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환동해 문명사]에세이 – 보이지 않는 역사
시선을 놓치게 하는 것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세계는 오랫동안 서구를 중심으로 설명되어왔다. 아메리카는 구대륙에 사는 유럽인이 처음 발을 내딛었다는 이유로 ‘신대륙’이라 불렸고, 유럽에서 쓰던 유색인종 같은 말은 유럽을 보편으로, 타자를 주변으로 밀어냈다. 세계는 곧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시기로 이어졌다. 열강에 합류하려는 국가들의 경쟁 속에 곳곳에서 식민지화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는 국가의 경계를 세우고, 누군가는 그 안으로 편입되거나 바깥으로 밀려났다.
근대의 역사관은 영토국가에 기대어 세계를 정리해왔다. 우리는 영토에 국경선을 긋고, 행정 구역을 기준으로 세계를 정리하는 방식에 익숙해졌지만, 경계를 가로지르는 연결과 흐름은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환동해 문명사』의 주강현 선생님은 영토 중심의 사고가 세계를 빈틈없이 보이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잘 안보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실크로드를 이야기할 때, 유럽의 학자들이 정해놓은 대로 동서양을 이어준 간선도로라고 단순하게만 이해한다거나, 서구 문화가 동쪽으로 옮겨지며 사용된 도로라고만 보는 시선이 문제적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선은 그 공간을 오가는 상이한 문화들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장(場)이었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주강현 선생님은 우리에게 환동해적 관점으로 세계를 다시 보자고 권유한다. 우리는 세미나를 통해 환동해의 개념에 대해 영토국가의 반대이자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개념임을 상기해왔다. 더불어 나는 환동해를 떠올릴 때, 그곳이 어느 국가나 민족으로 묶을 수 없은 사람들의 무대였음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환동해 사람들을 글로 또는 말로 표현할 때 어느 국가(민족)에 귀속된 존재로 밖에 설명이 안되고, 적당한 용어를 찾지 못하는 한계를 느낀다.
환동해는 중국 쪽에서 바라본 동쪽 바다, 러시아 연해주의 바다, 오호츠크와 인접한 사할린과 홋카이도의 바다, 일본 북서부 바다, 그리고 다양한 북방 소수민족들이 바라본 바다 등을 포괄하는 바다다. 나에게 국가 중심이 아닌 해양 중심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지도에서 국가의 일부로 보였던 울릉도가 이번 책을 통해,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환동해 네트워크의 중요한 거점으로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환동해 전체는 무수한 연결의 망을 가진 역동적인 공간이고, 이곳은 영토를 기준으로 볼 때, 잘 보이지 않는 역사를 품고 있다.
사방으로 문이 열린 발해
발해(698~926)가 군함과 상선을 보유한 해양제국이었다니! 나는 발해를 생각할 때, 넓은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고구려의 대조영을 먼저 생각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놓친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해를 단지 반도 내의 왕국으로만 보는 시선으로는 발해를 이해하기 부족한 점이 있다. 발해의 주요 취락지는 작은 배로 항해하기 좋은 강가에 자리해 있었고, 아무르강, 동몽골, 자바이칼 지역으로 통하는 출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의 길은 사방으로 뻗어 다양한 교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신라로 가면 신라도, 거란으로 가면 거란도, 일본으로 가면 일본도가 그것이다. 발해는 일본과의 교역을 중요시했고, 당과 일본의 교류에서 양국의 사신단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두만강 하구를 비롯한 동해 출구는 일본과의 교류뿐 아니라, 오호츠크해 연안과 사할린, 연해주로 이어지는 해양 네트워크의 거점이었다. 그곳을 통해 모피, 말, 인삼, 비단 같은 상품이 오갔고 사신, 상인, 기술자들이 바다를 따라 움직였다. 발해가 바다를 중심으로 열려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익숙하게 그려왔던 발해를 다시 보게 했다. 주강현 선생님이 교류의 흔적으로 제시하는 식해의 길도 인상 깊다. 식해는 곡식과 생선을 함께 발효시킨 음식으로, 함경도와 연해주, 사할린, 홋카이도를 잇는 바닷가 사람들의 공통된 생활문화였다. 식해의 길은 그대로 환동해 네트워크의 지도를 만든다. 발해의 교역로에서 포착되는 이런 흔적들은 발해가 사라진 뒤에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는데, 자연에서 얻은 기술은 국가의 흥망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문명을 잇는 아이누
