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세계종교사상사2] 28장 기독교의 탄생
제28장 기독교의 탄생 :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도와 교회
219. “모호한 유대인”: 나라렛의 예수
* 바울의 개종(AD 32~36): 사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젊은 바리새인으로 다마스커스로 여행하던 중 엑스터스적 경험(부활한 예수와의 만남, 예수의 소명)으로 개종하게 된다. 기독교의 가장 초기 기록들의 저자이다.
* 천년왕국파의 지도자인 금욕주의자 세례 요한: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질서에 반기를 든 진실한 예언자, 계몽된 자였으며 신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선언한다.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몰려왔다.
*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했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한동안 세례 요한처럼 세례를 행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체포한 것이 예수의 설교를 촉발시켰다. 갈릴리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의 변형이 임박했음을 예언한다. 헬리니즘 세계의 많은 “신적인 인간들”처럼 예수는 모든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고 악령에 들린 자들을 해방시켜준 의사였고 주술사였다.
예수의 설교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두 집단을 자극했다. 바리새인들(율법학자들)은 예수가 토라(모세오경)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데 분개했고, 사두개인들(제사장 및 종교 귀족계층)은 메시아 신앙의 포교 후에 생길 수도 있는 혼란을 피하고자 했다. 예수가 설교한 하느님의 나라는 종교적인 광신과 열심당원(무력 투쟁자들)의 반역을 부추겼다.
* 갈리리 호숫가의 기적(오병이어): 약간의 빵과 고기를 기적적으로 늘려서 5,000명이 함께 먹었다. 공동의 식사는 종말에 대한 예견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적에 흥분한 군중들은 예수를 열렬히 기다려온 “예언자–왕”, 즉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예수는 무리를 해산했다.
* 유월절 전날 비통한 밤 : 1. 베드로의 3번의 부인–구원의 여정에서 부정과 회개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위한 범례가 되었다. 2. 겟세마네의 “입문 의례적인 밤샘”-깨어서 기도하라는 예수의 말에도 제자들은 잠이 든다. 잠을 극복하고 깨어 있는 것은 가장 어려운 입문 의례적 시련이다. 이러한 패배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범례가 된다.
* 예수의 체포의 이유: 1. 산헤드린(유대교 최고 의결기관)은 예수가 신성 모독죄(본인을 그리스도라 인정함)를 저질렀다. 2.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선동죄로 심판 받는다.(로마인들의 지배에 대항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
* 예수의 부활: 고난당한 자들의 부활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이해하기 불가능한 기이한 사건은 기독교의 기원과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은 사도들을 최초의 복음 전도자가 되게 했다.
220. 복음: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바울서신(50~68년)에는 예수의 역사적인 삶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다. 공관 복음서(70~90년)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에 구전되는 전승을 모았다. 이것은 예수의 활동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 아니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모델을 만들어 준 것은 예수에 대한 기억이다. 나사렛의 예수를 원형과 초월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투사시킨 신화들은 그의 행동이나 말만큼이나 “사실”이다. 이런한 보편적인 신화와 상징 덕분에 기독교의 종교적 언어는 본고장을 넘어 보편화되고 수용될 수 있었다.
* 왕국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선언
1. 가까운 미래에 도래한다.-예언자들과 묵시록에 선언된 왕국, 즉 “역사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
2. 이미 현재에 임했다.-예수의 중재로 인해 초시간적으로 믿음을 현재화시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대망했던 왕국은 이미 성취했다.
예수는 자신이 전파했던 복음과 유대교의 민족주의적인 메시아 신앙 간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메시아라는 명칭을 피했을 거라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열심당원들이 무력으로 세우기를 원했던 신정국가가 아니었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표현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을 의미했고,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수는 유대 백성들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했다. 새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등장을 의미한다. 예수는 예언자처럼 의례적인 형식주의를 희생시키고 마음의 청결을 찬미한다. 산상수훈에서 그는 끊임없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되돌아갔다.
