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환동해 에세이](3) 보이지 않는 역사
관계의 역사를 품은 바다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세계는 오랫동안 서구를 중심으로 설명되어왔다. 아메리카는 구대륙에 사는 유럽인이 처음 발을 내딛었다는 이유로 ‘신대륙’이라 불렸고, 유럽에서 쓰던 유색인종 같은 말은 유럽을 보편으로, 타자를 주변으로 밀어냈다. 세계는 제국의 열강에 합류하려는 경쟁 속에 곳곳에서 식민지화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는 국가의 경계를 세우고, 누군가는 그 안으로 편입되거나 바깥으로 밀려났다. 근대의 역사관은 영토국가에 기대어 세계사를 정리해왔다. 우리가 실크로드를 이야기할 때, 유럽의 학자들이 정해놓은 대로 동서양을 이어준 간선도로라고 단순하게만 이해한다거나, 서구의 문화가 동쪽으로 옮겨지며 사용된 도로라고만 보는 단선적인 시선은 그 공간을 오가는 다양한 문화들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장(場)이었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해양 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은 『환동해 문명사』를 통해 ‘환동해’가 영토국가의 반대이자, 중심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개념임을 상기해왔다. 지리적으로 환동해는 중국 쪽에서 바라본 동쪽 바다, 러시아 연해주의 바다, 오호츠크와 인접한 사할린과 홋카이도의 바다, 일본 북서부 바다, 그리고 다양한 북방 소수민족들이 바라본 바다 등을 포괄하는 바다다. 책에서 의미하는 환동해는 관계의 역사를 품고, 사방으로 열려 소통의 길이 되었던 바다다. 이 바다 위로 모피의 길, 흑요석의 길, 해삼의 길, 식해의 길, 온돌의 길 등 다양한 물자와 문화들이 이동하는 길이 만들어졌다. 실크로드의 동서교역로는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의 3대 간선과 남북으로 마역로, 불타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라는 5대 지선으로 사람들이 오갔다. 이에 주강현 선생님은 실크로드를 문명 교류의 통로로서 간선과 지선을 망라하여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거대한 교통망으로 인식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를 이해할 때, 국경이나 이익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본래 그 길을 오간 사람들에 대해서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한 동해가 다양한 소민족의 바다였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이곳은 국가별로 나누어 설명하기에는 진실된 그 공간을 이해하기 어려다는 말이다. 동해는 거대한 호수 같은 바다로, 이곳을 둘러싼 각 나라와 종족들이 해안을 통해 이동하거나 바다를 건너 교류했던 곳이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국가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환동해 문명권의 소수민족과 소사회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흡수된 민족, 코사크와 부랴트
유라시아에는 본래 국민국가와 무관하게 다양한 민족과 언어들이 공생공존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17세기에 이르러, 서유럽 문명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어있던 차르 러시아의 동방정책이 시작되며 유라시아–시베리아는 영토화에 휩쓸렸다. 차르의 군대가 앞세운 무장 코사크족은 사방으로 무리들을 보내어 원주민을 정복하고 요새를 세웠다. 책에서는 꿈같은 보화에 이끌린 그들의 폭력성에 대해, 이성을 잃은 하이에나로 묘사하고 있고, 그들의 정복 전쟁은 알래스카에 당도할 때까지 무섭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강력하고 흉폭한 군대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상대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몽골의 후예 부랴트족이다. 바이칼호 일대에 살던 부랴트족은 코사크족과 30년간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코사크의 약탈, 부랴트의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식으로 전개되었는데, 더이상 저항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부랴트는 차르에 복종하게 된다. 그들은 복종의 대가로 작위와 봉토를 받고 조공을 면제받았다. 국가로 흡수된 부랴트족은 번영을 누리며 점차 러시아화가 진행되는데, 러시아 종교로 개종하고, 밀과 감자를 재배하기 위해 목축을 포기했다. 19세기 중반 부랴트족 사회는 그럴듯한 규모의 유럽화된 중산층이 형성되었다. 그 와중에 민족주의 세력이 점차 생겨나면서 부랴트어 방언들을 지키자는 주장과 함께 몽골의 낭만을 노래한 장편 서정시들이 발표되었다. 차르가 망하고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부랴트는 혼돈을 맞이했다. 스탈린 정책에 저항하며 탄압과 기근을 겪는다. 소련이 해체될 무렵인 1992년 부랴트공화국을 선언하며 러시아연방의 일원이 되었는데, 오늘날 부랴트족은 30%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국가에 한정하여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무르강 하구 인종의 용광로
