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환동해 문명사] 에세이(1) ‘환동해’라는 액체 사람들
‘환동해’라는 액체 사람들
액체의 역사, 환동해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지중해를 떠올리면, 지중해와 환동해는 열려 있는 정도와 방식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중해는 내해로서 입구가 좁고, 해협이라는 문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열려 있다. 육지를 경유해야 하는 폐쇄적 개방성을 지닌 셈이다. 반면 환동해는 북쪽으로 완전히 열려 있어, 그 자체로 흐름과 이동의 장이 된다.
『환동해 문명사』에서 저자 주강현은 브로델이 지중해를 도시와 길의 역사로 읽었던 것처럼, 환동해 역시 영토의 논리를 넘어서는 ‘바다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바다를 ‘환동해’라 부르며 ‘동해’나 ‘일본해’처럼 특정 국가 중심의 명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환동해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며 관계를 맺는 ‘환(環)’의 바다이다. ‘환(環)’이라는 의미 속에서는 어떤 지역도 서로에 대해 상대적이며 어떤 곳도 절대적 중심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연결되고 순환되는 운동을 의미한다.
환동해를 길로 비유하자면, 북방으로 향하는 길이자 남방으로 향하는 길이며, 그 자체로 소통의 길일 것이다. 서해가 중국 대륙에 접속된 ‘정해진 길’, ‘닫힌 바다’라면, 동해는 아직 탐험되지 않은 ‘흐르는 길’, ‘열린 바다’이다. ‘열려서 흐르는 운동성’이야말로 환동해 세계의 특징이 아닐까. 이러한 시각은 환동해를 단순한 지정학적 공간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 지역 사람들의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는 힌트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열려 흐르는 이 구조에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섞이고 다시 흩어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환동해의 역사는 곧 ‘관계의 역사’, 그리고 ‘액체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바다에서는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관계와 흐름이 역사의 동력을 이룬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간은 이 바다와 맺고 있던 동력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 주강현은 이 연결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발해를 비롯한 고대의 유목적 세계관은 여전히 이 바다의 심층에 흐르고 있으며, 관계의 감각과 순환의 질서를 통해 현재를 은밀히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강현은 환동해의 역사를 통해 고대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끊임없이 이동하고 교류하면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액체의 역사, 그들의 관계 감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또 이 관계 감각을 통해, 유목하는 가운데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다듬어 갔는지, 환동해 열린 바다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자.
러시아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순혈주의로 타자 제거하기
오늘날, 우리가 열린 바다로서 환동해, 그 관계의 연결망을 친밀히 느끼지 못하게 된 시작에 러시아의 동진(東進)이 있다. 러시아 동진은 유라시아 문명사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사건 중 하나로, 근대 이후 ‘영토 국가’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의 핵심 사건이다. 러시아가 왜 동쪽으로 갔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근대 국가가 어떻게 자신을 확장하고 정당화해왔는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은 곧 ‘식민지 건설’을 의미했다. 러시아가 이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화를 경험했음에도 이러한 팽창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진화론’이라는 제국주의의 왜곡된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상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인류는 진화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진화의 단계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향하는 단선적 진행이라는 믿음이다. 이 단계적 진보의 관념은 곧 식민지 건설을 정당하게 만드는 윤리적 근거가 되었다. 제국에게 식민화는 미개를 문명으로 끌어올리는 사명으로 간주되었고, 제국은 스스로를 문명화의 주체로 상상했다. 그렇기에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필수적이었으며 식민지가 없다는 것은 곧 문명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유럽 각국이 차례로 식민지를 확보하며 자신들의 문명적 우월성을 입증할 때, 러시아는 유럽의 변두리로 남아 있었다. 식민지를 갖지 못하면 제국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러시아를 움직였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서유럽의 제국들이 아직 미치지 못한 아시아 동쪽으로 눈을 돌리고, 그곳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문명국이 되었다.
이 같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은 이후 ‘순혈주의’라는 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러시아 영토국가의 정체성은 ‘우리 국민, 우리 러시아인, 우리 백인만이 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배타적 신념 위에 세워졌다. 이 논리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공포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기 정체성을 타자의 배제 위에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를 무엇으로 묶을 것이가에 대한 질문에 이들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만을 순수하게 남겨놓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1900년경 아무르주도 블라고베셴스크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이곳에서 약 5,000명의 중국인과 만주인이 강에 수장된 대학살이 벌어졌는데, 이는 러시아 영토국가의 순혈주의적 정체성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나’의 순수함을 증명하기 위해 타자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영토 국가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식이다.
