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메모
종교인류학 4학기/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2025.10.14 박서영
Memo
20세기에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나에게 ‘노동’이란 단어는 자연스레 맑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본주의–노동의 소외–계급투쟁–인간해방. 노동과 함께 도식화되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맑스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신성한 노동이 분업화로 인해 노동과정에서 인간을 소외시켰다. 노동소외, 인간소외로 인해 노동의 신성함도 함께 소멸되었고, 그 신성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노동해방이요 인간해방이라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맑스 경제학 이론의 주요 골자다.
맑스가 사회사상가로서 현실사회 문제의 해결하기 위해 노동을 이야기했다면 바타유는 인류학적으로 노동을 고찰한다. 맑스가 살았던 20세기에서 수십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간이 영적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속박된 것이 노동으로 인해 인간다움을 형성하면서부터(호모 파베르)라고 말한다. 다시 영적 세계에 가 닿기를 소망하게 된 인간이 초자연성을 간직하고 있는 동물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욕구가 기적처럼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라스코의 동굴벽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저절로 온 것은 아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웃을 수 있게 되고(호모 사피엔스) 놀이를 할 수 있게 되면서(호모 루덴스) 금기시 되었던 것들을(성과 죽음) 위반할 수 있는 장(축제, 희생제의)을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 예술의 통로를 찾아냈다고 한다. 라스코 벽화에서현대인이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 것은 당시의 라스코인들의 소망과 욕구가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공감을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욕구가 무엇일까? 몇 만 년 전의 인간들이 지녔었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그 욕구, 소망 말이다. 물질세계의 재편으로 인간해방을 주장했던 맑스의 시대가 끝난지 오래다. 맑스가 지녔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동력으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로써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물질세계의 재편만으로는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욕구에 가닿을 수 없다.
책에서 바타유의 주권성 개념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종속되지 않은 상태, 자기 자신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p42). 예술 등 내적 경험(소통)을 통해 주권성에 닿을 수 있는 이유는 놀이야말로 자신 외에는 다른 어떤 목적의 지배로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p68).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에서는 바타유의 사상을 “온갖 사고가 단절되는 비지非知(바타유가 즐겨 사용한 용어로 원어는 non-savoir. 일체의 감각이나 언어, 지식이 상실된 무無의 상태를 말하는데, 바타유는 이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실체화하였다.p47)의 작용을 현생 인류의 마음의 본질로 발견”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바타유가 제시한 주권성과 비지의 개념을 우리가 공부했던 신비주의 종교에서의 엑스터시, 불교의 무아 개념과 연결하여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다움’을 확립하면서 라스코인들이 잃어갔던 것들과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문명으로 인해 현대인들이 다시 잃어가는 것들을 대비해 보면서, 4만여 년 전에 살았던 라스코인들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함께 공감하는 인간의 소망과 욕구에 대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