러시아는 17세기 말 청나라에 밀려 아무르강 유역을 차지하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이 되어, 청의 쇠약과 더불어 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무르강 하구에는 지리적 특성으로 니브흐족, 울치족, 네기달족, 나나이족, 오로크족, 아이누족, 야쿠트족, 에벤키족, 한국인 등 다양한 종족이 혼합되어 살고 있었다. ‘골디’라고도 불렸던 나나이족은 가장 인구가 많은 소민족으로 문화적 차이에 따라 20개 이상의 부족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부족들의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 구분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세미나를 통해 부족들은 저마다 고유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신화는 그들의 복식, 음식, 언어, 제의 등으로 발현되어 부족의 고유성을 만든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알았을 것이다.
아무르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한 기술을 지녔는데, 먹고 사는데 가장 중요한 연어를 포함하여 물고기잡이 기술이 뛰어났다. 태평양 연안에 살던 사람들은 고래나 물개 같은 바다 포유류 사냥에 종사했다. 거기서 나온 가죽을 내륙인과 교환무역으로 팔았다. 울치족은 특별하게 뜨는 작살을 개발하여 썼으며, 니브흐족은 얼음이 녹으면 배를 타고 나가 원해에서 흰고래를 사냥했다. 낮은 바다로 돌진해온 고래를 작살로 잡았는데, 고래 머리는 땅에 묻어 제의를 거행하여 바다의 신에게 바쳤다. 나나이와 니브흐는 자신들의 정착지로 이사온 중국 사람들에게 토양에 맞는 농사법과 동물 사육기술을 전수해주었고, 뛰어난 손재주로 철제 무기와 카약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르강 사람들의 삶에서 공예도 중요했는데 금속공예는 중국, 일본, 러시아로 수출되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기술 중에서 물고기 가죽을 손질하는 솜씨가 인상 깊었다. 물고기 가죽은 다듬어 유리창 대용이나 방수천으로 쓰고, 축제나 결혼식 같은 의례용 또는 샤먼의 의복으로 썼다. 물고기 가죽이 내구성 좋은 천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천부적 기술도, 디자인에서 드러나는 심미적 안목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주강현 선생님은 이곳에 점차 외부로부터 다른 문화의 유입으로 사람들이 오염되었고, 세계관과 제의가 타락되었고 말한다. 점점 샤먼의 옷이 만주 샤먼의 옷을 닮아갔고, 나나이족은 중국의 설날을 축하하고 중국의 상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명의 매개자, 아이누
2023년 인문세 홋카이도 답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누에 대해 공부했다. 당시 그들의 신화, 역사에 대해 공부했음에도 지금껏 그들이 일본 변방의 민족이라는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받았던 뼈아픈 과거와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만 그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환동해 문명사』를 통해 그들이 홋카이도, 사할린, 오호츠크 연안을 누비며 물고기와 모피, 철과 비단을 중개했던 역동적인 해양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누는 계절풍과 해류를 읽고 육지과 섬을 잇는 항로를 알고 있었고, 국가의 경계가 굳어지기 전까지 문명을 이어주는 담지자로서 ‘문명의 매개자’ 역할을 해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이누는 그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계승하는 민족이었다. 기하학적 패턴을 지닌 그들의 의복은 놀랍도록 정교했고, 그것이 품은 전통적 의미와 기술은 말할 것도 없이 경이로웠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 이후 근대국가로 이행하면서 홋카이도를 접수하였고, 아이누는 국가에 편입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문명화의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점, 문자가 없다는 점, 수렵과 어로 생활을 한다는 점 등이 이유가 되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오호츠크해 전역에서 문명을 잇는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그들이, 국가가 들어서며 하루아침에 ‘미개’라는 낙인을 받게 되었다. 급격한 변화를 겪었을 아이누의 절망감, 막막함이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1899년 국가의 표준에 부합하는 국민으로 관리하기 위해 구토인보호법이 시행되었다. 보호라는 말에 가려진 동화, 억압 정책이었다. 개인이 소유하는 법이 없었던 아이누의 땅은 분배되었고, 그마저도 아이누에게는 경작이 어려운 척박한 땅을 배정했다. 국가는 일본식 이름과 일본어 교육, 정착 농업을 강제했다. 누구보다 활발하던 해양민족 아이누는 사라지고, 변방의 아이누로 각인되었다.


