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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인류학


[제주기행 2] 제주와 말 그리고 몽골

작성자
오켜니
작성일
2025-11-03 13:19
조회
20

해양인류학/제주기행2/25.11.3/오켜니

 

제주와 말 그리고 몽골

 

육지인의 눈에 띈 제주의 가장 이색적인 풍경은 넓은 초원에 말과 소가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주도에 가면 흔하게(!) 말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탐라순력도<교래대렵>그림(주강현, 제주기행, , p248)은 진상을 위해 날짐승과 산짐승을 사냥하는 풍경이다. 얼핏 보면 전쟁터와 다름이 없다. 마군 200, 몰이꾼 400, 포수 120명이 동원되어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22수를 잡았다고 한다. 제주의 동물 자원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이다. 풍부한 자연을 바탕으로 제주인이 먹고 살았지만 풍부한 자연 때문에 수탈의 가혹한 억압 아래에 놓인다. 제주의 다채로운 초목과 이라는 갇힌 환경은 유라시아까지 정벌에 나섰던 유목민족 몽골을 제주로 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주민들은 몽골인들에게 목축을 배웠다. 제주의 환경이 불러온 몽고와 제주의 인연이 흥미로왔다.

송아지·망아지가 등장하는 삼성신화는 제주도에 수렵의 시대 이후에 목축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온난한 기후와 광활한 초원, 맹수가 없는 섬이라는 점에서 제주는 우마 번식의 최적지였다. 제주도에는 산을 오르내리는 목동들이 있었다. 이 목동들을 테우리라고 부르는데 풀이 자라고 시드는 속도에 따라서 마소와 함께 봄에는 산을 오르고 가을에는 산에서 내려온다. 제주도에서 칠월 백중(음력 715)에 마불림제를 지내는데 일종의 우마 증식제의다. 백중날에는 테우리들과 마소를 키우는 일반 농가와 관에서는 우마의 무병과 번식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제주도의 목축문화는 말총과 정동벌립이라는 두 개의 뛰어난 공예품을 남겼다. 말총 공예는 말의 갈기와 꼬리털인 말총으로 총모자와 망건, 탕건 등을 만드는 것이고 정동벌립은 댕댕이덩굴(정동줄)로 만든 차양이 있는 모자인데 방수성이 좋아서 테우리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제주도에서 본격적인 목축은 몽골 지배기에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몽골제국 입장에서는 제주도는 맹수가 없는 초원이고 가축이 도망치지 못하는 격리된 섬으로 최적의 목장터였다. 탐라는 몽골 이전까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고려와 종주의 관계였다. 몽골은 삼별초 평정 이후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백여 년간 제주는 몽골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몽골은 삼별초군 토벌을 계기로 빼앗은 탐라를 외형상으로는 충렬왕 20(1294)에 고려에 돌려주었으나 여전히 제주도에서 목축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관리를 파견했다. 몽골에서 제주까지는 뱃길로 불과 7일 거리였으므로 관리하기도 용이했다.

유목민인 몽골에게 목축권이야말로 최대의 권력이자 군사적 힘이었다. 원 제국에서 파견된 목축 전문가 목호는 풍부한 양마 기술로 순종의 몽골말을 길러내어 군용 혹은 교통용으로 자신의 나라에 제공했다. 현대의 기업들이 상대에게 기술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원 제국도 말의 목축에 제주인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막았다. 목호들은 말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으며 심지어 말의 걸음걸이나 식사까지도 조절하면서 다루었다.

목호들는 제주도에 아예 눌러앉아 제주 여인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면서 대를 이어 말을 키웠다. 1360년대에 원이 쇠망했음에도 제주의 몽골병은 잔류하여 토착화되었다. 목호들은 최영 장군의 목호 정벌(1374)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제주 사회의 유력집단이자 부유층이었다. 원이 물러난 뒤에 제주도의 말은 왜소해지기 시작했다. 몽골인은 목축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두었는데 특히 말 관련 용어에 몽골어 잔재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 재래마는 제주도 조랑말을 뜻한다. 몽골인이 목장을 경영하면서 몽골말의 순혈주의를 고집하다가 그들이 제주에서 나간 뒤에 교잡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만들어진 품종이다. 조랑말은 본디 체구가 작은 말을 가르키는 말로 고서에는 과하마 또는 토마로 기록되어 있다. 과하마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목자는 양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천역으로 간주되었으며 한번 맡겨지면 숙명처럼 벗어날 수 없는 고역이었다. 조선의 중앙정부에서는 마소의 효과적 관리를 위해 마소의 호적인 우마적을 작성했는데 말이 병들거나 죽으면 그에 대한 비용을 목자에게 청구했다. 이와 같은 행정은 목자들에게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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