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화산섬 에니미즘 4주차
인문세/화산섬 제주 애니미즘 세미나/『제주신화와 해양문화』/박정복/2025 11 02
오늘이처럼 오늘을 살아라
주인공이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여정이 특별하다. 누구든 최종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만 알고 있다. 단박에 목적지를 알고 떠나는 것이면 좋겠는데 그런 일이 쉽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다음 목적지를 알려줄 수는 있지만 최종 목적지는 그들도 모른다. 한 단계 한 단계 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알려준다. (『제주신화와 해양문화』176쪽)
신화 혹은 민담의 주인공의 인생은 출발부터 가혹하다. 부모가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부모가 내쫒지 않으면 부모의 실수로 악마가 와서 잡아가기도 하고 까마귀가 채 가기도 하고 심지어 하늘의 천사가 갓난아기를 데려가버리기도 한다. 부모가 있어봐야 별 볼일 없다. 그래도 부모가 없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적어도 자신의 근본 내력은 알고 있으니 그것을 모르는 혼돈은 면한 셈이니까.
땅에서 솟아났을 뿐 부모가 없는 아이는 이 혼돈을 어찌해야 할까? 신화는 극단적인 불행을 설정한다. 세상은 보통 이런 아이를 근본이 없다며 비웃거나 애정없는 동정과 연민으로 대하곤 한다. 그러나 ⟨원천강본풀이⟩의 ‘오늘이’는 부모가 원천강(공간)에 있다는 걸 백씨부이으로부터 듣고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선다.
길은 관계의 장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 식물과도 만난다. 그 길에서 겪는 굽이굽이가 흥미진진하고 가슴을 울린다. 길을 나서보니 나만 힘든게 아니다. 장상이(영원,남자), 연꽃(식물), 이무기(동물), 매일이(순간,여자) 모두 자신의 문제를 안고 있다. 천상계의 선녀 조차도 바가지의 뚫린 구멍을 막지 못하여 물을 퍼내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는 풀지 못하여 오늘이에게 해결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오늘이가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 지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 남의 일은 알지만 자신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걸까? 장상이는 연꽃을 찾아가라 하고 연꽃은 이무기를, 이무기는 매일이를, 매일이는 선녀에게 가라고 알려주어 한 단계 한 단계 원천강을 향하여 간다.
그들도 다음 단계만 알 뿐 원천강까지 어떤 경로를 거쳐야할지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무능해서일까? 아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당장 할 일을 확실히 알 뿐이고 길어봐야 1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도 어떤 변수로 어떤 변동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이 세상 수많은 일들이 연결되어 새로운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최종 목적지 원천강을 정했다하더라도 한 단계씩 지금 당장 오늘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미래를 미리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의 것으로 남을 도울 수는 있다. 이것이 현재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이가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했기에 그들도 나중에 오늘이의 도움으로 한 단계씩 나아가게 된다. 그들도 결국 오늘이와 다르지 않다. 복을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이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나 아닌 다른 이의 도움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러나 장상이나, 매일이, 연꽃, 대사처럼 도움의 주체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또 오늘이처럼 자신의 고난에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떠나는 일도 쉽지 않다. 오늘이처럼 용기있게 삶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남을 도와야 최종적으로 원천강에서 지혜를 얻어 도움받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신으로 좌정할 수 있다. 지혜와 자비를 설파하는 종교들은 이러한 신화들이 계속 구비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을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가 불려지지 않고 있다니 애석하다. 이 굽이굽이 찾아가는 과정이 하이라이트였을텐데. 하지만 민담, 그림동화같은 유럽민담에도 보인다. 거기서는 주인공이 도착한 목적지는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가 사는 동굴이다. 악마의 어머니가 아들의 이를 잡아주겠다고 속여 무릎에 잠들게 한 뒤 악마로부터 주인공을 도와준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잠결에 말하게 하여 알아낸다는 스토리다. 이야기만으로는 유럽민담이 재미있지만 원천강본풀이는 매우 애절하다. 심방이 영게울림으로 얼마나 관중들을 울렸을지 눈에 선하다. 그러면서도 굿거리이니만치 신명이 넘치기도 하니 제주굿의 매력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