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환동해 문명사] 에세이(3) ‘환동해’라는 액체 사람들
‘환동해’라는 액체 사람들
섞이고 교류하는 바다, 환동해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그의 저서 『지중해: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에서 지중해를 ‘길의 역사’로 비유하며 지중해를 단순히 영토나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물자·사상·기술이 끊임없이 오가는 ‘흐름의 공간’, 즉 즉 ‘길들의 네트워크’ 으로 인식하고자 시도했다.
『환동해 문명사』에서 주강현 선생님은 환동해 역시 ‘동해’나 ‘일본해’처럼 특정 국가 중심의 명명에서 벗어나, 이 바다를 서로 섞이고 교류하는 인간과 문명의 공간으로 재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영토의 논리를 넘어선 ‘액체의 역사’, 즉 흐름과 교류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지중해와 환동해는 열려 있는 정도와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중해는 내해로서 입구가 좁고, 해협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외부와 연결된다. 그 개방은 언제나 육지를 경유해야 하는, 닫힌 구조 속의 개방이다. 반면 환동해는 북쪽으로 완전히 열려 있으며, 그 자체로 흐름과 이동의 장이 된다. 환동해를 길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북방으로 향하는 길이자 남방으로 향하는 길이며 서로 다른 문화와 사람, 언어와 신앙이 오가며 뒤섞이는 소통의 길이다. 서해가 중국 대륙과 직접 접속된 ‘정해진 길’이라면 동해는 여전히 탐험되고 있는 ‘흐르는 길’이다. 이러한 ‘열려서 흐르는 운동성’이야말로 환동해 세계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시각은 환동해를 단순한 지정학적 공간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이 지역을 살아온 사람들의 정체성이 무엇이었는지 탐구하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바다 길이 열리고 흐른다는 것은 곧 사람과 문화가 끊임없이 섞이고 교류한다는 뜻이다. 환동해의 역사에서 ‘정체성’은 고정된 중심이나 단일한 혈통이 아니라, 서로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조정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적 성질로 드러난다. 환동해의 역사는 관계의 역사이자 액체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흘러 섞이는 액체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단일 중심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중심이 아닌 교류의 리듬, 정복이 아닌 공존의 감각이 액체 역사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간은 이 바다와 맺고 있던 연결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근대의 영토국가적 질서 속에서 환동해는 경계와 소유의 논리로 재편되었고, 그 속에서 관계적 감수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주강현 선생님은 이 연결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발해를 비롯한 고대의 유목적 세계관은 여전히 이 바다의 심층에 흐르고 있으며, 서로 교류하고 관계 맺는 감각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은밀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환동해의 역사를 다시 살피는 일은 곧, 이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정체성의 형성과 지속의 방식을 탐구하는 일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정체성이란 선명한 경계선 안에 포획된 무엇이 아니라, 서로의 만남과 교류 속에서 부단히 새로워지는 무엇이었다. 환동해는 그렇게 지금도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 바다를 통해, 정체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되는가, 그 유동적 본질, 그 특징을 다시 사유하게 된다.
러시아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오늘날 우리가 환동해를 열린 바다, 관계의 바다로 느끼지 못하게 된 데에는 러시아의 동진(東進)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러시아의 동진은 유라시아 문명사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사건 중 하나이자, 근대 이후 유라시아에서 ‘영토국가’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러시아가 왜 동쪽으로 갔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곧, 근대적 국가가 어떻게 자신을 확장하고 정당화해왔는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17-18세기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은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곧 ‘식민지 건설’을 의미했다.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군사력으로 점령하며 폭력적으로 팽창했지만, 그 폭력을 ‘문명화의 사명’으로 포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상적 논리 덕분이었다.
