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인간다움의 회복 – 해방으로 가는 길 (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을 읽고)
라스코인들은 왜 동물을 그렸을까? – 성스러움의 표상
프랑스 남서쪽 몽티냐크 마을 근처 베제르 계곡에 위치한 라스코 동굴에 들어서면 들소그림을 비롯하여 각종 동물들 그림이 즐비해 있다고 한다. 육중한 소 과(科) 동물들을 비롯하여 죽음을 기다리듯 무릎을 구부린 채 웅크리고 있는 초식 동물들, 곰, 말, 그리고 유니콘을 닮은 듯 상상의 동물로 추정되는 일각수 등이 그것들이다. 동굴 입구에서 시작해 큰 방, 중앙 샛길, 통로까지 계속 이어지는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신비함과 경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이 그림들은 선사학적으로는 후기 구석기시대(혹은 순록시대), 인류학적으로는 호모 사피엔스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인들이 동굴에 동물그림을 그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 특히 라스코 벽화에 대해서 가장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 중에서 바타유는 인간이 성스러움을 인식하게 된 출발점으로 라스코 벽화를 이해한다. 바타유의 이해대로라면 라스코인들은 왜 하필 동물에게서 성스러움을 보게 되었을까?
생존을 위해서 매일 사냥을 나가야 했던 고대인들은 일상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먹고 먹히는 존재로 수없이 동물과 마주하였다. 노동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던 인간은 자신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서 동물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들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속죄의식이 생겼다(『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조르주 바타유, 워크룸프레스, 2022, p127-128). 그리고 “노동에 내포된 논리에 순응하면서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불안감이나 답답함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서(같은 책, 128) 속죄의식을 덜어내려 했다. 그리고 현존하는 인간세상의 질서로부터 초월하는 어떤 힘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다시 “마법 같은 짐승성의 세계”(같은 책, p129)로 돌아가야 했다. 동물성을 부정했던 인간이 다시 인간성을 부정하게 된 것은 그들이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비(非)인간 존재들 중 고대인들의 눈에 가장 많이 비친 것이 동물이었다. 동물이 지녔던 생명력 또한 인간을 압도하였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힘과 스피드, 민첩함 등의 신체적 능력과 감각기관의 예민함 등에서 인간은 동물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동물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동물에게서 성스러움을 찾고자 했기에 고대인들은 벽화에서 인간성을 제거해 버렸다. 인간성을 제거함으로써 동물이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성스러움을 자신도 지니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동굴에서 가장 놀라운 곳 중 하나인 우물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동물은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묘사했지만 인간의 모습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대충 윤곽만 그려 놓았다(같은 책, p195, 그림). 인간을 묘사하는데 소홀했고 서로의 얼굴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고대인들은 동물의 탈 뒤에 숨음으로써 최대한 인간의 형체를 숨기려 했다. 바타유는 이를 ‘혼종인간’이라 명했다.

위의 책 p195, 배가 갈린 들소(길이 1.1미터), 뻗어 있는 남자와 새를 얹은 장대, 우물, 52-2번
성과 속을 넘나드는 존재 – 인간다움의 완성
그렇다면 고대인들이 인간성을 부정하기만 했을까? 그들은 그들 스스로 부정했던 인간다움을 어떻게 다시 회복하였을까?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직립보행, 도구와 불의 사용, 언어의 사용, 종교(사후세계에 대한 인식) 등을 들 수 있다. 바타유는 이러한 기능적인 면을 넘어 ‘성(聖)과 속(俗)의 구분과 연결’이란 면에서 인간다움을 고찰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점차 죽음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들도 도구를 사용했지만 그들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데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와 달리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과정에서 도구는 계속해서 남아있는데 도구를 만든 장본인은 소멸해 버리는 경험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네안데르탈인들에게도 장례풍습은 있었지만 그들은 시체에서 머리를 떼어내 파묻음으로써 머리가 묻힌 사람이 영속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는 도구를 통해 지속하는 것(노동에 종속되는 삶, 세속적이고 제한 없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노동에 종속되지 않는 삶)에 대해 분류하기 시작했다. 시간성에서 끝을 인식하면서 알 수 없는 삶의 끝을(사후세계) 두려움과 존경심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삶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점차 속(俗)의 세계에서 성(聖)의 세계를 분리해 나간다.