관계의 중도 속에서 차이를 더 선명히 하기
반면 환동해권의 유목민들의 정체성은 타자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면서 형성되어 갔다. 나와 다른 타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른 타자가 있어야만 ‘나’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이들의 세계관을 지탱한다. 외부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나를 알 수 있으며, 타자 없는 순수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목민의 정체성은 고정과 배타의 논리가 아니라, 관계와 교류의 논리에 기반한다. 영토국가가 ‘나 이외의 것은 모두 배제한다’는 원리로 자신을 증명한다면 유목적 세계는 ‘나와 타자가 함께 있음으로써 내가 더 선명히 존재한다’는 관계의 윤리로 자신을 유지한다.
동시에 이들은 이 차이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도 거부했다. 환동해의 발해, 요, 금, 거란, 여진 등 북방 집단들이 형성한 네트워크를 보면, 단지 국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규모의 소사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주강현은 이러한 환동해를 ‘이주와 유목을 반복하는 민족들이 만들어낸 인종의 용광로’로 보며, 이곳에서 ‘단일 민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환동해권의 역사를 국민국가 중심의 틀로만 해석하는 시각은 ‘차이’에 기반한 이 지역들에 얽힌 다층적 관계망과 교류의 역동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환동해의 소수 민족들은 고정된 영토에 뿌리내리지 않고, 이동과 교류 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왔다. 이들에게 ‘민족’과 ‘집단’의 의미는 경계나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흐르는 관계의 연속성에 더 가깝다.
정체성이 땅이나 국경으로 고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처럼 유영하며 관계 속에서도 유지되는 성질의 무엇일 것이다. 환동해의 사람들은 그렇게, 고정되지 않은 경계와 끊임없는 이동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와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들의 정체성은 뿌리, 정착의 개념이 아니라 흐름의 감각, 즉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며, 그 속에서 차이를 확인하며 다시 이어지는 유동적 존재 방식이었다. 타자와의 ‘차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 선명히 하는 자에게 유목은 필수이다. 다른 여러 곳으로, 다른 여러 사람의 경우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의 수는 늘어난다.
환동해의 다양한 소수 유목민족들은 나와 다른 타자를 배제하거나 혹은 타자와 나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영토의 경계, 국가의 질서와 정체성을 세우려는 두 움직임에 모두 반대했다. 타자를 배제하지도 또 타자와 하나로 뒤섞이지도 않는 ‘중도’로, 이 양쪽 힘에 저항하면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이동의 과정 속에서, 양쪽 사이 오묘한 경계 위에서 각 부족만의 윤리를 만들어 독자적 정체성을 세우고 지속해왔다.
야쿠티아 러시아인, 경계 위 이중 정체성
야쿠티아 사례는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장면을 제공한다. 시베리아 북쪽, 혹한의 대지 위에서 형성된 야쿠티아에는 17세기 이후부터 대규모의 러시아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국경을 넓히기 위해 파견된 정착민이자 개척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였지만, 그 사이에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주강현은 이 장면을 통해 “그들 중 몇 명은 야쿠트인이 되려고 하기조차 했다”고 쓴다. 러시아인 정착민들은 야쿠트의 생활 양식과 신앙, 언어를 받아들이며 점차 혼혈화되거나 현지인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러시아의 노래를 기억했고, 러시아 정교를 신앙하며, 모국의 언어를 잊지 않았다. 이중의 감정, 즉 현지에 동화되려는 의지와 동시에 본국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공존한 듯 보인다.
이 이중의 정체성은 영토국가의 국민정체성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러시아 제국은 이들을 문명화라는 명목으로 타국에 보냈지만, 그들이 실제로 현지에서 겪은 것은 문명화가 아니라 낯선 곳에서 떠오르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였다. 야쿠티아의 러시아인들은 제국의 국민이자, 동시에 주변부의 타자가 되어갔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 관계는 야쿠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야쿠트 사회 내부에서는 러시아에 대항해 민족적 자각과 문화적 복원이 활발히 일어났다. 주강현이 말하듯, 20세기 초 야쿠트 민족운동은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러시아 제국의 동화 정책 아래에서 억눌렸던 언어, 신앙, 민속, 춤과 노래가 다시 되살아났고, 자신들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민족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의 요구를 넘어 존재 방식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야쿠트인들은 자신들의 땅과 하늘, 강과 바람 속에 깃든 신성한 관계망을 회복함으로써, 제국이 가져온 일방적 ‘문명’에 대한 대항의 윤리를 세웠다.