이 사상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인류는 진화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진화의 단계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향하는 단선적 진행이라는 믿음이다. 이 단계적 진보의 관념은 곧 식민지 건설을 정당하게 만드는 윤리적 근거가 되었다. 식민화는 미개를 문명으로 끌어올리는 사명으로 간주되었고, 제국은 자신을 문명화의 주체로 상상했다. 그렇기에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필수적이었고, 식민지가 없다는 것은 곧 문명국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유럽 각국이 차례로 식민지를 확보하며 자신들의 문명적 우월성을 입증하려 할 때, 러시아는 유럽의 변두리로 남아 있었다. 식민지를 갖지 못하면 제국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러시아를 움직였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서유럽의 제국들이 미치지 못한 아시아 동쪽으로 눈을 돌리고, 그곳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문명국이 되고자 했다. 이렇듯 러시아 ‘동진’의 충동 뒤에는 유럽에 대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의 심리적 기제가 숨어 있었다.
순혈주의로 타자 제거하기
이 같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은 이후 ‘순혈주의’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러시아 영토국가의 정체성은 ‘우리 국민, 우리 러시아인, 우리 백인만이 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배타적 신념 위에 세워졌다. 이 논리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공포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기 정체성을 타자의 배제 위에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를 무엇으로 묶을 것이가에 대한 질문에 이들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만을 순수하게 남겨놓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1900년경 아무르주도 블라고베셴스크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이곳에서 약 5,000명의 중국인과 만주인이 강에 수장된 대학살이 벌어졌는데, 이는 러시아 영토국가의 순혈주의적 정체성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나’의 순수함을 입증하기 위해 타자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영토국가가 세운 정체성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환동해의 역사적 감수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목격하게 된다. 환동해의 액체 세계가 서로 섞이고 교류하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온 유동적 정체성의 역사라면, 러시아 제국의 동진은 그 관계의 망을 파괴하고, 타자를 지워서 자신을 세우려는 폐쇄적 정체성의 역사였다. 러시아의 동진은 흐르고 있는 바다 위에 새로운 경계선을 긋고, 흐름의 세계를 단단한 벽으로 바꾸는 사건이었다. 그 순간부터 환동해는 더 이상 완전히 열린 바다가 아니게 되었다.
액체 사람들, ‘중도’의 감각 위에 서다
환동해권의 유목민들의 정체성은 타자를 대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윤리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타자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존재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며, 타자 없는 순수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목민의 정체성은 고정과 배타의 논리가 아니라, 관계와 교류의 논리에 기반한다. 영토국가가 ‘나 이외의 것은 모두 배제한다’는 원리로 자신을 증명한다면, 유목적 세계는 ‘나와 타자가 함께 있음으로써 내가 더 선명히 존재한다’는 관계의 윤리로 자신을 유지한다. 유목은 이 차이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삶의 태도였다. 나와 다른 타자, 다른 장소, 다른 시간과의 마주침이 많을수록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선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차이들을 하나로 통합하거나, 어떤 절대적 중심으로 묶으려는 시도 또한 거부했다. 환동해의 북방 집단들이 형성한 네트워크를 보면, 그 안에는 단일한 질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규모와 방식으로 얽힌 다층적 공동체들이 존재했다. 주강현 선생님은 이러한 환동해를 ‘이주와 유목을 반복하는 민족들이 만들어낸 인종의 용광로’로 보며, 이곳에서 ‘단일 민족’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 환동해의 역사를 국민국가 중심의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이 지역이 지닌 복합적 관계망과 ‘차이’의 역동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렇게 환동해 사람들은 타자를 배제하지도, 타자 속에 완전히 흡수되지도 않았다. 환동해의 유목민들은 이 두 극단— 즉 배제의 힘과 동화의 힘—사이에서 ‘중도’로 존재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동시키며 균형을 유지했다. 그들은 양쪽 경계 사이에 새로운 틈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힘이 맞부딪히는 그 틈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윤리를 만들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세워왔다. ‘중도’란 무기력한 타협이 아니라, 양쪽의 힘을 동시에 인식하며 그 사이의 공간을 살아내는 적극적 사유이자 실천이다. 환동해의 세계는 끊임없이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흩어지는 힘, 즉 서로 다름이 유지되는 상태 속에서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중도(中道)’의 감각 위에 서 있었다.
