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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인류학

 

유용성의 세계와 내밀성의 세계의 사이

작성자
이성근
작성일
2025-11-04 16:22
조회
16

수요인문공간세종 대중지성/4학기 「종교이론」씨앗문장/ 2025.10.29.(수) / 이성근 

 

지속의 불가능성이 가져다 주는 새로운 자유 

 

  어떤 사상이든 사상은 기왕의 학문적 수준을 능가하고 기존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실 답변이란 지적 수준이 있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답변할 수 있다. ···중략··· 불가피한 미완성 위에 근본적인 미완의 사상을 하나 더 보태는 일이다. 우리는 철저히 거기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중략··· 철학이란 어휘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라는 심각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 어떻게 유용성에서의 종속적 성찰을 벗어나, 본질을 망각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의식으로 미끄러져 갈 것인가? ( 20~21p ) 

 

  연속성의 테두리 안에서 보면 모든 것은 정신적이며, 정신과 육체는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화적인 정령들 세계의 입장과 그 세계가 획득하는 절대적 가치는 자연스럽게 육체와 정신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게 한다. 정신/육체의 차이와 연속성(내재성)/대상의 차이가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다. 일차적 내재성 안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제작된 도구로서의 지위 이외의 다른 차이가 없다. ( 47~48p ) 

 

  ☞ “모든 것은 정신적이다”는 뜻은 결국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와 통한다. 가령 나의 몸은 그저 한 개인가? 라고 물을 때, 내 몸이 3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세포는 세포막, 세포질, 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포질에는 칼륨, 마그네슘 등등 다량의 원소가 들어가 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우리의 호흡과 섭취와 배설을 통해 끝없이 세상과 소통한다. 눈에 안 보이는 원소는 정신인가, 물질인가? 하물며 끝없이 떠오르는 생각은? 이러한 생각을 통해서 계획이 세워지고, 손을 움직여 물질로 탄생한다. 연속성(내재성)과 대상의 차이는 그저 인간의 보이는 눈에 이름을 붙여졌는지 여부가 아닐까. 예를 들어 사과라는 대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고정된 사과가 아니다. 열매가 피어서 떨어지고, 결국 썩는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열매가 피기 바로 직전은 ‘사과’인가? 아닌가? 그것을 우리는 모두 명명할 수 없다.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이고,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슬픔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생각은 참으로 순박한 생각이다. ···중략··· 눈물은 고통이기는커녕 삶의 내밀성에서 포착되는 삶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의 표현이다. 사실 의식이 가장 날카로워지는 순간은 죽음에 의한 것이든 또한 단순한 이별에 의한 것이든 존재에 대한 부재가 올 때이다. 그리고 그 경우 위로(신화의 “위로”라는 단어가 말하는 바른 의미에서 위로)란 어떤 의미에서 지속의 사라짐을 통렬하게 의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중략···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오히려 지속의 불가능성이다) 좀 비틀어보자면, 눈물은 오히려 예상치 않는 승리, 장래를 염려할 필요가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울고 싶게 만드는 뜻밖에 얻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 58~59p )  

 

