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반구대 답사기]반구대의 자연, 일상의 신성함
서론밖에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뒷부분을 좀 더 수정해보겠습니다.
반구대의 자연, 일상의 신성함
오늘도 침대 속으로 가라앉고 싶은 몸을 근근이 일으키고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에 쫓기듯 나갈 채비를 하고 방학이라 아직 꿈나라에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며 대충 먹을거리를 설명하고 제발 공부 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집을 나서 일터로 향한다. 회사에서는 처리해야 할 일도 한가득, 상사 눈치 보랴 일이 잘못되면 욕먹으랴 아래 직원 단도리 시키랴 밥벌어먹고 살기 참 힘들다싶다. 퇴근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의 씨름이 아직 남아 있다. 아침에 나갈 때 늘어놓은 미션 수행을 확인하고 오늘도 어김없이 허송세월한 아이에게 폭풍 잔소리를 쏟아붓는다. 쌓여 있는 일들을 해치우다시피 허겁지겁 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이 나만의 일은 아닐뿐더러,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인간이 참 미력(微力)하고 우리네 일상이 별 볼 일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인간이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라지만 실상 그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할 수 있다는 게 기술 발달로 겨우 몸으로 하는 노동에서 벗어나 좀 빠르게 살고 바삐 지낸다 뿐이지, 세상사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좀 더 많이 갖기 위해, 좀 더 오래 살기 위해, 좀 더 잘 살기 위해 아등바등 하루를 살아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럴 때 우리가 기대는 게 신이다. 이 우주를 주관하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에게 내 힘 너머의 바람을 의탁하는 것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찾고,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나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그 신성한 힘을 떠올리며 간절한 소원을 기도한다. 저마다 믿는 신은 다르지만, 우리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내가 닿을 수 없는 그 힘을 가진 신을 떠올리며 자신을 의탁한다.
그러고 보면 기술도 문명도 뒤쳐졌을 선사에는 지금보다 더 많이 신에게 기댔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적응해 살 수 밖에 없었던 인간에게 기도하는 마음은 호모 사피엔스가 태초부터 지녔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인문공간세종>에서 2024년 세 번째 답사로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기도터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에서 우리는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화’, 문무대왕릉 앞바다, 골굴사의 골굴암을 들렀다. 네 답사지 모두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찾았던 곳으로, 속칭 영(靈)발이 가득했던 영험한 장소들이다. 이 중 문무대왕릉 앞바다는 무속인들 사이에 기도발이 센 곳으로 유명해 최근까지도 굿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기도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문화재로만 다뤄지는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화와 아직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문무대왕릉과 골굴사, 사람들은 이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어떤 신성한 힘을 떠올렸을까? 인류의 기도하는 마음을 찾아 떠난 인문세의 인류학 답사에서 그 힘을 상상해보자.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신성함
답사를 떠나기 전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공부한 내용에 의하면 암각화가 새겨진 암벽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한 힘이 깃든 곳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암각화박물관’ 주차장부터 반구대까지 걸어 들어가는 산책로의 자연경관도 뛰어나다고 했다. 암각화가 그려진 7000년 전과는 반구대 주변의 지형도 변하고 그곳으로 진입하는 경로도 당시와는 다르겠지만, 나는 그곳에 가면 입구에서부터 꼭 그 힘을 느껴보리라 다짐을 여러 번 했다.
큰 도로에서 박물관까지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도로 양 옆으로 산림이 이어져 나는 진입로부터 박물관이 산림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암각화박물관 주차장에서부터 20분 정도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산세를 따라 조성된 길을 따라 걸어가며 주변의 지형과 과거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특별해 보이거나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자연의 모습이나 조형물 같은 것이 있을까 해서였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반구서원(盤龜書院)과 정자 집청전(集淸亭), 반고서원유허비(盤皐書院遺墟碑)가 보였지만, 이는 모두 고려 말 이곳으로 유배 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儒林)들이 세운 것이었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들고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기운을 느낄 수는 없었다. 우거진 나무가 선사해주는 그늘에 뜨거운 태양에도 선선하게 반구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것 밖에는 별 소득이 없었기에, 반구대 앞에서는 뭔가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반신반의하며 나는 더 안으로 들어갔다.
반구대 암각화는 반구천을 사이에 두고 전망대에서 약 200m 정도 거리에 있었다. 훼손의 우려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암각화를 가까이서 볼 수 는 없었고, 우리는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었다. 망원경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보는 암각화는 사실 시시하고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가까이서 그 질감이나 세부 새김을 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망원경으로 암각화를 보는 데에 별 감동을 받지 못했고, 차라리 암각화박물관에서 보았던 모형 암각화가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보다 나는 그곳의 자연경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반구대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지, 반구대의 형상이 독특하지는 않은지, 신기해 보이는 나무나 암석 같은 자연물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해설사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정보를 줍줍하는 중에도 나는 반구대의 신성한 기운을 찾는 데에 정신이 팔려 사실 아무 얘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7000년 전의 반구대와 접속해보려 한 나는 과연 그곳에서 뭔가를 느꼈을까? 역시나 ‘아니올시다’이다. 7000년이라는 무구한 세월은 넘어서기 어려운 벽인가 보다.