야쿠티아의 사례는 환동해를 통해 논의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그것은 유목적 정체성이 단순히 이동하거나 섞이는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미묘하게 조정되는, 복합적인 무엇임을 보여준다. 러시아인들이 현지화되면서도 노래와 신앙을 통해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듯, 야쿠트인들 또한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자신들의 영적 리듬과 세계관을 잃지 않았다.
이 두 집단의 만남은 폭력적이었으나, 동시에 서로의 경계를 통해 다시금 자신들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지키기 위한 시도였다. 이들을 보며 ‘액체의 역사’, 환동해의 ‘액체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야쿠티아의 러시아인은 제국의 국민이면서 동시에 경계인이 되었고, 야쿠트인은 피지배민이면서도 영토국가의 동화를 거부한 주체로 서 있었다. 그 사이의 흐름—이주, 교류, 모방, 동화, 저항—이 바로 환동해 문명의 본질인 열림, 관계, 이주와 유동, 액체성을 구현한다.
발해인, 땅을 잃고 세계를 얻은 사람들
거란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발해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라졌지만, ‘발해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경이 무너지고 정치적 주체가 해체된 뒤에도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흩어졌고, 때로는 타국의 지배를 받으며, 때로는 스스로 다른 나라의 땅을 찾아 이주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자신들을 완전히 타자화하지 않았다. 이주한 곳에서도 스스로를 발해인이라 불렀고, 그 이름으로 살아갔다.
영토국가의 국민정체성이 땅과 정치권력의 보호아래에서 구성된다면, 발해인의 정체성은 기억과 관계의 지속성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의 집단 자의식은 소유나 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온 기억, 공동체 윤리, 그리고 이동 속에서 유지되는 관계에 기반을 두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200여 년간 이어진 저항운동은 단순한 정체성의 재생 운동이었다. 이는 국토의 회복 문제가 ‘자신됨’을 지키는 행위였다. 즉, 발해의 후예들은 땅을 되찾기보다, 발해적 존재방식, ‘발해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해서 그들의 저항 운동은 언어와 신앙, 예술과 관습, 공동체의 감각을 지키는 싸움이기도 했다. 이러한 저항의 방식은 환동해가 보여주는 유목민적 감각, 액체성과 맞닿아 있다. 유목적 존재들에게 정체성이란 뿌리의 고정이 아니라, 변하는 흐름 속에서 관계를 다시 짜고, 공동의 기억을 이어가는 능력이다.
영토국가의 국민들은 땅의 경계, 그 내부의 소속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만, 발해의 사람들은 흩어짐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그들에게 ‘발해’란 특정 장소가 아니라 시간 속의 기억, 그리고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정체성이었다.
이런 점에서 발해인의 자의식은 영토국가의 자의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민국가의 자의식이 소유하고 배척하며 세운 경계의 감각에서 비롯된다면, 발해인의 자의식은 유동과 지속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자신을 땅 위에 새기지 않고, 흐르는 관계 사이에 새겼다. 그래서 국가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인의 200년 저항은, 땅을 잃은 자들이 어떻게 세계를 잃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역사다. 그것은 환동해 문명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준다. 발해인들은 영토를 넘어선 정체성, 즉 함께 숨 쉬고 함께 이동하며 기억을 공유하는 존재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를 이어갔다. 그들의 ‘발해됨’은 곧 환동해의 액체성을 보여준다. 땅이 아닌 관계로, 경계가 아닌 흐름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역사인 것이다.
브로델이 제시한 지중해 모델이 결과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와 영토국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환동해 문명사』를 통해 주강현이 말하는 환동해는 그에 대한 반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땅의 역사에 맞서는 ‘액체의 역사’를 제안하며, 역사의 주체를 영토국가나 국민성이 아닌, 관계를 기반으로 한 유목적 존재들에게 되돌려준다. 이 바다는 여전히 관계의 역사, 교류의 리듬, 그리고 장기 지속의 시간 속에서 살아 있다. 영토와 경계, 배타와 소유의 논리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반복될 때마다, 환동해 액체 역사는 그 반대편에서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그것은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윤리’, 그리고 유목적 정체성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