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환동해 문명사] 에세이 수정(2) 환동해, 환의 관계망
해양 인류학, 『환동해 문명사』 에세이 수정(2), 251105, 보나
환동해, 환의 관계망
해양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영토를 중심으로 한 국가 중심의 역사관이 얼마나 편협한 관점인지 느끼게 된다. 국경과 농업, 수도, 인간 중심 등 하나의 척도로 세상을 재단하는 세계관은 무자비한 폭력과 무절제한 착취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주강현 선생님은 『환동해 문명사』에서 이러한 역사관에 대응하고자 해양 중심의 역사관을 강조한다. 환동해는 국가와 대륙을 넘어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융합되고, 자연과 공생공존하며 살아갔던 환의 관계망이었다. 다만 이러한 문명 네트워크는 제국주의의 침략 네트워크로 활용되었고, 현대인은 이를 중심으로 기술된 역사관에 종속되었다. 근대적 역사관은 무절제한 제국주의 야심에 의해 다중적 정체성이 중첩된 기형 국가의 탄생으로 가시화된다. 만주국의 이러한 모습은 여름철에 어로를 하고 겨울철에 정주하며 살아가던 시베리아 문화권 소수족들의 삶의 모습과 대비되는 현상이다.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소수족들의 순환적 삶이 방식과 만주국의 초국적 현상을 비교하며 환동해 문명의 순환성을 좀 더 살펴보자.
초국적 현상
해양사관으로 바라본 환동해는 영토를 기반으로 한 국가를 초월해 다양한 민족과 인종의 교류가 이루어진 문명 네트워크다. 일반적으로 초국적(transnational)이란 국가 간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회, 문화 조직이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의미하며 타자를 배제·혐오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주국의 초국적 현상은 다른 결을 지닌다. 만주국은 국경을 넘어 만주족과의 동일혈통론을 주장하며 초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모두 자국의 식민 팽창주의를 목적으로 한 근대적 창조물이다. 러시아, 중국,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은 인종, 역사, 언어를 모두 식민화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며 민족주의의 정당화를 창출한 것이다. 그런데 만주국은 왜 이렇게 식민화의 정당화를 위한 실험장이 된 것일까?
문명의 용광로라 불리는 만주의 역사는 복잡다단하다. 만주는 다양한 민족과 인종, 언어가 혼용되어 변하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한 망상적 교차로였다. 바로 이러한 다양한 역사적 민족 구성이 19세기에 러시아, 청, 일본에 의해 패권을 다투는 이유로 이용되었고, 만주는 초국적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만주국은 제국주의의 패권을 위한 각국의 야망이 팽팽하게 맞서 변용 없이 쌓여 만들어진 ‘초국적 현상(transnational phenomena)’이었다. 이러한 초국적 현상은 각국이 자국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 중심의 관점에서 만주를 바라보며 발생했다.
청은 만주를 내지인 중국과 변방인 만주 사이에 벌어진 발전 수준의 격차를 제거해야 하는 ‘변강 내지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일본은 일본, 조선, 만주, 시베리아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하는 ‘동일혈통론’과 만주족이 중국의 한족이 아닌 일본과 혈통적, 문명적으로 유사함을 강조하는 ‘동이북적문명론’을 내세웠다. 이러한 논리는 후에 만주족이 일본을 지도 민족으로 삼아 발전해야 한다는 ‘민족협화’와 이를 통해 이룩되는 ‘왕도낙토(王道樂土)’로 실체화되며 만주국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유럽 측면에서 만주는 몽골족과 함께 ‘타타르’라 불리며 정주 문화권을 괴롭히는 기마유목민족이라 여겨졌다. 이러한 관점들은 모두 만주의 역사와 그곳에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민족들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민족 우월론에 의한 자국 중심의 논리다. 이러한 환경에서 만주족들은 스스로 새로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며 정체성이 위축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지 못하고 열강의 패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공중에서 분해되어 시대의 비극적 산물이 되어버렸다. 근대의 초국적 현상은 이처럼 한계나 절제를 모르고 끊임없이 배를 채우려는 자기충족적 식민 팽창주의이자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국가적 폭력과 착취가 수반된 비순환적 산물이었다.
순환적 삶의 방식
이러한 초국적 현상과 대비되는 시베리아 문화권의 소수족들의 삶의 방식이 인상적이다. 고대의 시베리아 소수족들은 만물에 영험한 영이 있다고 여기는 샤머니즘을 토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모색했다. 퉁구스족은 오직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때만 나무나 동물을 죽였는데, 이는 모두 자연이 허락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불필요한 고통과 파괴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들이 사냥한 동물에도 경외심을 가졌다. 부득이하게 살생을 할 경우, 의례를 통해 정중한 속죄의식을 치루기도 했다. 태평양 연안의 아이누족은 해양 포유류를 사냥했는데, 여름철에 어로 생활을 하고 겨울철에는 정주 생활을 번갈아하는 순환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순환의 방식에는 자연과 공생공존하기 위한 생태적 삶의 지혜와 만물을 공경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자연의 모든 것을 자기충족적 수단으로 여기고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근대국가의 일방적 폭력성과 확실히 대조되는 방식이다.
환동해는 교류를 통해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융합된 역사 공동체들과 자연이 공생공존하며 살아갔던 문명 네트워크다. 그런데 이러한 환동해 네트워크가 근대의 침략 네트워크로 활용되었던 사실은 우리에게 네트워크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한다. 근대역사관이 가진 일방성과 비순환성, 이로 인한 국가적 폭력은 만주족, 아이누족, 이텔멘족 등의 소수족들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다양한 생물종들의 소멸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시베리아의 타이가, 툰드라 숲 속에 있는 오두막집에는 어떤 여행자도 누군가에 의해 마련된 장작과 성냥, 음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행자 또한 오두막을 떠날 때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 중 얼마를 남겨둔다고 한다. 이들의 삶의 방식에서 척박한 환경에서도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절제와 나눔의 미덕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