르수 우잘라》(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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