* 최후의 만찬: 유대인들의 가정의례를 계승한 것이다. 예수는 빵을 들어 자신의 몸이라 하고 잔을 들어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계약의 피라 한다. 새로운 계약 즉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의 자발적인 희생이 필요하다. 이것은 새로운 종교적 삶이 오직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서만 생겨난다는 확신을 담고 있다.(고대적인 관념)
* 초기 기독교인들의 공동 식사: “빵을 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의례 행위였다. 그리스도의 존재를 재현하는 것이고 왕국을 재현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구세주의 자발적인 희생을 의례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방을 추구하는 한, 초기의 식사는 실질적으로 성사를 구성하고 있다.
221. 교회의 탄생
성령의 강림은 시나이산에서의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계시와 비슷하게 하느님으로부터의 새로운 계시로 해석될 수 있다. 성령을 받고 난 후에야 사도들은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고, 많은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전통적인 종교적 규칙들(남자 유아들의 할례, 의례적인 정화, 안식일의 준수, 성전에서의 기도)을 계속 따르면서도 가끔 가르침을 받기 위해, 빵을 떼기 위해, 성찬을 위해,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세의 관습을 엄격하게 지켰지만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의 적의를 샀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의 개종자들(히브리파)에게는 우호적이었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 개종자들(헬라파)에게는 적대적이었다. 히브리파는 보다 보수적이고, 율법주의적으로 유대인의 의례 규정을 충실하게 따랐고, “유대–기독교” 운동의 전형적인 대변자들이었다. 헬라파 유대인들(바빌론유수 등으로 흩어졌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의 추방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한, 안티오크의 이교도들을 향한 선교 작업을 촉진 시켰다. 선교의 방향은 이교도들에게로 맞추어졌다.
222. 이교도들을 위한 사도
이스라엘 민족 종교였던 유대교에서 보편종교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을 모시고 있다.” 성 바울은 세례라는 성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최근의 역사적인 사건과 연결한다. 세례는 신자들의 새로운 생명을 보증해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의 일부로 변환하도록 해준다.
성찬이라는 성례는 유대교에도 낯선 것이다. 세례와 마찬가지로 성체는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인 교회와 결합한다. 영성체를 통해 그는 주님의 몸과 피와 동일시된다. 성 바울에게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일치와 같다. 구원은 하느님이 베푸는 은사(恩賜, 은총)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교도나 유대인이나 구원은 오직 믿음과 성사(聖事)에 의해서만 성취된다.
바울은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복음 전파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카리스마(charisma)에 대한 탐구를 인정했다. 카리스마는 영적인 은사들이나 성령으로부터 받은 능력(치유, 기적, 예언, 방언, 방언의 해석)을 말한다. 또한 신체의 부활과 세계의 종말론적인 갱신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종말론적 기대에 대한 말을 줄이고,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 어휘(gnosis, mysterion, sophia, kyrios:主, soter:구세주)를 사용하고, 그노시스주의의 근본적인 이원론적 관념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재림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밝혔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공동체와는 달리,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갈 지침을 얘기했다. 일할 필요성과 율법에 대한 존경, 권위에 대한 복종, 세금 지불을 요구한다.
바울과 그의 서신들이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의 대재앙의 결과이다.
223. 쿰란의 에세네파
68년 로마 군대는 사해 연안의 넓은 사막에 위치한 쿰란 수도원을 공격하여 파괴했다. 그들의 필사본이 1947년 발견되었다. 사두개파의 제사장인 “정의의 교사”가 쿰란 공동체를 창시했으며 그들의 조상은 경건주의자(하시딤)들이다.
*초기 기독교와 에세네파의 종교 관행들 사이의 중요한 유사점
모두 묵시적인 신앙과 메시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스스로를 새로운 계약의 사람들이라 간주했다.
해석 방법의 유사성: 유대의 묵시문학은 비의적인 지식을 찬미했고, 바울과 마태와 요한의 저서에도 비밀스런 그노시스와 비의주의는 묵시록적 ‘방법’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엘리아데는 이런 유사성으로 로마의 공격으로 에세네파의 흩어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공동체에 합류했을 것으로 본다.
