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마네의 손
수요 종교인류학 『마네』 20251021 김유리
마네의 손
“그는 격정에 휩싸여 빈 캔버스로 달려들어서는, 어수선하게, 마치 그 전에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곤 했다. 그 격정은 아무리 열에 들떠 캔버스 위에 손을 놀리며 찾아 헤매도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것이었다.(조르주 바타유,「마네」, 222)”
“마네는 울부짖지도 않았고, 자아를 부풀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진정한 무기력 속에서 찾아 헤맸다. 누구도 무엇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이 탐색 속에서, 오직 비개성적인 고통만이 그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234)”
마네는 현대 회화를 열었다. 그는 앞선 세대의 화가들과 구분된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맞닿는 회화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자기 시대와는 어울리지 못하고 분노와 비웃음을 샀다. 마네의 회화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켰다. 조르주 바타유는 이 변화를 전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전복은 정치사에 기록된 변화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정치 체제처럼 예술 사조가 새 것으로 대체되는 것과는 다른 변화였다. 마네가 연 새로움은 그의 그림이 회화에 대한 관념에서 분리되는 데 성공함으로써 텅 빈 구멍이 나타난 사건이다.
예술은 주권적 존재의 존엄을 표현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교회와 왕궁을 장식한 그림, 조각, 시는 신과 왕을 표현하는 규약들에 구속받았다. 이때의 예술가들은 장인이었다. 더 이상 주인을 섬기지 않는 장인-예술가들이 위엄을 찾을 곳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 같다. 고전주의와 결별한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강인하고 자유로운 자기 내면을 표현하며 시대를 도발했다.
마네는 낭만주의자가 되기에는 소심했다. 의심하고 긴장하고 불안하고 인정을 구하고 주저했고 상상력이 없었다. 그는 자기만의 개성적 이미지를 발견해내려고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방향을 설정할 수 없어 미친 듯이 돌아가는 나침반의 자침처럼 차례로 등장하는 무질서와 다양성들 속으로 손을 내젖고 있었다. 그는 자존감과 확신에 찬 선택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형식들의 세상에 침투함으로써만(234)” 자극을 받았다.
새로운 형태들의 세상은 전복과 부정을 통해서 들어간다. 이때의 전복적인 변화는, “한 마디로 정의 가능한 어떤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의 이행(266)”이 아니다. 예술이 “지고의 가치”를 지니는 어떤 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예술 일반(266)”에서만 일어나는 변화들이다. 예술가는 “모든 기획과 모든 주어진 체계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의 개인주의에서부터도) 분리”된, “개별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다(267). 이 영역은 “어둠”이고, 예술가의 손이 “섬광을 열망”하며 캔버스 위를 헤매는 곳이다.
바타유는 마네의 이미지를 그의 손의 본질적 움직임으로 환원한다. 마네의 손은 붓을 쥔 존재의 내밀함을 폭로한다. 그 손은 주제와 관습적 감정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서, 연약하고 의심하고 변덕스러운 감정들을 화폭에 계속 나타나게 한다(303). 마네의 손의 움직임은 “가벼운 떨림”으로 묘사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희인 것 같다. 유희란 그 자체가 아닌 무엇에도 지배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유희하는 움직임 속에서 붓 끝의 “선이 해방(309)”된다.
현대 회화는 “의미의 고착에 본질적으로 대립(309)”하면서 시작한다. 현대 회화가 회화 그 자체가 아닌 것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지면서 지금껏 포착하기 힘든 것을 표현할 가능성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현대인의 내면에 텅 빈 공간이 열리고 실리와 자아에 지배받을 위기에 처했다. 예술은 그 어둠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유희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현대의 주권의 자리는 인간의 내면인 것 같고, 예술은 내면을 형태로 표현하는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