접근이 차단된 성(聖)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에겐 운(기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불가해한 성(聖)의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따라서 인간은 지(知)가 아닌 감각을 통해 그것을 느끼고자 했다. 인간은 그 세계 내부에 자신의 실존과 유사한 어떤 존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고, 노동을 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같은 책 p142) 이 세계에서는 신성이, 욕망의 무질서가, 운(기적)이, 그리고 목적이 세속이나 이성의 계산, 수단보다 우위에 놓였다. 따라서 노동과 기술을 가진 인간은 수단에 불과했다. 반면에 동물적 존재는 목적이 되었다(같은 책, p143).
라스코 벽화는 동물이 지녔다고 생각한 성스러움을 인간이 인정한 순간을 표현한 것이었다.(같은 책, p144) 속(俗)을 떠나 성스러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여전히 일상은 인간성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라스코인들은 인간성으로 유지되는 속(俗)의 세계에서 벽화를 그리는 동안 동물성으로 구현되는 성(聖)의 세계로 들어가곤 했다. 이처럼 성(聖)과 속(俗)을 넘나들면서 성스러움을 간직한 채 속(俗)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바타유는 ‘인간다움’이라 하였다. 라스코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갖춘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책, p177, 큰 방 혹은 황소의 방 전경
금기와 위반 – 놀이, 축제, 예술
라스코인들이 벽화를 그릴 때만 성(聖)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인식한 성(聖)의 세계는 죽음과 탄생의 영역이었다. 특히 죽음에서 공포와 존경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꼈기에, 그들은 시체에 대한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공포심으로 인해 격리되어 보존된 대상들을(시체들) 신성하게 여겨졌다. 불가해한 신성의 영역들이 침범당하지 않도록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라스코인들은 사회적 ‘금기’ 사항들을 마련하였고, 그것들을 제도화 하였다. 성(聖)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마련되었던 ‘금기’는 노동세계라는 속(俗)의 세계를 유지시키는 기능도 함께 하였기에 금기가 없이는 인간다운 삶도 있을 수 없었다. 즉 ‘금기’는 바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근본 조건이 되었다
라스코인들이 금기를 ‘위반’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노동의 세계와 분리되는 놀이의 세계에서였다. 예술이란 어떤 감각적인 현실의 창조를 통해 기적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에 화답하기도 하는 행위(같은 책, p64)라는 점에서 볼 때, 놀이 속에서 인류의 새로운 창조행위가 가능하였다. 바타유는 주권성 개념을(같은 책, p42, 종속되지 않은 상태, 자기 자신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제시하면서 “놀이하는 순간은 자신 외에는 어떤 목적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같은 책, p68) 는 의미에서 놀이가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하였다. 놀이를 통해 금기시 되었던 것들에 대한 긴장이 완화되면서 그것들을 위반할 수 있는 장(축제)이 만들어졌다. 라스코인들은 놀이로써 노동을 초월하면서 축제를 통해 삶에서 불안과 공포를 걷어내고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종교적 위반이 축제와 결합한 순간인 희생제의에서 세속적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다. 기적을 바라는 욕망으로 이러한 종교적 위반을 표현한 것이 예술이었고, 바로 라스코인들이 그렸던 동굴벽화였다. ‘금기’를 ‘위반’하는 놀이, 축제, 예술이라는 ‘해방’의 통로를 통해 속을 초월했던 그들은 축제가 끝나면 다시 속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획득할 수 있었던 장치들이었다.
해방의 통로를 찾아서
라스코 벽화 앞에 서면 현대인들도 여전히 고대인들처럼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의 라스코인들의 소망과 욕구에 우리들이 여전히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신성한 영역에 가 닿고자 하는 소망, 현재의 삶 속에서 신성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신념, 그러한 신념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제도화했던 각종 의례들을 통하여 해방의 통로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어쩌면 지금도 우리들 내면에서 여전히 갈구하고 있는 것들이다. 라스코인들이 발명했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또는 우리는 우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해방구를 찾았을까.
지금은 놀이와 축제의 장이 차고 넘치지만 우리는 단지 그것들을 맘껏 즐기며 향유할 뿐이다. 예술가는 뭔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일부 사람이라고 인식하기에 예술을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이 자유를 느끼고 성스러움을 느끼면서 속(俗)에서 초월하고 성(聖)과 소통했던 일상의 장들을 우리는 어떻게 회복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까.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을 읽으면서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수 있기를 살며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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