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극장판 <모노노케 히메> : 사슴신은 극장에서 만나자
◎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 극장 관람기
사슴신은 극장에서 만나자
달님
《모노노케 히메》(1997)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착한 자연의 영들을 소개했다고 평가받은 《토토로》(1988)와 거리를 두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순진하고 따스하기만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욕망하고 느끼며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자연을 그리기 위한 작품인 것이다. 이번에 다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극장으로 향했다. 노트북과 같은 작은 화면으로 말고, 큰 스크린으로 ‘자연의 위용’과 ‘자연의 감정’을 다시 한번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함께 극장의 어둠 속에 몸을 담그기! 저마다 느끼는 감동이야 다르지만, 같은 지점에서 함께 영화를 따라가는 동질감을 나누어야 하므로 나는 보은에서 출발하시는 선생님과 함께 오송역을 출발해 서울 영등포의 극장으로 갔다. 역사에서 보니 선생님도 나도 긴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을이 온 것이다.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자연을 한번 제대로 해석해보고 싶다’, ‘한번 다르게 그려보고 싶다’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야심을 다시 떠올렸다. ‘올해가 최고로 시원한 해다’라고 자조해야 할 정도로, 덥고 힘들었던 여름을 지났다. ‘자연을 그려 보자’라는 안내를 받는다면 나는 캔버스의 어디서부터 어떤 그림을 시작할 수 있을끼? 잔인한 더위와 무자비한 폭우, 그러면서도 갑자기 시원해지는 바람과 들판 위로 올라오는 가을의 결실들……. 가만히 있지 않고, 늘 새로운 기운을 갱신하는 자연에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나는 어떤 표정의 자연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본 《모노노케 히메》가 넷플릭스를 통해 보았던 《모노노케 히메》와 가장 달랐던 점은 도입부였다. 갑자기 넓고 깊게 펼쳐지는 겹겹의 산들과 서린 눈, 그리고 안개가 앞으로 일어날 비극적인 사건을 무시무시하게 암시했기 때문이다. 큰 화면에서 보니까 화면의 전개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장면 전환이 빨라서 뚝뚝 끊어지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런 거친 전개 덕분에 긴장감은 배가 되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재앙신의 ‘화’도 기대 이상으로 울긋불긋 울퉁불퉁 끔찍했다. 온몸에서 썩어가는 장어 같은 것들이 뻗어 나와 꿈틀대는 모습, 그 화가 숲과 인간의 마을을 다 덮치고 순수한 소년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리는 순식간은 ‘화’라는 감정의 잔인한 폭발력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화’를 내고 있는 자연을 보니, 나처럼 화를 내는 그가 안타깝고 가련한 존재로 느껴졌다. 재앙신의 출현으로 사방이 어두워진다든가, 그의 죽음이 주는 갑작스런 적막감이라든가, 영화관에서 보니 화면이 주는 스케일과 디테일을 살린 사운드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리의 압권은 신성한 숲의 정령인 고다마가 덜그덕거리는 것이었다. 관절이 부드럽게 덜렁거리는 느낌. 숲이라는 자연의 영성을 어딘가 인공적인 느낌이 나는 뼈 부딪치는 소리로 표현할 생각을 했다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금 놀라웠다.
자연을 대표하는 신 중의 신, 사슴신은 역시 아름다웠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몸은 사슴인 신은 낮과 밤의 모습이 다른데, 호수 한가운데에 서서 달빛을 받아 ‘고지라’처럼 몸이 커지는 과정이 스크린 전체에서 펼쳐질 때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내가 신성한 숲 안에서 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커지면서 투명해지는 그 몸의 영롱함이 압도적으로 전달되었다.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재미있는 작품이라, 쭉 서사를 따라가면서 관객을 짜증나게 하는 인물들 욕도 하고 모노노케 히메와 아시타카의 사랑도 응원하면서 잘 볼 수 있었다. 감독님이 정말 ‘편집’에 열을 올리셨다는 점(죽어가는 신과 아무 것도 모르고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의 대비라든가), 작품 자체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왜 극장에서 보아야 할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번 들어가면 중간에 나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독님은 하나의 장면을 취사해서 좋아하는 것만 보고 아닌 것은 건너 뛰며 영화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그렇게 뭔가를 ‘선택’하는 일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인 동쪽 사람 아시타카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재앙신 나고의 저주를 받았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저주를 끼친 사람들이나 재앙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운명은 무엇을 선택하느냐, 어느 편에 설 것이냐 등에 달려 있지 않았다. 아시타카는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맑은 눈으로 이해하면서, 당장 그 순간에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갔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 일으킬 인과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를 어디론가로 이끄는 ‘사건의 문’이다(미야자키 하야오는 ‘문’이라는 설정을 좋아한다. 주로 터널로 표현한다). 그러니 아시타카처럼 당황하지 말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자. 구석구석 작품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었지만, 복수보다도 모정에 자기 삶을 던진 들개 엄마 모로의 표정이라든가 완전히 낯설게 다가오는 장면이 많았다. 극장에서 나와 맛있는 쌀국수를 먹으며 토론을 했다. 친구들의 얼굴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작품 속 인물들처럼 아주 생기로웠다. 좋았던 부분,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목, 호기심으로 터질 듯한 이마와 국수로 빵빵해진 볼 들. 나의 자연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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