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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인류학


[환동해 문명사 에세이(3)] 환동해의 표류자, 나카하마 만지로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5-11-05 17:12
조회
9

 

환동해의 표류자, 나카하마 만지로

 

동해는 한반도 동쪽에 있는 바다로 누가 뭐래도 우리의 바다다. 하지만 환동해 문명사를 통해 바라본 동해는 동해, 일본해처럼 한 국가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주강현 선생님은 한반도, 극동 러시아, 중국 동북부, 일본으로 둘러싸인 환동해가 동북아의 모든 나라들이 중층적이고 망상적으로 상호 교섭하는 역동성의 바다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열려 있는 바다는 해류를 통해 어느 곳과도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다. 내 나라의 바다라고만 생각했던 동해는 여러 민족 공동의 구역임을 넘어, 타 대륙과도 쉬이 공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져갔을까? 바다의 흐름에 이끌려 이곳저곳에 닿았던 이들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블루 머신에서 헬렌 체르스키는 해양생태계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념인 전달자, 표류자, 항해자로 구분하여 소개했다. 전달자는 바다에서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하며, 바다 생명들은 전달자가 실어 나르는 메시지를 통해 바다를 인식한다. 빛과 소리는 인간에게 바다가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전달자이다. 해류에 이끌려 바다 곳곳을 떠다녀야 하는 표류자는 이 바다의 역동성 덕분에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다. 복잡한 해양 엔진은 때때로 이 승객들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실어 나르며 바다 곳곳을 연결한다. 항해자는 바다의 흐름에 끌려 다니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이동하며 이익을 취한다. 능동적으로 바다를 항해하며 해양 엔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주강현 선생님에 의하면 환동해는 오랜 시간 수많은 동식물과 물자, 사람 들이 오고간 문명의 회랑回廊이다. 그 긴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표류는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하는 혼돈스러운 상태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하지만 헬렌 체르스키는 의도치 않았던 곳으로 쓸려갈 수 있기 때문에 표류자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헬렌 체르스키의 표류자개념을 빌려, 역사의 수많은 표류자들 중 한 명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폭풍에 길을 잃었던 나카하마 만지로는 바다가 데려다 놓은 낯선 땅에서 신문물을 배우고, 그것을 고국으로 가져오며 일본의 제국주의를 열었다. 휘몰아치는 근대의 길목에서 환동해와 태평양 여기저기를 표류한 그는 수년 후 두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수많은 것들이 뒤섞이는 해양 엔진 속에서 표류한 나카하마 만지로를 통해 표류가 새로운 길의 시작임을 이해하게 된다.

 

나카하마 만지로

나카하마 만지로中浜萬次郎(1827~1898)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일본의 시코쿠四国 도사번(지금의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생업에 뛰어든 그는 열여섯 살에 출항했다가 조난당해 표류하게 된다. 살아남은 동료들과 약 140일을 섬에서 지내다 미국 포경선에 의해 구조되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구조한 포경선의 이름(존 하울랜드 호)을 따 존 맨(John Man)으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식 교육을 받고 서양의 문물을 익혔다. 1851년 미국식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일본인으로 10년 만에 귀국한 만지로는 1853년 막신幕臣이 되어 번역, 군함 조련, 영어교수 등으로 일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가이세이 학교開成學校의 영어교수가 되었다.

 

환동해에서 태평양으로

만지로 일행이 조난당했을 당시 일본의 막부는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다. 막부가 허락하지 않은 교역은 공식적으로 불허하고 있었기에 배는 일본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만지로 일행 또한 자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포경선에 실려 대양을 떠다닌 그들은 다섯 달 후 중간 기항지인 하와이에 내리게 된다. 하울랜드 호 선장의 주선으로 다른 동료들은 이곳에 머무는 반면, 만지로는 선장의 권유로 다시 배에 올라 다시 포경선의 여정에 합류한다. 2년여 가까이 포경선에서 지내며 만지로는 그들의 말을 배우고 문화를 익히며 조금씩 동화되었으며, 18435월 뉴베드퍼드에 입항, 최초의 미국 거주 일본인으로 페어헤이븐(Fairhaven)에서 살게 된다.

위트필드 선장은 그를 아들처럼 대하고 교육해주었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은 바다 건너온 동양인인 그를 환영해주지만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니었지만, 그런 것이 그에게 방해가 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서양의 신문물을 접한 그는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민주주의 정신에 매료되었고,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 등의 학문에도 열심히여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위트필드 선장은 만지로가 미국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선장의 제안으로 항해사 양성학교에 입학해 최첨단 포경기술, 항해기술, 조선기술 등을 익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태평양에서 환동해로

만지로는 마음속에 늘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고,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늘 꿈꾸었다. 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미국에서 일본인으로 일하며 꿈을 실현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다시 바다의 흐름에 올라타게 된다. 19세기는 포경선이 전 바다를 탐험하며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던 때였다. 만지로는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선원으로 승선해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3년여를 떠다니다 귀항한다. 이 항해 중 그는 여러 기항지와 바다를 다니며 각지의 문화들을 습득할 수 있었고, 일등항해사이자 부선장으로 선임되어 다양한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던 그는 조난당한 지 10년이 지나 일본인도 아닌 미국인도 아닌 모습으로 일본으로 돌아온다. 많은 일본인들이 서양의 신기술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우호적이고, 일본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표류 이후 그는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1853년 미국 페리의 일본 내항 이후 일본은 개항하게 되고, 만지로는 일본의 개항과 태평양 진출에 번역과 조선술, 항해술 등을 제공하며 일조하게 된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며 몸에 익힌 문화와 영어 덕분에 그는 서양과의 교류에서 통역사로 활동했고, 항해사 학교에서의 배움 덕분에 선박 건조와 항해술 교육에도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나카하마 만지로의 정체성

헬렌 체르스키는 바다를 지구를 움직이는 거대한 엔진으로 본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물질과 에너지, 생명을 순환시키며, 지구 전체를 연결한다. 그 속에서 떠다니는 모든 것은 표류자이면서 순환의 일부로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만지로 역시 바다의 일부이자 블루 머신의 한 구성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계의 흐름을 따라 바다를 건너며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이동시켰고, 그의 정체성 또한 끊임없이 흐르며 재구성되었다. 나카하마 만지로는 고정된 국적과 언어, 문화에 머물지 않고, 블루 머신을 따라 표류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시키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창조했다.

역사는 만지로의 이런 삶을 역경을 딛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자로 그리곤 한다. 하지만 환동해 문명사의 주강현 선생님의 말씀처럼 액체의 문명사로 그의 삶을 본다면, 환동해를 문명의 회랑이라고 표현하듯이 그를 환동해와 태평양을 표류하며 새로운 바닷길을 연 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표류는 조난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는 가능성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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