골굴암의 초월적 신성함
그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골굴사의 골굴암이었다. 골굴사(骨窟寺)는 경주시의 함월산에 위치한 사찰로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석굴 사원이라고 한다. 골굴사의 높은 기암괴석 골굴암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 절벽에 매달려 작업을 했을 이들을 생각하면 아찔함에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뿐인가, 자연 암벽도 경이로운데, 거기에 새겨진 불상의 자애로운 미소와 온화한 자태는 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데다, 기이한 자연의 암벽에 새긴 신의 모습이라니 나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우리 말고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모두 저 아래 주차장에서부터 걸어 올라와 골굴암까지 또 가파른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쉬엄쉬엄 오르기도 하고 숨을 몰아쉬기도 하며 올랐다. 골굴암 주위로 둘러진 계단 옆으로는 낭떠러지라 다들 조심조심 한 발 한 발을 내딛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골굴암의 마애여래좌상과 그 암석의 곳곳의 석굴들에 모셔진 불상들, 꼭대기에 지어진 법당에서 절을 하고 기도를 했다. 누구도 이곳이 영험한 곳이다, 신성스러운 곳이다 말하지 않았지만 불상과 법당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히 말을 아꼈고 몸놀림을 조심히 가졌다.
나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화, 문무대왕릉, 골굴사의 골굴암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소로 찾았던 곳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반구대 암각화에서 그토록 찾았던 신성함은 골굴사의 골굴암이 주었던 자연의 경이로움과 위압감,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조형물이 주는 위대함이었다. 문무대왕릉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죽어서도 조국을 지키겠다는 유언으로 그의 유골이 화장돼 모셔진 수중릉이다. 문무왕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신격화해 우리는 그 영험함을 모시고 있었고, 골굴암은 기이한 자연에 인간의 힘을 더해 신성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곡리와 천전리의 암각화에서 나는 어떤 신령스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그날 답사의 장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며 나는 내가 가진 신의 이미지가 그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신성함이
골굴암에서 내가 만난 신은 어떤 모습이었나? 함월산 높은 암벽의 자연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산은 차를 타고 도착한 주차장에서 한 20분을 걸어 올라가서도, 암벽 주변을 회오리처럼 휘감은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야만 닿을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계단을 이용해서 오르는 것만도 이렇게 힘든데, 위험천만한 암벽에 매달려 신심(信心) 하나만으로 석공이 새긴 그 모습은 만면(滿面)에 인자함이 가득해 어떤 간절한 바람도 다 들어주실 것만 같다. 거기에 불교의 시초(始初)인 인도의 석굴 사원으로부터 왔다는 기원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 사원이라는 역사, 신라시대 불교를 대중화시킨 원효대사가 열반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더해져 그곳은 더욱 신비스러운 곳이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인간으로서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으로 신의 형상을 그리고, 그곳에 인간적 신화를 덧붙여 우리는 신을 떠올린다. 내가 좇았던, 그리고 결국 찾았다고 생각했던 신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과 능력의 관점에서 극대화된 신이었다.
내가 반구대에서 찾으려 했던 골굴암에서 만났다고 생각했던 신의 모습이었다. 그 신성함은 내가 사는 일상 안에서는 찾기 어려운 기이한 모습이다. 나는 그런 기이하고 기적적인 신성함을 반구대에서 만날 수 없었다. 반구대는 그저 산림이 우거지고 그 산을 굽이쳐 반구천이 흐르는 특별한 것 없는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당시 반구대는 ‘빙하기 이후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져 태화강 상류 인근까지 물이 들어왔다. 지금은 장생포 앞바다에서 반구대까지 26km나 떨어져 있지만’ 암각화가 그려진 7000년 전에는 ‘반구대 근처 굴화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만으로 고래를 몰아, 배 위에서 나뭇가지 들을 쳐서 소리를 내며 기슭에서 잡았을 것이다’.(「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자료집, 인문공간세종) 암각화가 그려진 반구대는 바다에서 내몰린 고래들이 생을 마감했던 곳이었다. 반구대는 바다에서 고래를 잡아 생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던 곳이었다.
반구대의 암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 종류의 고래가 그 특징이 잘 포착되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지만, 그곳에는 고래 외에도 거북, 바다사자, 상어, 물고기 같은 바다동물과 호랑이, 사슴 같은 육지동물의 생태적 특징을 매우 상세히 표현하고 있으며, 동물 사냥과 고래잡이 과정 등 선사시대 사냥과 해양 어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반구대 앞을 흐르는 물은 당시에 바다이기도 했었겠지만, 그 물과 이어지는 산림은 암벽에 그려진 육지 동물의 사냥터이기도 했을 것이다. 반구대는 고래를 잡고 사냥을 하고, 말 그대로 그들에게는 일상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곳이자 그들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 함께 하는 곳이다.
골굴암에 석가모니를 믿는 사람들이 신을 떠올리며 그 모습을 떠올리며 새겼듯이, 선사인들은 그곳에 고래를 비롯해 여러 동물과 어로나 사냥 도구, 생활상을 새겼다. 지금에야 그러한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는 게 특별해 보이고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살리는 동식물과 자연의 모든 것에서 신성함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에게 신은 자신들을 먹이고 살리는 자연과 일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것들이 연결된 다양한 생명들의 관계 속에서, 그 생동감 넘치는 힘 속에서 자신들이 살아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해하고 제의를 지냈을 것이다.