야쿠티아 러시아인, ‘경계면’에 선 정체성
시베리아 북쪽, 혹한의 대지 위에서 형성된 야쿠티아에는 17세기 이후부터 대규모의 러시아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국경을 넓히기 위해 파견된 정착민이자 개척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였지만, 그 사이 현실 생각보다 복잡하다.
주강현 선생님은 이 장면을 통해 ‘그들 중 몇 명은 야쿠트인이 되려고 하기조차 했다’고 쓴다. 러시아인 정착민들은 야쿠트의 생활 양식과 신앙, 언어를 받아들이며 점차 혼혈화되거나 현지인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러시아의 노래를 기억했고, 러시아 정교를 신앙하며, 모국의 언어를 잊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중의 감정, 즉 현지에 동화되려는 의지와 동시에 본국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공존한 듯 보인다.
이 양가적 정체성은 영토국가의 국민정체성과는 다른 형태의 실존을 보여준다. 러시아 제국은 이들을 문명화라는 명목으로 타국에 보냈지만, 그들이 실제로 현지에서 겪은 것은 문명화가 아니라 낯선 곳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묻는, 즉 유동적 정체성이 생성되는 과정이었다. 야쿠티아의 러시아인들은 제국의 국민이면서도, 동시에 제국의 경계에 놓인 주변부의 타자가 되었다. 그들의 존재는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 관계는 야쿠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야쿠트 사회 내부에서는 러시아에 대항해 민족적 자각과 문화적 복원이 활발히 일어났다. 주강현 선생님님이 말하듯, 20세기 초 야쿠트 민족운동은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러시아 제국의 동화 정책 아래에서 억눌렸던 언어, 신앙, 민속, 춤과 노래가 다시 되살아났고, 자신들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민족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의 요구를 넘어 존재 방식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야쿠트인들은 자신들의 땅과 하늘, 강과 바람 속에 깃든 신성한 관계망을 회복함으로써, 제국이 가져온 일방적 ‘문명’에 대한 대항의 윤리를 세웠다.
야쿠티아의 사례는 환동해를 통해 논의 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것은 유목적 정체성이 단순히 이동하거나 섞이는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미묘하게 조정되는 복합적인 무엇임을 보여준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소속이나 단일한 문화적 표지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조정되고 교류하며 복합적으로 형성되는 유동적 구성물임을 일깨워 준다.
러시아인들이 현지화되면서도 노래와 신앙을 통해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듯, 야쿠트인들 또한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자신들의 영적 세계관과 집단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정체성은 이처럼 단일한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고, 충돌과 교류, 기억과 변형의 다층적 층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었다.
이 두 집단의 만남은 폭력적이었지만, 동시에 서로의 경계를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 더 분명히 물을 수 있었다. 이들을 보며 ‘액체의 역사’, 환동해의 ‘액체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식민자와 피식민자, 주체와 타자라는 이분법은 이곳에서 서로를 침투하고 변형시켰다. 경계는 깔끔한 분리선이 아니라 혼합과 재조정이 일어나는 넓은 면의 형태를 띄며 액체적 관계의 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액체의 역사’가 지닌 복합성이다. 야쿠티아의 사례에서 우리는 그 복합성을 본다. 정체성은 순수하지 않으며, 언제나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 변형되고 다시 흐른다. 그 변화는 때로는 폭력의 형태로, 때로는 상호 조율의 형태로, 때로는 기억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액체의 복합성은 단순한 ‘섞임’이 아니라,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다.
야쿠티아의 러시아인은 제국의 국민이면서 동시에 경계인이 되었고, 야쿠트인은 피지배민이면서도 영토국가의 동화를 거부한 주체로 서 있었다. 그 사이의 흐름—이주, 교류, 모방, 동화, 저항—이 바로 환동해 문명의 본질인 열림과 관계, 이주와 유동, 그리고 액체성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이 복합적 액체성 속에서, 정체성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과정으로 존재한다.