  ☞ 내밀성이란 무슨 말인가. 내밀(內密)을 한자 원뜻대로 풀이하면, “안으로 모인다”는 뜻이다. 가을의 과일은 생물에게 자신의 과육을 희생한다. 씹어 먹히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래도 내년에 더 나은 열매를 맺으려면, 먹혀서 사람과 동물의 똥으로 자기 씨앗이 새로운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냉혹한 서리를 얻어맞으면서 고도로 응축되어야 한다. 이처럼 내밀성은 불필요한 것은 다 걷어내고, 더욱더 쪼그라들며 핵심만 남긴다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한 줄을 쓰기 위해, 그 모든 잡스러운 언어를 쳐내는 과정일까. 그렇게 비워야 봄에 새로운 기쁨의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식물들은 동물과 인간들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알았다. 수십억 년을 순환하며 지금까지도 생명 활동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할까? 기쁨으로 생각할까? 그저 당연한 순환의 과정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히려 지속의 불가능성이다”는 구절에서 참으로 난 사이다를 마시는 듯한 청량감을 느꼈다. 불교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집착이라고 한다. 집착의 지속을 끊어낼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로 향한다. 가령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눈물을 쏟으며 혼절하기도 한다. 조금만 살펴보면,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받았던, 어떤 물질적, 정신적 만족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근데 이것을 하나의 ‘긍정적 신호’로 해석하면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으라는 신의 계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우리는 눈물과 함께 가장 날카로운 의식이 깨어난다! 이것은 새로운 환경에 맞설 수 있는 우리의 생명력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눈물 속에 배고픔이 찾아오고. 빵을 덥석 뜯어 먹는다. 나도 그랬다. 때는 22년 전 해병대의 마지막 고비라 불리는 “병장 신고”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때 내부에서 이어져 오는 전통은 똥오줌을 먹이는 것이었다. 정말 죽도록 먹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안 먹으면 다시 끔찍한 이병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회적 어른 대우를 못 받는다. 결국 먹고 3번에 걸쳐 토하며 위장을 비워냈다. 그때는 왜 이 짓거리가 필요한지 의문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고대의 성년식이었다. 험난한 사회생활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 그리고 나아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해병대 신조를 재해석해보게 되었다. 잡초를 먹어도 살 수 있으니, 먹고사니즘에 덜 집착하고 정신적인 초월적 자유에 에너지를 쓰는 방향으로 나아가보자.  

 

   내밀의 초월성은 내밀성ㅡ주어진 내밀성ㅡ의 완전한 부정에서 얻어지는데, 그 역설 안에는 극단의 매력이 있다. 주어진 내밀성이란 오직 내밀성에 대립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밀성은 사물을 벗어나는 특성을 가지며 사물에 주어지는 순간 이미 내밀성을 벗어난다. 따라서 잃어버린 내밀성은 사물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때 회복되 수 있다.   ···중략··· 초월의 폭력의 근본적인 의도는, 거의 운명적으로, 고대 세계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질서를 제거하되 보존한다. 폭력은 사물의 질서를 제거하되, 사물의 질서를 우선 확립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중략··· 제사, 위험한 폭력의 절대성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제사는 내밀성에 대한 향수를 각성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 고뇌를 유지시켜주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를 그 상태에 이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폭력뿐이다. 그러나 충동적 순간에는 초월성이 아주 대단한 폭력적 폭발을 일으키고 거기에서 오는 폭력은 인간을 가능성에 눈뜨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ㅡ왜냐하면 그렇게 전적인 폭력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ㅡ 이원론에 머무는 한 그 가능성은 다시 졸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 극과 극은 통한다. 더위가 극단에 치다르면, 추위가 찾아오고, 추위가 극단에 이르면 더위가 찾아온다. 쾌락과 고통과의 관계도 비슷하다. 감각적 쾌락이 극단에 치다르면,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너무나 맛있어서 눈물이 날 정도의 음식도 한없이 먹다보면, 속이 고통스럽고 음식을 게워낸다. 섹스또한 그렇다. 절정의 순간에 도달하면, 한없는 허무와 피곤함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중요한 것은 극단에 이를 때는 감정적 고통이나 신체적 아픔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극단에 이르러 추위가 더위로, 기쁨이 고통으로 바뀌기에 반드시 충격을 겪는 것이다. 제사는 그런 충격을 인위적으로 가함으로써, 기존 사물(법, 규칙, 생활양식)를 제거하다. 근데 왜 한가지만 제거할까? 아마도 다 제거하면 기존의 질서가 180도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사물의 질서를 우위에 두고, 다른 사물의 질서를 제거하다. 그 때 인간은 내밀의 초월성에 눈을 잠깐 뜬다. 해질녘, 각성제를 먹고, 집단적으로 혼음난무와 피를 부르는 희생제의를 떠올려보자. 그 때, 우리는 기존의 답답한 규칙을 깨고 싶은 폭력성이 도출된다. 그러나 그런 제사와 축제가 막을 다하면, 다시 사물의 노예가 된다. 잠깐 각성되었던 것이 언제그랬냐듯이 현실의 유용성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과 속, 이원론으로 철저히 분리된 뭔가 알수없이 답답한 세계로 기계와 같이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하는가. 유용성의 세계와 내밀성의 세계의 사이에서 무대밖 감독처럼 깨어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유연하고 탄력적인 마음으로 성과속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을 때 새로운 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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