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제주신화와 해양문화] 땅에서 솟아난 탐라
땅에서 솟아난 탐라
『제주신화와 해양문화』①/오켜니
12세기까지 유지된 탐라국의 자취가 무당의 무가(巫歌)를 통해 전해져 온다는 점이 놀라웠다. 구비문학인 민요·설화·무가는 세상과 인간의 기원, 토착민과 이주민의 역사, 수렵신과 해양신에 대한 믿음 등 철학, 종교, 역사의 혼합물 범벅이다. 고대에 육지의 이주민이 제주의 환경에 적응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제주 토착민들은 이주민이 가져온 창세서사시를 누르고 탐라가 ‘땅에서 솟아났다’는 신화소를 가진 건국서사시를 만들게 된다.
탐라국 건국서사시에 성씨가 결합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일 것이고, 창세서사시를 담당했던 세력과 건국서사시를 내세운 집단은 서로 달랐을 것이 자명하다. 그 이유는 ‘땅에서 솟아난’ 탐라의 고유한 신화소 때문이고 이런 화소는 전 세계에서 제주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느 쪽을 보더라도 탐라국 역사를 본토의 역사에 종속시켜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에 동의한다.(허남춘, 『제주신화와 해양문화』, p71)
제주의 <서귀본향당본풀이>는 수렵신을 대상으로 하는 당(堂) 신화이다. 태고적 인간의 생업활동은 수렵과 채취였다. 따라서 <서귀본향당본풀이>는 사냥하는 행위와 사냥을 관장하는 신에 대한 이야기로 가장 오래된 신앙서사시이다. 바람과 사냥의 관계를 알려주는 ‘바람웃도’라는 신이 출현하며, ‘뿡개질’을 통해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했음을 알 수 있다.
수렵신을 대상으로 하는 신앙서사시 뒤에는 세상이 생겨난 내력, 인류의 기원, 인간 사회 형성 등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관심사에 대한 서사시가 나타난다. 이러한 창세서사시에는 문화영웅이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창세서사시는 원시에서 고대로의 이행기에 나타난다. 하지만 수렵신을 섬기는 신앙서사시 속에서 창세서사시가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신앙서사시가 다음 시기의 창세서사시의 영향을 받아 변모한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육지와 제주의 창세서사시에서 유사점은 ‘천지개벽, 인세차지경쟁, 일월조정’이란 신화소가 공통으로 들어 있고, 창세의 주체가 거인신에서 천부지모(天父地母)형 인간영웅으로 바뀌는 점이다. 창세신화의 주인공은 거저, 유운 거저, 활선생 거저였다가 대별왕, 소별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주의 천지개벽은 육지의 천지개벽과 다르다. 제주의 천지개벽에는 천상계의 개입이 없고, 창세의 주인공이 땅에서 솟아나고, 창세신으로는 설문대할망이 원조이고 남성 거대신은 설문대할망의 변형이거나 후속형이다.
창세의 이야기에서부터 우스개 이야기까지 신화, 전설, 민담에 두루 퍼져있는 것이 설문대할망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들에 따르면 제주의 한라산이나 360여개의 오름은 설문대할망의 작품이다. 이처럼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지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지만 한라산의 산신이나 항해 안전을 돕는 해신으로도 그려진다. 이것은 창세서사시가 신앙서사시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앙서사시를 받드는 집단과 창세서사시를 받드는 집단은 달랐을 것으로 본다. 창세서사시는 이주민이 외부에서 들여온 것이고 신앙서사시를 신봉하던 주체는 선주민이다. 고대국가 <탐라국> 건설을 주도한 집단은 선주민이다. 창세서사시와는 다른 ‘땅에서 솟아난’ 선주민이었다. 제주 선주민들은 <탐라> 건국서사시의 주역이다.
제주의 원시·고대서사시를 시대 순으로 나열하면, 신앙서사시–창세서사시–건국서사시인데, 신앙서사시 집단이 건국서사시 집단과 연결된다. 당 신화와 건국신화가 서로 연결되고 영향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당 신화와 건국신화의 상호작용과 선후관계는 파악이 쉽지 않지만, <서귀본향당본풀이>나 <궤네깃당본풀이> 등은 건국신화에 앞선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