발해인, 땅을 잃고 세계를 얻은 사람들
거란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발해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라졌지만, ‘발해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경이 무너지고 정치적 주체가 해체된 뒤에도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흩어졌고, 때로는 타국의 지배를 받으며, 때로는 스스로 다른 나라의 땅을 찾아 이주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자신들을 완전히 타자화하지 않았다. 이주한 곳에서도 스스로를 발해인이라 불렀고, 그 이름으로 살아갔다.
영토국가의 국민정체성이 땅과 권력의 경계 속에서 구성된다면, 발해인의 정체성은 기억과 관계의 지속성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의 집단 자의식은 소유나 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온 기억, 공동체의 윤리, 그리고 이동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의 감각에 기반했다.
926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인들의 저항은 약 200년 동안 이어졌다. 왕족 대씨(大氏) 일족은 만주 북부 일대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발해의 부활을 시도했고, 이는 981년까지 존속하며 거란의 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거란의 압박이 심화되자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했고, 고려 태조 왕건은 이들을 ‘형제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 왕족 대광현에게 귀족의 지위를 부여했다. 일부 발해계 세력은 만주 지역에 남아 여진과 연합하거나 새로운 집단으로 편입되어 살아남았으며, 고려 내에서도 ‘발해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200여 년간 이어진 저항운동은 단순히 국가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발해적 존재방식’을 잃지 않으려는 정체성의 재생 운동이었다. 이들의 저항은 국토의 회복이 아니라, ‘자신됨’을 지키는 행위였고, 언어와 신앙, 예술과 관습, 공동체의 감각을 이어가려는 문화적 실천이었다.
영토국가의 국민들은 땅의 경계와 소속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만, 발해의 사람들은 흩어짐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그들에게 ‘발해’란 장소가 아니라 시간 속의 기억, 그리고 서로 다른 지역과 세대를 관통해 이어지는 관계의 그물망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땅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유대의 운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발해인의 자의식은 영토국가의 자의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민국가의 자의식이 소유와 배타의 경계 감각에서 비롯된다면, 발해인의 자의식은 유동과 지속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자신을 땅 위에 새기지 않고, 흐름과 관계 속에 새겼다. 그래서 영토로서의 국가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흐르는 물 위에서 그들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인의 200년 저항은, 땅을 잃은 자들이 어떻게 세계를 잃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역사다. 그것은 환동해 문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또 다른 사례이기도 하다. 발해인들은 영토를 넘어선 정체성, 즉 함께 숨 쉬고 함께 이동하며 기억을 공유하는 존재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를 이어갔다. 그들의 ‘발해됨’은 곧 환동해의 액체성을 보여준다. 땅이 아닌 관계로, 경계가 아닌 흐름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사람들, 그들의 역사는 흩어짐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의 가장 유연한 형태였다.
결국 환동해를 따라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는, 정체성을 땅에 고정시키려는 힘과 관계 속에서 흐르게 하려는 힘이 맞서온 역사였다. 브로델이 제시한 지중해 모델이 결과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와 영토국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주강현이 말하는 환동해는 영토국가에 반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땅의 역사에 맞서는 ‘액체의 역사’를 제안하며, 역사의 주체를 영토국가나 국민성이 아닌, 관계를 기반으로 한 유목적 존재들에게 되돌려준다. 러시아 제국의 동진은 타자를 지워서 ‘순수한 우리’를 세우려 했고, 그 순간부터 열린 바다는 경계의 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환동해의 사람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섞이고 교류하며,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 ‘중도’의 자리를 선택했다. 야쿠티아의 러시아인처럼 경계면 위에서 이중의 정체성을 살아내거나, 발해인처럼 땅을 잃고도 관계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이들은 영토 없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흐름 속에서 자신을 새로 짓는 액체적 존재들이었다. 이 바다는 여전히 관계의 역사, 교류의 리듬, 그리고 장기 지속의 시간 속에서 살아 있다. 영토와 경계, 배타와 소유의 논리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반복될 때마다, 환동해의 액체 역사는 그 반대편에서 또 다른 정체성의 감각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