신학 용어의 유사성: 세상의 빛, 빛의 아들,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 빛으로 나온다.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
쿰란 텍스트는 성령의 기원을 이해하게 해준다. 형태론적인 차원에서 그는 야훼의 하늘의 궁정에 거주하는 자, 특히 천사나 신의 전령과 같다. 요한 문서의 저자와 에네세파는 팔레스타인의 혼합주의적인 신학과 종말론을 공유했다.(이란의 이원론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음)
*차이점 및 상이한 목적 추구
에세네파 | 초기 기독교 |
사막에서 엄격한 은둔생활 | 속세에서 생활, 선교 공동체 구성 |
사제적 전통에 기인, 사제와 일반신자의 분리를 유지 강화 |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에 깊은 뿌리 |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에 벌이는 종말론적인 전쟁 기다림 | 성전(聖戰) 이데올로기 수용하지 않음 |
육체적 영적으로 불결하거나 기형인 자들은 메시아의 만찬에서 배제 | 모든 사회계층 수용, 약한 자들 치료 |
그들을 성화시킬 사제로서의 메시아와 이교도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줄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림 | 세상의 심판자와 구세주 그리스도의 재림 희망,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은사 |
224. 성전의 파괴, 재림의 지체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운명에서 분리시키고 있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로마군에 대항하는 전쟁을 거부하고, 유대–기독교인들은 66년에 퇴각하여 여러 도시로 피신했다. 이 사건은 교회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 거룩한 도시의 황폐화와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지향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유대교: 군사 반란에 강력히 반대했던 랍비 요하난 벤자카이는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야브네에서 초등학교를 세우고 유대민족의 영적인 가치를 구출한다. 유대교는 계속되겠지만 헛된 묵시적인 희망과 메시아 신앙을 접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만을 따름으로서 “개혁”될 것이다. 처음에는 율법과 회당이 강화되고 『미슈나』의 가치가 인정되고, 최종적으로 탈무드의 가치가 인정되었다. 성전의 두 번째 파괴는 성소, 의례가 수행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를 빼앗기고, 신자들은 기도와 종교적인 가르침만 갖게 되었다.
–기독교: 전쟁 중에 기독교인들은 묵시적인 열광들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재림의 지체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고 여기에 주어진 대답은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1. 재림의 임박성을 훨씬 더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2. 재림은 보다 먼 미래로 연기되었고, 이러한 긴 간극은 교회의 선교 활동을 위한 기간으로 정당화했다. 3. 재림은 이미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부활은 진실 된 “마지막 사건”이고 이미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범속적인 것 안에서 성스러움이 드러나는 것은 동시에 하나의 위장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움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대상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에게 명백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성스러움–하느님 나라–이 역사적으로 제한된 인간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그 자신을 드러냈다. 확실한 신의 나라는 무엇보다 신자들에게 “분명해질” 것이지만,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성화 된 삶과 그로 인한 개종을 독려하는 범례가 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변증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역설적으로 현대의 기독교 세계에서 계속 진행 중인 수많은 “탈 신성화”(복음서와 전승에 대한 탈 신화화, 전례의 통속화, 성사의 간소화, 반신비적 성향들과 종교적 상징의 평가절하, 교회의 윤리적인 가치와 사회적 기능에 대한 특별한 관심 등)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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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도 고대의 신들이 자신의 몸을 찢어서 우주를 창조했던 희생 제의에 해당될 것 같다. 축의 시대의 신들은 더 이상 우주를 창조하지는 않고 개인을 고통에서 구원해 준다. 예수의 자발적 희생으로 사람들은 속죄되었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으로 성스러운 신과 신비로운 합일을 이룬다. 신약 성경 안에 이러한 신비적이고 그노시스적인 부분들이 많고 바울이 선교여행으로 헬레니즘적인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러한 보편성이 팔레스타인에서는 배척당하던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성령의 활동인 카리스마(charisma)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긍정과 수용도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신비적인 모습이 현재의 한국교회가 이단시하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