키메라를 닮은 땅, 만주국
지금까지 나는 한때 중심이 없었던 변방의 민족이었거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민족들을 주목하며 글을 썼다. 하지만 만주국은 소수민족도 소사회도 아니고 앞서 이야기한 종족, 공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는 종종 드라마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만주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주어서 살기 좋은 곳, 자유로운 곳, 발전된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만주국은, 제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계된 국가로 외부와 관계를 상상하기 어렵고 뭔가 모순적인 국가다.
칭기즈칸의 막냇동생 옷치긴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시기만 해도 만주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었다. 농경과 유목 모두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만주에서 흥한 세력은 대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근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이 한반도를 징검다리 삼아 만주로 영토 확장을 꿈꾸었던 것도 만주를 통해 대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대륙 진출의 관문을 확보하려는 야망 때문이었다. 1932년 관동군은 만주국을 세우고, 청의 마지막 황제를 국가 원수로 앉히며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을 쓴 야마무로 신이치는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괴물 ‘키메라’에 빗대어 만주국을 묘사한다. 사자, 양, 용이 합쳐진 키메라처럼, 만주국 역시 일본의 관동군과 정부, 청 왕조가 뒤엉켜 만들어진 괴이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만주의 문명화를 위해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구호를 내세워 일본, 만주, 조선, 몽골, 중국이 협력하는 이상 세계를 표방했다. 실제로는 제국 중심의 식민 질서를 세우자는 이념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기획된 만주국은 다섯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닌, 제국의 통치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만주라는 이름은 서구와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심을 위해 만들어낸 근대적 창조물”(『환동해 문명사』, 307쪽)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 이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1906)를 세워 본격적인 식민 개발에 착수했다. 철도는 자원과 군대를 실어 나르는 식민의 도로 역할을 했다. 그 길을 따라 광산이 개발되었고, 하얼빈과 다롄 같은 도시는 국제 자본과 제국의 욕망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었다. 거대한 욕망을 실어 나르던 제국의 길이 1945년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막을 내리자, 만주국은 더이상 존재할 이유를 잃고 사라져버린다.

남만주철도 노선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제국의 길이 곧 힘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사방으로 열린 길이 아니고, 환동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정해진 길 외에 다른 장(場)을 상상하기 어렵기만 하다. 모든 것은 그 길을 따라서 전달되어야 할 것만 같고, 길에서 벗어난 영역은 변방이자 외지로 느껴지게 한다. 현실적으로도 역세권, 수도권, 고속도로 등에서 권력 구조를 느끼기도 한다. 그 공간 자체에 대해 좋고 나쁨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사고에서 공간이 그 자체로서가 아닌 권력이나 위계로 작동하는 순간 덜 중요한 곳, 외지, 변방으로 분리해버리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간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적 감수성에 자주 사로잡히는 나를 위해, 두고두고 생각해볼 바다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