2023년 인문세 홋카이도 답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누에 대해 공부했다. 당시 그들의 신화, 역사에 대해 공부했음에도 지금껏 그들이 일본 변방의 민족이라는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받았던 뼈아픈 과거와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만 그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환동해 문명사』를 통해 그들이 홋카이도, 사할린, 오호츠크 연안을 누비며 물고기와 모피, 철과 비단을 중개했던 역동적인 해양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누는 계절풍과 해류를 읽고 육지과 섬을 잇는 항로를 알고 있었고, 국가의 경계가 굳어지기 전까지 문명을 이어주는 담지자로서 ‘문명의 매개자’ 역할을 해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이누는 그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계승하는 민족이었다. 기하학적 패턴을 지닌 그들의 의복은 놀랍도록 정교했고, 그것이 품은 전통적 의미와 기술은 말할 것도 없이 경이로웠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 이후 근대국가로 이행하면서 홋카이도를 접수하였고, 아이누는 국가에 편입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문명화의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점, 문자가 없다는 점, 수렵과 어로 생활을 한다는 점 등이 이유가 되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오호츠크해 전역에서 문명을 잇는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그들이, 국가가 들어서며 하루아침에 ‘미개’라는 낙인을 받게 되었다. 급격한 변화를 겪었을 아이누의 절망감, 막막함이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1899년 국가의 표준에 부합하는 국민으로 관리하기 위해 구토인보호법이 시행되었다. 보호라는 말에 가려진 동화, 억압 정책이었다. 개인이 소유하는 법이 없었던 아이누의 땅은 분배되었고, 그마저도 아이누에게는 경작이 어려운 척박한 땅을 배정했다. 국가는 일본식 이름과 일본어 교육, 정착 농업을 강제했다. 누구보다 활발하던 해양민족 아이누는 사라지고, 변방의 아이누로 각인되었다.
천혜의 만주, 만들어진 만주
나는 종종 드라마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만주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주어서 살기 좋은 곳, 자유로운 곳, 발전된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만주의 그런 모습은 제국에 의해 철저히 계획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20세기 초 만주는 한국, 중국, 일본 어디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않는 변방의 땅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칭기즈칸의 막냇동생 옷치긴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시기만 해도 만주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었다. 농경과 유목 모두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 조건으로 만주에서 흥한 세력은 대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흉노제국 이래 거란, 여진과 몽골제국 등이 한결같이 만주가 주는 혜택을 모태로 세계사에 걸출한 대제국으로 부상했다. 만주를 상실하는 것은 약소국으로 전락한다는 법칙이 있을만큼 제국을 꿈꾸는 세력에게는 핵심적인 무대였다.
근대 일본 제국은 만주를 문명화라는 명분 아래 장악하고자 했다. 그들은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구호를 내세워 일본, 만주, 조선, 몽골, 중국이 협력하는 이상 세계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제국 중심의 식민 질서를 세우자는 이념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만주국(1932)은 다섯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닌, 통치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만주라는 이름은 서구와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심을 위해 만들어낸 근대적 창조물”(『환동해 문명사』, 307쪽)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 이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1906)를 세워 본격적인 식민 개발에 착수했다. 철도는 제국의 혈관이 되어, 자원과 군대를 실어 나르는 식민의 도로 역할을 했다. 철로를 따라 광산이 개발되었고, 하얼빈과 다롄 같은 도시는 국제 자본과 제국의 욕망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었다. 거대한 욕망을 실어 나르던 제국의 길이 1945년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막을 내리자, 만주국은 더이상 존재할 이유를 잃고 사라져버린다.
『환동해 문명사』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장(場)에 오고 간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그곳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중심이 없고 사방으로 오고 가는 동력을 포착하면 할수록, 비로소 그곳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역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